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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올리는 자료로 상업적 목적은 없으며 선정된 사설의 정치적 성향은 블로그 운영성향과 무관합니다.
주요신문사설
[서울신문]
1. 80조원 쓰고도 40만명까지 떨어진 신생아 수
젊은층이 결혼과 출산을 꺼린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정부가 혼인율과 출산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간 내놓은 대책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온갖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갔다. 통계청이 어제, 그제 내놓은 지난해 출생·사망·인구 동향은 우리 사회의 저출산과 혼인 기피 현상이 위험 수위를 넘어 국가의 미래 운명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지난해 출생아는 40만 6300명으로 전년보다 3만 2100명(7.3%)이나 줄었다고 한다. 1970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소치다. 2002년 처음 50만명대가 무너지더니 14년 만에 40만명 선마저 위협받게 생겼다. 출산율은 1년 새 1.24명에서 1.17명으로 추락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평균 1.68명에 한참 못 미친다. 혼인 건수도 전년(30만 2828건)보다 2만건 이상 줄어든 28만 1800건에 그쳤다. 30만건 밑으로 떨어진 것은 2000년 월간 통계 작성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혼인·출생 동반 감소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정부는 2006년 이후 저출산 대책 관련 예산으로 80조원가량을 투입했지만 이 기간 출생아 수는 오히려 42만명이나 줄어들었다. 80조원이면 5000만 국민에게 1인당 160만원씩 돌아가는 돈이다. 그런 막대한 예산을 쓰고도 정부 저출산 대책이 헛바퀴를 돈 것은 정책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거나 근본 대책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 아니겠는가.
이제 와서 출산율과 혼인율이 왜 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그 원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선 10년간 80조원을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평가부터 해야 한다. 객관적인 기관의 주도로 백서를 펴냄으로써 관련 정책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인구정책개선기획단’을 만들 계획이라고 하나 그 정도로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혼인 기피와 출산율 저하는 고용, 주택, 보육·교육 문제가 얽혀 생기는 것인데 그동안 각 관련 부처가 생색내기식으로 대책을 따로 내놓다 보니 효과를 보지 못한 측면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차기 정부 부처 통폐합 과정 때 출산·혼인 전담 부서를 신설할 것을 제안한다. 새 부서가 부처별로 분산된 정책을 하나로 묶어 국정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되 고용부·국토부·교육부·여성가족부 등과 긴밀한 협의 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을 찾기 바란다.
2. 돈 쓸 시간과 여건을 만들어 줘야 내수가 산다
정부가 내수 진작책을 발표했다. 소비가 좀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데 따른 고육지책이다. 그나마 지갑을 채워 주는 소득 확충 방안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아 미봉책이란 지적이다. 고용불안, 가계부채 등 국민이 지갑을 닫을 수밖에 없게 하는 현실을 타개해 줄 근원적인 해법을 찾는 데 정책적인 역량을 모아야 할 것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로 어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내수 활성화 관계장관회의에서 대략 200여개나 되는 내수 활성화 대책이 나왔다. 정부가 사용할 카드는 다 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가 올 초 소비 제고 방안을 내놓은 지 2개월 만에 다시 꺼내 든 정책이다. 그만큼 내수 둔화세가 심상치 않다는 뜻이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국내총생산 성장률 전망치를 2.6%로 전망했지만 소비가 지속적으로 둔화하면서 1분기 성장률이 예상치를 밑돌 가능성이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 대책은 소비심리 회복과 세액 감경 등으로 요약된다. 특히 매월 금요일 하루를 ‘가족과 함께하는 날’로 정하고 2시간 일찍 퇴근토록 하는 유연근무제 도입에 관심이 쏠린다. 가족이 쇼핑, 외식 등을 즐기게 하고 소비도 함께 늘려 보겠다는 것이다. 영세 자영업자에게는 연 2.39%의 금리로 업체당 7000만원까지 빌려주기로 했다.
부자들은 돈을 쓸 수 있게 하고, 소득이 낮은 가계는 생계비를 절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해외 골프 수요를 국내로 돌리기 위해 세 부담을 줄이고 규제도 풀어 주겠다는 방안은 그래서 주목된다.
문제는 의도대로 효과를 거두려면 먼저 소비 심리가 살아나야 하는데 그럴 기미가 별로 없다는 데 있다. 지난달 소비자심리지수(93.3)는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3월 이후 가장 낮은 데다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대내외의 불확실성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탄핵 정국으로 약화된 국가 리더십이 상반기 내내 지속될 가능성이 큰 데다 미국, 중국 등의 보호무역주의 경향마저 우리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
조선업 구조조정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고용불안과 생활물가 상승은 가계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작용해 소비 여력을 높이기란 만만치 않다. 1300조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도 소비 심리를 위축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국내 정치 상황 등을 고려할 때 법 개정 등 관련 절차를 마무리하고 시행하기까지는 하세월이라는 데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대책이 제대로 실행될 수 있도록 행정력을 높여야 한다. 소비 진작에는 타이밍과 심리가 중요하다. 미래가 희망적이어야 소비가 늘고, 경기가 활성화하는 선순환이 가능하다. 일자리 창출과 내수 진작 효과가 큰 서비스 산업을 활성화하고 가계소득을 늘릴 수 있는 적극적인 정책적 뒷받침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3. 정치폭력 그림자 드리운 2017년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재판관 8명이 어제부터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사건 이후 처음으로 경찰의 24시간 근접 신변보호를 받고 있다. 헌재가 경찰에 개별 경호를 요청한 데 따른 조치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일부 극우 진영의 테러 움직임이 있다는 첩보에 따라 자체 경호를 강화했다. 다음 달 초로 예상되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을 앞두고 정치적 선동이 도를 넘어서면서 헌재 재판관과 유력 정치인의 신변 안전까지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서울 종로구 재동의 헌재 주변은 평일에도 수많은 경찰과 버스로 둘러싸여 있다. 정문 앞에선 각기 탄핵 찬성과 반대를 주장하는 피켓 시위가 계속된다. 퇴근 시간이면 탄핵 기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관용차로 나오는 재판관을 향해 태극기를 흔들면서 고함을 치는 바람에 재판관들은 지하에서 차를 타고 정문이 아닌 옆문으로 나간다고 한다. 이번 주말 대규모 시위대가 몰려들고 만약의 사태로 재판관 2명 이상이 사고라도 당하면 현재 8인 체제인 헌재가 6명이 돼 심판 절차가 중지될 수도 있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열린 22일 변론기일에서 박 대통령 대리인단 김평우 변호사는 “헌재가 (공정한 심리를) 안 해주면 시가전이 생기고 아스팔트가 피로 덮일 것”이란 극언을 퍼부었다. “대통령파와 국회파가 갈려 이 재판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내란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 영국 크롬웰 혁명에서 100만 명 이상 죽었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헌재 결정 이후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낳을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라지만, 너무 섬뜩하다. 폭력과 테러를 예고하는 선동을 길거리 시위도 아닌 재판정에서 쏟아놓은 것이다. 오죽하면 김 변호사가 회장을 지낸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이를 비판하는 특별성명까지 냈을까. 대한변협 차원의 징계는 물론이고 법정모욕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우리 국민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성난 민심에 거대한 촛불을 들면서도 질서 있고 평화로운 시위문화로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 과거 무질서가 난무하던 광장에서 폭력의 어두운 그림자를 물리치고 새로운 광장민주주의로 승화시킨 데 대해 세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만에 하나 법치주의를 유린하는 정치폭력이 일어난다면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시킨 세계 10위권 대한민국의 정치문화는 좌우 테러가 횡행하던 해방공간 시절로 추락하는 것이다. 헌재 심판 선고까지 앞으로 20일도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떤 불상사도 없이 승복과 화해의 새 역사를 써 나가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4. 김정남 암살 南에 떠넘긴 北, 천안함 때와 똑같다
북한이 어제 김정남 암살 사건 이후 첫 반응을 내놨다. 예상한 대로 뚜렷해지는 북측 책임에 대해 ‘오리발’을 내놓은 데다 ‘한국 정부의 대본에 따른 음모 책동’이라고 남측에 책임을 떠넘기기까지 했다. 북은 조선법률가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말레이시아에서 외교 여권 소지자인 우리 공화국 공민이 비행기 탑승을 앞두고 갑자기 쇼크 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이송되던 도중 사망한 것은 뜻밖의 불상사”라고 주장했다.
북은 이 담화에서 김정남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공화국 공민의 쇼크사’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명백히 남조선 당국이 이번 사건을 이미 전부터 예견하고 있었으며 그 대본까지 미리 짜 놓고 있었다”고 억지를 부렸다. 한국 정부가 ‘쇼크사’까지 예견하고 각본까지 짰다는 것인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북은 김정남 부검에 대해서도 ‘공화국의 자주권에 대한 노골적 침해이고 인권에 대한 난폭한 유린’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가 자국 공항에서 발생한 의문사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부검을 실시한 것은 주권에 속하며 국제적 관행에도 부합한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22일 2차 발표를 통해 현지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과 고려항공 직원도 이번 사건의 용의자라고 지목했다.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면 관련자들부터 내놓아야 한다. 북은 암살에 사용된 독극물의 성분 파악에 시간이 걸리자 “사건 발생 열흘이 지나도록 말레이 경찰은 어떤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며 영구 미제 사건화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1983년 아웅산 테러와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 때도 북이 ‘허위 날조’라며 부인했지만 결국 그들 소행임이 드러났다. 중국이 이번에도 이 사건에 대해 침묵하며 북을 내심 편들고 있지만 국제사회가 북의 상습적인 거짓말에 농락당할 리 만무하다.
북은 한국 내부에서 “(이번 사건으로) 이득을 보는 세력은 박근혜와 자유한국당 국가정보원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 가고 있다”며 남남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번에 체포된 베트남 여성 용의자가 작년 11월 제주도를 다녀가고 평소 한국인과 교류가 많았던 것을 북이 책임 전가에 악용할 수도 있다.
천안함 폭침 사건 때도 범행을 부정하며 ‘남한 자작극’이라고 강변한 북에 동조했던 일부 세력이 이번에도 준동할까 봐 걱정이다. 탄핵 심판으로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된 이때, 북의 남남 갈등 술책에까지 휘둘려선 안 된다. 안에서는 다툴지언정 밖으로는 미국의 테러지원국 재지정 등을 통해 국제사회가 북을 엄중히 단죄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이데일리]
5. 전경련, 임원들 ‘퇴직금 잔치’ 벌이는가
오늘 전경련 정기총회를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이승철 상근부회장의 퇴직금이 20억원 규모에 이를 것이라는 소식이다. 기획본부장을 시작으로 지금껏 18년 동안 임원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퇴직금 규모가 이처럼 늘어났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전경련 내규상 상근부회장은 해마다 월평균 임금의 3.5배를 퇴직금으로 받도록 돼있다는 점에서도 그의 퇴직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직장 풍토에서 평소 열심히 근무한 데 대한 보상의 의미와 함께 노후생활을 보장한다는 의미까지 지닌 것이 바로 퇴직금 제도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경우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대기업 강제모금을 주도함으로써 ‘최순실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했고 결과적으로 전경련 조직을 해체 직전까지 몰고 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퇴직금이란 게 액수의 많고 적고를 떠나 전적으로 개인 프라이버시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 부회장이 그동안 전경련의 발전을 위해 공헌한 측면이 적지 않으리라는 점도 충분히 인정한다. 20년 가까이 임원을 지냈다는 사실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지금 상황에서 그에게 막대한 퇴직금을 지급하는 게 옳으냐 하는 논란이 제기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더욱이 현재 전경련이 자칫 간판을 내릴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에 몰려 있으며, 그것이 이 부회장의 불찰로 야기됐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삼성과 LG, SK, 현대차 등 4대그룹이 전경련 탈퇴를 공식화하면서 다른 기업들의 이탈 움직임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 부회장이 청와대의 압력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다. 그가 이런 사태에 책임지지는 못할망정 두둑한 퇴직금 봉투까지 챙기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논란이 제기되는 이유다.
또 다른 문제는 이렇게 과도한 퇴직금 산정이 가능하도록 이 부회장 자신이 미리 내부 규정을 바꿨을 것이라는 의혹이다. 전경련이 회원사들의 회비로 운영되면서도 임원들끼리 퇴직금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면 ‘도적적 해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전경련이 전열을 가다듬고 회생 노력을 보이고 있지만 이런 식이라면 국민적 동의를 받기도 어렵다. 이에 대한 전경련의 명쾌한 해명을 듣고자 한다.
6. 탄핵심판 다가올수록 후폭풍 걱정된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절차가 마무리 국면에 돌입했다. 헌법재판소는 그제 증인 신문을 모두 끝내면서 당초 오늘로 잡았던 최종 변론기일을 27일로 늦췄다. 내달 초로 연기해 달라는 대통령 대리인단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되 늦어도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의 임기가 끝나는 내달 13일까지는 결판을 내려는 취지로 읽힌다. 업무일로 따지면 겨우 하루 늦춘 데 불과하지만 재판부로서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제는 헌법재판관 전원의 의견을 집약하는 평의를 거쳐 결정문을 작성하는 일만 남겨놓고 있다. 박 대통령의 최종변론 출석 여부가 변수로 남아 있긴 하지만 헌재가 결정문의 기초가 되는 사실관계와 법리, 증언 등의 정리에 이미 착수한 만큼 다소 빡빡하더라도 가능한 일정이라 여겨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 때도 최종 변론기일에서 판결까지 2주일 걸렸다.
그러나 재판이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면서 재판부와 대통령 대리인단 사이에 험한 말과 고성이 오가고 주심 기피신청 사태까지 빚어진 것은 유감이다. 특히 그제 재판에서는 대통령 대리인인 김평우 변호사가 국회를 ‘야쿠자’로 몰아붙이고 뜬금없이 ‘약한 여자’ 운운하며 법리 논쟁에서 벗어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주심인 강일원 재판관도 기피신청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재판관으로서 꼬투리 잡힐 언행은 절대 금물이다.
문제는 여야 정치권의 분위기가 헌재 결정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내려지지 않을 경우 거세게 저항할 것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이다.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심지어 헌재 재판에서 “탄핵심판을 국민이 결정하도록 맡기면 양측이 전면 충돌해 서울 아스팔트길 전부 피와 눈물로 덮일 것”이라는 변론이 등장할 정도가 됐다. 헌재 결정에 따라 민란이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대선 주자들의 선동적 발언부터가 문제다.
헌재가 오로지 헌법 정신에 근거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확실한 증거와 명쾌한 법리로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게 헌재의 책무다. 후폭풍을 막고 헌정질서를 유지하려면 국회가 헌재 결정에 대한 무조건 승복을 결의하고 모든 정당과 대선주자가 여기에 동의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박 대통령도 나중에 뒷말하지 말고 최후 변론에 나와 할 말을 하는 당당한 자세가 바람직하다.
[매일신문]
7. 서문 야시장 내달 3일 재개장, 차질 없게 잘 준비하라
서문시장 야시장이 다음 달 3일 재개장한다. 대구 중구청은 내달 1일부터 서문시장 4지구 주변 야시장의 도로점용을 허가한다고 23일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말 서문시장 4지구에 큰불이 나면서 야시장 문을 닫은 지 꼭 석 달 만이다. 이번 화재로 크게 훼손된 4지구 건물이 붕괴 우려가 높은데다 또 철거 작업 시 진`출입로 확보 등의 문제로 야시장 개장을 미뤄오다 이날 재개장 일정을 확정한 것이다.
그동안 야시장 재개장을 놓고 이르면 2월 중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관할 중구청이 “아직 검토할 것이 많다”는 이유로 계속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야시장 개장 일정이 불투명했다. 재개장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100여 야시장 상인들의 불만도 덩달아 높아졌다. 석 달째 생업에 손을 놓으면서 당장 생계가 곤란해지는 등 어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고 직후 화재 원인을 둘러싸고 야시장에 대한 4지구 점포 상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애꿎은 야시장 상인들의 속앓이만 깊어지고 재개장의 목소리를 내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섣불리 재개장을 요구했다간 자칫 상인 간 반목과 대립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오해도 풀리고 서로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함께 뜻을 모아 다시 개장하게 된 것이다.
어떻든 상인들이 한마음이 되고 재개장에 합의한 것은 잘된 일이다. 야시장 재개장 여부는 100여 야시장 상인들의 생계뿐만 아니라 화재 이후 계속 침체되어온 서문시장 활성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다만 중구청이 안전과 절차를 이유로 ‘눈치 행정’을 펴온 것은 분명히 잘못됐다. 관할 구청으로서 행정 리더십을 발휘해 면밀히 재개장을 검토하고 일정을 좀 더 앞당겼더라면 불필요한 오해나 상인들의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중구청이 앞장서서 야시장 운영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면밀히 뒷받침하고 마음가짐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상인들도 화재 등 안전에 보다 신경을 쓰고 불편한 환경도 감내해야 한다. 그래야 서문시장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시민이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8. 주민 등 떠미는 염색산단 악취, 근본 대책 세울 때다
대구염색산업단지의 악취 등 공해로 인근 주민들이 뭇 질병을 호소하고 심지어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행정 당국이 내놓은 대책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미봉책에 그치는 등 만족할 만한 결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염색단지의 유해물질이 다른 곳보다 많고 암 같은 중병(重病)을 호소하는 주민도 있다. 주민들로서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다.
문제는 염색산단 주변에서 이 같은 고통을 가장 많이 호소하는 대구 서구 비산7동 등의 피해 주민만 무려 1만 가구, 2만여 명에 이른다는 점이다. 이곳 주민들은 지난 1980년 염색산단 조성 이후 지속적으로 공해에 시달린 삶을 이어왔다. 염색산단에서 매일 뿜어내는 유해공기를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특히 가을과 겨울철 바람을 타고 주택가로 몰려드는 염색산단의 나쁜 공기는 피할 수조차 없어 주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주민 고통은 국립환경과학원의 2014년 조사에서도 증명됐다. 조사 결과, 염색산단과 서대구산업단지, 대구3공단 등 산단 주변 주민들의 만성 기관지염 발병률이 대구시 평균보다 높게 나타났다. 남성은 27%, 여성은 13% 높다. 급성 기관지염은 남성이 7%, 여성이 20% 높다. 염색산단 유해 화학물질 배출량도 많아 2010년 조사에서 톨루엔은 3공단의 5배, 클로로폼은 7배나 됐다. 모두 호흡기와 심장, 신장 등에 해로운 물질이다. 염색산단 인근 주민의 호흡기 질환과 건강 이상에 대한 호소가 마땅한 까닭이다.
행정`환경 당국이 할 일은 분명하다. 먼저 지난해 12월 구축해 가동 중인 악취 감시 시스템이 과연 제대로 가동되는지 점검하는 일이다. 기준을 넘는 유해물질 배출 여부에 대한 감시 감독 강화와 위반 업소에 대한 엄격한 조치도 필요하다. 아울러 업체들이 악취와 공해 배출을 낮출 수 있는 기술 개발과 투자에 나서도록 설득해야 한다. 서둘 일은 각종 질병과 고통을 심하게 호소하는 주민들에 대한 행정 서비스 제공이다. 즉 필요할 경우 역학조사를 통한 고통 원인 규명과 함께 해법의 도출이다. 떠나지도 못하고 남은 주민부터 살려야 할 일이다.
[중앙일보]
9. 이정미 재판관 후임 지명, 빠를수록 좋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후임자를 다음주 지명키로 한 것은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 선고의 불확실성이 해소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간 양 대법원장이 선뜻 후임자 인선에 나서지 않았던 명분은 “탄핵 선고 지연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우려”(고영한 법원행정처장 국회 답변)였다. 하지만 그제 헌재가 최종변론기일을 오는 27일로 확정하자 결정 선고가 임박했다고 보고 후임자 지명에 나선 것이다. 다소 늦었지만 옳은 결정이다.
사실 다음달 13일에 퇴임하는 이 재판관의 후임 인선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는 지난 1월 말 박한철 헌재 소장 퇴임 직후부터 국회 소추위원단과 대통령 대리인단 측에서 동시에 나왔다. 물론 속내는 달랐다. 국회 측은 재판관 공백의 장기화에 따른 헌재 사건 심리 부실을 걱정한 반면 대통령 측은 짧은 심리로 인한 재판의 공정성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양 대법원장은 굳이 서둘러서 지명하다 보면 그게 헌재에는 이 재판관 임기 이후로 탄핵 선고를 미뤄도 된다는 무언의 압력이 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숙고하는 양 대법원장을 두고 최고 사법기관의 수장이 법대로 안 하고 좌고우면한다는 비난도 나왔다.
이번 대법원의 결정은 ‘법치주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옳다.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차대한 사안은 헌법 111조에 따라 9인 재판관의 완전체가 결정해야 정당성이 확보되는 게 맞다. 다만 현실적으로 대통령 몫인 헌재 소장 후임자 임명은 박 대통령이 직무정지 상태라 어렵다. 대법원장 지명 몫인 이 재판관 후임자를 임명해 재판관 공백 상태를 최소화하는 게 차선이다. 7인 체제에선 헌재 결정의 권위와 정당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지난해 국회의 탄핵안 가결 이후 다른 사건 심리는 전면 보류 중이다.
양 대법원장이 후임자를 지명하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신속히 임명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인사 청문회 과정에서도 국가적 위기 탈출이라는 대국적 견지에서 신속하고 효율적인 검증의 모범을 보여주길 바란다.
[세계일보]
10. 가시화한 한·미 FTA 재협상, 정부 대책은 뭔가
숀 스파이서 미국 백악관 대변인이 그제 “미국이 체결한 모든 자유무역협정(FTA)을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무역전쟁의 포성이 드디어 울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 관계자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며 일축했다. 통상협상을 책임진 산업통상자원부 당국자는 “상황을 봐가며 미 동향에 촉각을 세우고 조용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안일한 현실 인식이 아닐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유세 때 FTA에 대해 “총체적 재앙”이라고 소리쳤다. 당시에는 대미 흑자국 1∼4위인 중국 일본 독일 멕시코만 해당되고 대미 무역흑자 7위인 우리는 재협상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란 기대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은 앞으로 모든 FTA가 논의 테이블에 오를 것임을 공식화했다.
스파이서 대변인은 “일부 협정은 10∼20년이나 됐다”며 불평했다. 2007년 타결된 한·미 FTA는 이제 10년이 흘렀다. 당시 우리의 협상 전략이 먹혀들어 한국에 비교적 유리하게 타결됐다. 이 때문에 미국 재계에서는 여러 차례 의회에 불만을 제기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재협상을 요구해왔다.
산업부가 다급함을 못 느끼는 이유는 따로 있다. 10여년 전 한·미 FTA를 이끈 곳은 외교통상부의 통상교섭본부였다. 박근혜정부가 들어서면서 통상교섭 업무는 산업부로 이관됐고, 장관급인 본부장은 차관보급으로 낮아졌다. 당시 협상을 담당한 외교관들은 산업부로 가지 않았다. 협상 주역인 외교관들은 은퇴했거나 해외로 나갔다.
산업부에는 한·미 FTA 협상과 관련해 깊숙이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거의 없다. 한·미 FTA 재협상이 시작될 경우 무엇을 양보하고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파악조차 안 돼 있다는 뜻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미국 통상정책의 이면을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과 정보가 없다는 점이다.
지금의 안일한 대응 자세가 지속된다면 미국의 협상 전략에 질질 끌려가다 엄청난 손실을 보는 국가적 재앙을 맞을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반이민법처럼 무리한 협상안을 꺼내들고 우리를 압박할 수 있다. 국회라도 나서야 한다. 산업통상위와 외교위를 동시 소집해 정부에 위기감을 불어넣고 두 부처가 공동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 가시화한 무역전쟁 앞에선 정부와 정치권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주요신문칼럼
1. [매일신문][기고] One Table One Flower(실천으로 생활 속에 꽃 소비를!)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지 150일이 되어간다. 청렴하고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이 법을 시행했다. 이 법은 장점이 많지만, 농축산 부문에서는 피해가 큰 것도 사실이다. 소고기 등 축산물은 올해 설 대목에는 지난해에 비해 24.5%, 인삼과 버섯 등 특산품은 23% 감소했다. 과일도 20.2% 매출이 줄었다고 한다. 업체 체감 감소율은 30%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화훼류 가운데 승진 등 축하 선물용으로 애용하는 난류 타격이 큰 상황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관계자는 “청탁금지법으로 인사철, 각종 행사 때 선물용으로 나가는 난은 가격도 큰 폭으로 감소하고 물량도 대폭 줄어 난 재배 농가가 큰 손해를 입고 있다”고 한다. 물량 자체가 줄어들다 보니 화훼류 경매 횟수도 주 1회로 줄었다고 한다.
화원협회에서 1천200개 업체를 조사한 결과 꽃다발, 화환, 난류, 관엽류 등 분화류 거래 금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35.8%까지 급락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예측에 따르면 난류 재배는 청탁금지법 영향으로 40% 이상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국내 경기 침체, 청탁금지법 등 각종 악재에 따른 소비 감소로 생산자의 두려움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생산 농가나 화초를 연구하는 기관에서는 생산비를 절감하고 우수 꽃 종자를 개발하는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또한 10만원짜리 3단 화환부터 5만원 이하 2단 경조사 화환 유통 등 유통 단위를 줄여서 법의 저촉을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통을 잘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화훼 소비가 늘지 않고 있다.
투명하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하자면 현재로서는 청탁금지법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이 제도로 관련 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으니 이 또한 무시할 일이 아니다. 자칫 산업에 피해가 심각해지면 ‘청탁금지법’의 선의가 왜곡될 수 있고, 과거로 회귀하자는 목소리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화훼 분야 불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는가? 농식품부는 ‘꽃 소비를 생활화하자’는 사무실 꽃 생활화(one table one flower)운동을 제안하고, 지난 7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와 ‘국회 꽃 생활화 운동’ 출범식을 가졌다. 국회의원들이 앞장서서 힘든 우리나라 화훼산업을 살리겠다는 각오가 인상 깊다. 경북에서는 칠곡군이 주도해 사무실 책상마다 꽃을 놓아 근무 분위기를 바꾸고 지친 심신을 힐링하자는 일상생활 속 꽃 소비를 실천하고 있다.
최근 농협중앙회 대구본부는 꽃 소비 확대를 위해 직원들이 화분을 직접 구매해 우리 꽃을 생활 속으로 파고들 수 있도록 운동을 전개한다고 밝혔다.
나라가 혼미하고 경기가 침체해 내수가 불안하다. 또한 현대는 매우 복잡 다양해 심신이 피로해지기 십상이다. 이럴 때 우리는 꽃을 곁에 두고 생활하는 우리 꽃 소비운동, ‘one table one flower’를 추천하고 싶다. 한 달에 약정해 적은 돈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 사무실로 꽃을 배달오게 함으로써 항상 싱싱한 꽃을 곁에 둘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앞서 언급한 몇 곳에서만 하는 것은 효과가 극히 적다. 서울, 대구, 부산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시`군과 읍`면 관공서나 사무실에서 광범위하게 실천했을 때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우리 꽃 소비운동을 이제는 폭넓게 실천할 때다. 화훼산업도 살리고 심신도 힐링하는 일거양득을 거두어 보자.
2. [매일신문][매일춘추] 십 대가 궁금하다
세월호 학생들과 깔창 생리대 청소년. 이들은 지금 한국 10대를 상징한다. 우리의 아픈 손가락들이며 허망한 사회구조와 시스템의 치명적 피해자들이다. 덫은 ‘누군가’ 발목 걸려 넘어지지 않는 이상 거기 있다는 것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이미 확정되었다는 것. 여러 측면에서 사회적 약자라는 점이다. 어른 세대를 믿고 기다렸을 10대들.
10대라고 할 때 연상될 다른 아이콘이 생겼다. 한 국회의원 아들 이야기다. 성매매를 암시하는 글을 쓴 까닭이 갈등과 치기 때문이었다고 해명하면서 일단락된 듯하다. 나는 이 상황에서 10대 성문화가 궁금해졌다. 동년배의 아들을 두었기에 혼란스럽고 마음이 급하다. 이 청소년이 10대 성의식을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여러 변수가 작용했을 테지만 다 알 수도 없다. 다만, 그의 성매매 제안을 보면서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다.
침소봉대하여 개인의 파문을 통해 사회 현상을 들여다봐야겠다. 다른 영역의 욕망과 불만이 성(性)의 얼굴로 위장하기도 한다. 이 일을 계기로 10대 성문화 혹은 (성)의식이 어디까지 왔는지, 이들에게 어떤 성교육을 해야 하는지 확인할 필요성에 대해 깊은 공감대가 있으면 싶다. 기존 세대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10대를 보내고 있을 청소년들.
20년 전만 해도 성교육은 성폭력 예방 차원이었다.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래서 피해 심각성을 알리고 치유책을 찾는 동시에 성폭력 범죄를 예방하자는 문제의식이 절박한 시절이었다. 성폭력은 줄지 않았고 남성다움/여성다움의 고정관념은 비대하다. 게다가 여성 혐오의 송곳은 더 거칠어졌다. 놀랍게 달라지기도 했다. 작은 목소리이긴 하지만 성 소수자의 권리를 말한다. 인권의 문제다.
한편, 성을 소비하는 방식은 나날이 고도화하고 생활로 침투해 발랄해지고 탈신비화되면서 거리낌이 없어졌다. 10대가 툭 던질 만큼 성매매가, 아니 성매매의 인용이 일상화되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나 관계에 대한 책임과 의미는 달라졌다. 10대와의 대화가 단절되어서일까. 대안으로 제시한 성교육 핵심은 금욕으로 회귀했다. 시대착오적이니 꼰대 소리나 듣는다.
10대에게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들은 또래가 감당해야 했던 희생을 목격하면서 이미 기존 세대에게 실망하고 분노한다. 기존 세대에게 익숙한 틀이 이들에게 맞을 리도 없다. 그러니 더욱 10대와 소통해야 한다. 이들이 자기 속내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10대를 이해해야 한다.
3. [한겨레][조한욱의 서양 사람] 사랑과 냉담
조지아 오키프는 꽃을 확대해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과 뉴멕시코의 풍경화로 잘 알려진 화가로서 ‘미국 모더니즘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화가를 꿈꿨지만 전문적 교육을 받을수록 정해진 틀을 모방만 해야 하는 토양 속에서는 그림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그 꿈을 포기하기도 했었다.
4년 동안 붓을 잡지 않다가 다시 화폭 앞에 선 그에게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목탄화 몇 점을 지인에게 보냈는데 그가 그 작품들을 명성이 높은 사진작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에게 보낸 것이었다. 스티글리츠는 화랑 ‘291’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사진 작품을 전시하면서 사진을 다른 예술에 버금가는 분야로 정착시켰고, 또한 당시로서 가장 전위적인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을 미국에 첫선을 보이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마티스, 로댕, 세잔, 피카소 등의 작품이 이곳을 통해 미국에 소개되었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작품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훌륭하다고 극찬하면서 10점을 ‘291’에서 전시했다. 이렇게 그 둘은 만나게 되었고 사랑에 빠졌다. 남부에 살던 오키프가 뉴욕을 방문하면 곧 둘은 하나가 되었다. 2층까지 올라가는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고 사랑을 나눴다. 스티글리츠는 누드를 포함한 많은 사진 속에 오키프를 담았고, 그것을 전시해 스캔들이 일기도 했다. 스티글리츠가 23살 연상의 유부남인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침내 이혼이 성사되자 4개월 만에 그들은 결혼했다.
흔히 쉽게 끓어오르는 사랑이 쉽게 식듯, 그렇게 결혼했지만 결혼 후 그들은 각기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오키프는 뉴멕시코에서 그림을 그렸고, 스티글리츠는 뉴욕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선 모든 일이 한마디 말도 없이 거래처럼 이루어져 서로 맞서기보다는 회피하기를 택했다. 오키프는 훗날 “사진 속의 인물은 내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참으로 많은 삶을 살았던 것 같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4. [경향신문][이기호의 미니픽션] 이사
침대에 까는 얇은 요를 바닥에 펼쳤다. 요는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웠다. 진만은 그 요 한가운데 차곡차곡 개킨 티셔츠와 바지 몇 벌, 양말 몇 켤레, 수건 네 장과 담요 한 장, 대학 1학년 때 엠티 가서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러곤 다시 요의 네 귀퉁이를 가운데로 모아 신발 끈처럼 단단하게 묶었다. 커다란 북극곰 엉덩이만 한 보따리 하나가 완성되었다. 이로써 이삿짐은 얼추 다 싼 셈이었다. 진만은 그 보따리를 다시 어깨에 동여매고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진만을 보면서 정용이 툭 한 마디 던졌다.
누가 널 보면…, 전쟁 난 줄 알겠다….
대학 졸업식은 2월23일이었지만, 정용과 진만은 이틀 전 서둘러 기숙사 짐을 빼기로 했다. 어차피 졸업식엔 참석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편이 더 나아 보였다. 진만과 정용은 졸업 후에도 같은 방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서로 전에 없던 뜨거운 우정이 생겼거나, 함께 공동 창업 같은 것을 모색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월세 부담 때문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들은 대번에 채무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냥 조용히 대학만 다녔을 뿐인데도 정용이 800만원, 진만이 1200만원 빚이 생겼다. 아니, 우리가 무슨 경마장을 다닌 것도 아니고…. 진만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뇌까린 적이 있었다. 이건 4년 내내 경마장을 냅다 달리다가 은퇴한 ‘3번 마’한테 이런, 미안하지만 자네 빚이 좀 생겼네, 말하는 거나 똑같은 거잖아. ‘3번 마’에게는 건초라도 공짜로 주기나 했지, 나는 누가 등 한 번 두들겨준 적 없는데….
진만과 정용은 다행히 광역시 외곽에 있는 보증금 없는 월세 30만원짜리 방을 하나 구했다. 원래 모텔을 하다가 폐업한 건물인데, 마침 그곳 반지하방이 벼룩시장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냉큼 계약한 것이었다. 당분간 그곳에서 살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얼마간 학자금 대출금을 갚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정용과 진만은 그렇게 계산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것이 급하니까. 제아무리 경마장에서 여러 차례 우승한 ‘3번 마’라 할지라도 빚이 있으면 아르바이트를 해야지 어쩔 것인가? 관광지에서 마차라도 끌어야지.
정용도 제 몫의 이삿짐을 들고 일어섰다. 정용은 그나마 낡고 오래된 캐리어가 있어서 한결 짐 싸기가 수월했지만 문제는 컴퓨터였다. 본체와 모니터를 들고 캐리어까지 끌자니 손이 모자랐다. 정용은 진만에게 모니터라도 부탁할까 싶어 힐끔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그는 이미 두 손에 다른 것을 들고 서 있었다.
오쿠 중탕기.
진만의 손엔 그것이 들려 있었다. 본체는 빨갛고, 냄비는 스테인리스 재질로 되어 있는, 전기밥솥보다 조금 큰 오쿠 중탕기. 진만은 그것을 이 년 전 중고나라 사이트에서 10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맥반석 달걀도 해 먹고, 우유를 넣어 요구르트도 해 먹겠다는 생각으로 구입한 오쿠 중탕기. 실제로 정용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올 때마다 빨갛게 타이머가 켜진 오쿠 중탕기에서 진만 몰래 맥반석 달걀을 빼 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기숙사 방이 아닌, 어디 찜질방이라도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아르바이트해서 컴퓨터를 사거나 핸드폰을 바꾸는데, 진만은 오쿠 중탕기를 샀다. 컴퓨터 사용하듯 오쿠 중탕기의 전원을 켰다.
그거 갖고 가려고?
정용이 진만에게 물었다.
그럼. 갖고 가야지. 내 재산 목록 1호인데.
정용은 할 수 없이 우체국에서 커다란 박스를 구입해 그곳에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를 담았다. 두 손으로 박스를 들고 일어섰더니 저절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래도 가야지, 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자취방까지 가기 위해선 시외버스를 타고 광역시까지 나간 후,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그들은 광역시 인근 한 중학교 버스정류장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겨울의 끝자락, 마지막일지도 모를 한파가 버스정류장 간판 아래 매달려 있었다. 정용은 컴퓨터가 든 박스를 무릎 앞에 내려놓은 채 한껏 몸을 옹송그렸다.
진만은 오쿠 중탕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두 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넣고 연신 비벼댔다. 그게 더 춥다며, 등에 동여맨 이불 보따리는 풀지 않았다.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정류장에는 그들과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 한 분만이 서 있었다.
이거 좀 먹지 않을래?
진만이 오쿠 중탕기의 뚜껑을 열면서 정용에게 말했다. 중탕기 안 게르마늄 용기에는 갈색으로 변한 달걀 8개가 수줍은 얼굴로 누워 있었다.
내가 어제 마지막으로 삶은 달걀인데, 아직 따뜻해.
진만은 슬쩍 웃으면서 달걀 하나를 정용에게 내밀었다.
정용은 처음엔 그것을 먹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한적한 정류장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낡은 캐리어와 커다란 박스, 커다란 이불 보따리를 등에 멘 채 달걀을 먹는다는 게 좀….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웠다. 이제 앞으로 이거보다 더 창피할 일을 많이 당할 텐데…. 정용은 진만을 따라 달걀 껍데기를 깠다. 진만의 말처럼 달걀엔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둘이 앉아서 달걀을 여섯 개쯤 까먹었을 때, 정류장 한편에서 힐끔힐끔 그들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우뚝,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정용과 진만은 달걀을 한 손에 든 채 할머니의 눈치를 봤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주섬주섬 외투에서 5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그러곤 휙 진만의 무릎 위에 놓인 오쿠 중탕기 스테인리스 냄비 안으로 던져넣었다.
집에들 들어가, 어여.
할머니는 그렇게 말한 후 천천히 택시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진만과 정용은 오쿠 중탕기 냄비 속에 살포시 놓인 오천 원짜리 지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또 다른 날의 시작이었다.
5. [한국일보][기억할 오늘] 클라라 프레이저
클라라 프레이저(Clara Fraser, 1923~1998)는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로, 워싱턴주 시애틀을 중심으로 1960~80년대 급진주의 여성운동을 이끈 페미니스트이자 정당인이고, 조직활동가였다. 그는 초콜릿과 담배와 추리소설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좋아한 것은 여성들의 일자리를 구해주고, 보다 나은 일자리를 얻게 하고, 그들이 직장에서 차별 받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그는 러시아 이민자로 여성복노조 활동가였던 어머니와 라트비아 출신 아나키스트 트럭기사의 딸로 미국 LA에서 태어났다. 44년 UCLA를 졸업하고 극작 일을 하던 그는 트로츠키의 사회주의자노동자당(SWP)에 가입해 조직가로 활동했고, 23살이던 46년 시애틀 지부 창립 임무를 맡아 워싱턴주로 이주했다.
프레이저는 청년 시절부터 식당 웨이트리스, 상점 판매원, 버스 세차원, 전기공, 택시 기사, 식자공, 비서 등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일부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한 거였고 일부는 노동자 조직을 만들기 위해 가담한,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위장취업’이었다.
프레이저는 중앙당과의 노선 갈등으로 65년SWP 시애틀 지부를 해산하고 자유사회주의자당(FSP)을 설립했고, 67년 저 유명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그룹 ‘Radical Women’을 결성했다. 그는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 권익과 흑인ㆍ성소수자 인권에 힘을 쏟았다. 74년 시애틀 전기회사(SCL) 파업을 주동한 그는 이듬해 “경비 절감을 위한 경영상의 판단에 따라” 해고됐지만, 성ㆍ이념 차별이라며 소송을 걸어 7년 만에 승리했다.
그와 같은 일들을 그와 그의 RW는 수많은 여성들을 위해 해냈다. 정치적 동지이자 남편인 리처드 프레이저(1913~1988)와 이혼한 뒤에는 워싱턴주 이혼 개정법안 개정운동을 벌였고, 주 최초의 낙태권 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1988년 시애틀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청년 활동가들에게 이상을 포기하지 않을 책임을 일깨우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며 “자기 문제에만 빠져 사는 삶은 사회적 재앙”이라고 말했다. ‘낙담하지 말고, 조직하라(Don’t mourn. Organize)’는 건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시애틀 RW의 조직가 앤 슬레이트(Anne Slater)의 말처럼 “쉼 없이 밀고 가야 한다”는 교훈을 유산처럼 남긴 클라라 프레이저가 1998년 2월 24일 폐기종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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