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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올리는 자료로 상업적 목적은 없으며 선정된 사설의 정치적 성향은 블로그 운영성향과 무관합니다.



주요신문사설



[국민일보]

1.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유죄 기조 유지돼야

종교적 신념에 따른 이른바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논란이 최근 확산되는 추세다. 지난 5월 15일에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주최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 처벌 중단 및 대체복무제 도입 촉구 집회까지 열렸다. 이들은 이날을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이라고 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1, 2심 법원의 유·무죄 판단도 근래 엇갈리고 있다. 2004년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첫 무죄 판결 이후 하급심의 무죄 판결은 30건에 이른다. 이 중 올해만 13건이다. 지난해 10월에는 항소심에서 첫 무죄 판결까지 나왔다. 하지만 하급심의 변화 조짐에도 대법원의 판단은 일관적이다. 유죄 판결로 하급심에 쐐기를 박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 2부는 훈련소 입소통지서를 받고도 소집에 응하지 않은 혐의(병역법 위반)로 기소된 신모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25일 밝혔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신씨는 2015년 12월 소집일로부터 사흘이 지날 때까지 훈련소에 입소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그동안 이 종파 신도들은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병역 의무를 거부해 왔다. 신씨도 같은 이유를 들었다.

1심 법원은 신씨의 병역 거부 행위가 양심의 자유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달랐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의 자유가 병역 의무 이행보다 우월한 가치라고 보기 어렵다며 그에게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법정 구속은 대법원 선고 이후로 미뤘다. 대법원의 판단도 2심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병역 거부자를 형사 처벌하지 말라는 유엔(UN) 자유권규약위원회의 권고안은 법률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유엔 인권이사회 등의 대체복무제 도입 권고에 대한 법률적 판단을 확고히 한 셈이다. 병역 거부자 및 지지 단체들은 유엔의 이런 주장을 내세워 무죄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대법원은 2004년 7월 전원합의체 첫 유죄 판결 이후 양심적 병역 거부를 허용하지 않는 판례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헌법재판소도 2004년과 2011년 두 차례 관련 법규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병역 거부자의 양심의 자유가 병역 의무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국가 안위보다 더 중요한 자유는 없다고 본 것이다.



대체복무제 등 사회적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지만 남북이 대치하는 우리 상황 등을 감안하면 시기상조다. 국방의 의무를 묵묵히 다하고 있는 대다수 젊은이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10명 중 6∼7명꼴로 양심적 병역 거부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법원의 판례와 세 번째 위헌법률 심판을 앞둔 헌재의 결정이 기존대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한국일보]

2. 평창동계올림픽 단일팀 제안, 남북교류 확대로 이어지길

문재인 대통령이 24일 전북 무주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내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 남북한이 사실상 단일팀을 구성해 참가하자고 제안했다. 북한이 제안에 응한다면 남북한이 경색 관계에서 벗어나 대화를 통한 화해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체육이 정치ㆍ외교ㆍ안보 등 다른 분야에 비해 교류가 용이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단일팀을 구성한 경험이 있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했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한반도기를 앞세워 개회식에 공동 입장했다. 그런 전례를 보면 단일팀 구성이 아주 어렵거나 낯선 것은 아니다. 의지만 있다면 성사 가능성이 높다.

문 대통령이 단일팀 구성을 제안한 개막식에는 장웅 북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과 리용선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 등 북측의 비중 있는 인사가 참석했다. 북한의 태권도 시범단 또한 방한해 사상 처음으로 시범을 보였다고 하니 그 자체로 의미가 큰 행사였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에도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태권도선수권대회는 대통령 취임 후 처음 참석한 체육 행사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이번 제안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

다만 북한이 핵ㆍ미사일 실험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은 것은 불안 요소다. 게다가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 북한에 억류됐다 풀려난 뒤 숨지면서 미국의 태도는 강경해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조만간 한미정상회담이 열린다. 단일팀 구성을 제안한 이유를 미국에 충분히 설명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자 아이스하키 등 어려운 조건에서도 평창만 바라보며 땀 흘린 선수들이 단일팀 구성으로 대회 참가의 꿈을 접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단일팀 구성이라는 명분과 올림픽 참가라는 개인의 꿈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도 고민해야 할 문제다.

북한과는 한편으로는 긴장하고 대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를 모색해야 하는 모순적 관계에 있다. 남북이 최근 수년 동안 긴장과 갈등이 크게 고조됐던 만큼 이제 대화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올해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지 10년이 되고, 추석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되는 등 남북 관계에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문 대통령의 평창동계올림픽 남북 단일팀 제안을 계기로 다른 분야에서도 남북간 교류가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세계일보]

3. ‘반미·반사드’ 처방전 없는 안보 담론은 공허하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어제 제67주년 6·25전쟁 기념식에서 “1953년 7월 27일 포성이 멈췄지만 6·25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 때문에 지난 67년간 하루도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살얼음판 같은 한반도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북한은 2005년 핵무기 보유 선언 뒤 지금까지 핵실험을 5차례나 했다.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에 이르기까지 각종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하고 미국을 사정권에 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만을 남겨 놓고 있다.

국제사회가 북한의 도발을 저지하기 위해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북한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새 정부 들어서도 벌써 여섯 번이나 미사일 도발을 감행한 북한이다. 한국이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일어섰지만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엄중한 안보 현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자칫 한걸음이라도 잘못 내딛었다가는 그동안 일궈 놓은 번영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그럴수록 대북 경각심을 높이고 안보의식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거꾸로다. 북한 산속 깊은 곳의 콘크리트 지하갱도에서 핵폭발이 일어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지독한 안보불감증에 걸려 있고 안보를 짓밟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철회와 미국의 사드 배치 강요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가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에서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주한 미국대사관 주변을 인간띠 형태로 포위하기도 했다. 사드가 배치된 경북 성주에서는 주민과 진보단체 회원들이 도로를 막고 군용 유류 차량을 검문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여의도 정치권에서조차 문재인 대통령의 ‘사드 발사대 1기 올해 배치, 5기 내년 배치’ 발언, ‘핵 동결·핵 폐기’의 2단계 북핵 해법 구상을 둘러싸고 입씨름이 벌어졌다. 국가 안보를 놓고도 두 쪽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어제 경기도 의정부시 한미연합사단·미2사단을 방문해 장병 격려사에서 “우리의 철통같은, 그리고 바위처럼 굳건한 한·미동맹과 연합방위 태세를 통해 우리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편에선 사드를 반대하고 미국을 비난하면서 한·미동맹에 틈을 만들고 안보 방파제에 구멍을 뚫으려 애를 쓰고 있다. 이러니 ‘우리 안보 최대의 적은 북한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닌가.



[매일경제]

4. 한미 정상회담 앞둔 美대사관 포위 시위, 외교적 손실 우려된다

주말인 지난 24일 서울광장 주변 도심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국 배치 반대를 주장하는 수천 명의 시민이 집회를 가진 뒤 미국대사관을 사방으로 에워싸는 행진을 벌였다. 시위대는 법원에서 허용한 조건을 지켰고 별다른 불상사 없이 마무리했다. 경찰도 경비 수위를 평소보다 높였지만 차벽이나 별도의 폴리스라인은 설치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상 중요시설에 해당하는 미국대사관 반경 100m 안에서 집회와 행진을 금지했는데 이번에는 법원이 같은 법 11조에서의 외교기관 업무가 없는 휴일 등 예외적인 경우라며 1회 20분 이내에 한해 하도록 허용하면서 새 정부 출범 이후의 변화를 또 한번 확인시켰다.

참가한 시민들은 사드 배치 지역인 경북 성주 지역 주민의 생존권을 위협하지 말고 결정을 철회하라거나 사드 한국 배치가 오히려 평화를 깬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정치적 공세에 맞서는 듯 서울광장 맞은편 대한문 앞에서는 사드 배치를 지지하는 보수단체와 지지자들이 사드로 나라를 지키자거나 사드 철수는 한미동맹 파탄이라는 맞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가졌으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 때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라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분열됐던 모습이 고스란히 재연된 듯해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미국대사관을 에워싸는 행진은 비록 법 테두리 내에서 이뤄졌고 평화적으로 마무리됐지만 문재인정부 출범 후 한미 간에 사드 문제 등 안보 현안을 둘러싸고 민감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 시점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유감스럽다. 무엇보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갖기 닷새 전에 마치 미국을 압박이라도 하는 듯이 서울 주재 대사관을 포위하며 행진과 시위를 벌였으니 미국 측에서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조심스럽다.



이번 집회와 행진이 트럼프와 만날 문 대통령에게 오히려 부담을 주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한미동맹과 양국 관계 증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외교적 손실만 가져오기 때문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에 방어하기 위한 사드 한국 배치에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 자유이지만 국가 안보라는 큰 그림에서 때와 장소를 가릴 필요가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매일신문]

5. 향토 문단 먹칠한 흑구문학상 선정, 진상 밝히고 책임져야

경북의 대표적인 문학상의 하나인 ‘흑구문학상’ 수상작이 과거 발표된 작품으로 밝혀져 수상이 취소되고 수상 선정을 두고 경찰 수사도 불가피하게 됐다. 수상 작품이 공모 기준에도 맞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데다 문학상 선정을 둘러싸고 숱한 의혹이 제기돼서다. 국내외의 비판과 함께 향토 문인들의 분노와 진상 규명 목소리도 높을 수밖에 없다.



흑구문학상은 올해 9회째를 맞으며 향토 수필 분야 문학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올해 수상작 선정 이후 무자격 논란이 일고 수상 작품이 이미 과거에 발표된 작품과 거의 똑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주최 측은 수상작 취소와 상금 반환 조치를 내렸지만 논란은 계속돼 경찰 수사로 진상을 밝혀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셈이다.



이번 논란에서 무엇보다 수상 작가의 양심 불량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논란의 단초를 준 만큼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먼저 ‘발표하지 않은 작품’을 찾는 공모전에 과거 발표한 작품을 낸 일은 변명이 필요 없는 잘못이다. 이를 감추고 ‘문장 두 단락을 추가’한 기존 작품을 미발표작이라며 공모에 응한 일은 자신과 주최 측을 속인 범죄행위나 다름없다. 문장을 훔친 표절보다 나쁘다. 스스로에 엄격해야 할 작가의 기본자세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주최 측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작가 주장처럼 주최 측이 ‘기존 작품에 문장 두 단락을 추가했다’는 답변에도 불구하고 ‘수정`보완했다면 미발표작’이라고 해석했다면 더욱 그렇다. 문장 두 단락만 바꾼다고 미발표작으로 해석할 어떤 근거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주최 측이 수상 작품의 공개 요구마저 묵살한 일은 의혹을 부채질하고도 남는다. 2009년 발표된 수상작조차 공개하지 않았으니 주최 측에 대한 결탁 의혹을 자초하고 누워서 침 뱉은 꼴이다.



남은 일은 분명하다. 먹칠된 포항의 명예를 되찾고 향토 문단을 아끼고 지키는 문인들의 짓밟힌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 주최 측은 모든 진상을 밝혀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거액을 후원한 기관의 참뜻과 ‘흑구’라는 이름을 남긴 고인 작가를 기리는 취지를 훼손하지 않고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중앙일보]

6. 자영업 빚 500조…가계대출보다 위험한 뇌관이다

우리나라 자영업 종사자들 빚이 급증해 500조원을 처음 넘어선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금융감독원이 신용평가업계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내용을 보면 지난해 말 현재 조사 대상 자영업자 약 150만 명의 총부채가 약 520조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말 약 460조원이던 것이 1년 만에 60조원 늘어난 셈이다. 이에 따라 금감원은 26일부터 농·수·신협 단위조합과 새마을금고 등 상호금융권의 자영업자 대출 실태를 현장 점검한다.

자영업 대출은 흔히 ‘숨겨진 가계대출’로 불린다. 가계부채가 1400조원에 육박한다는 경고등이 거듭 울리는 가운데 자영업 대출 역시 가계대출 성격이 큰데도 상당 부분 중소기업 사업자 대출로 잡히는 바람에 그 비중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아왔다. 가령 개인병원의 비싼 의료기기 리스나 직장 은퇴자들의 오피스텔·상가 매입 자금도 여기 포함된다. 물론 주종은 음식점·수퍼마켓 같은 생계형 점포 창업이다. 통계가 엄밀하지 못하니 기업형·투자형·생계형에 따라 당국의 맞춤형 대책이 절실하다. 

생계형 창업은 '고용 없는 성장' 시대의 부득이한 사회안전망이다. 그만큼 사정이 절박해 '묻지 마 창업'과 수지 악화, 급전대출 등 악순환으로 인해 자영업 대출의 건전성은 가계 주택담보대출보다 훨씬 떨어진다. 지난 3월의 한국은행 보고서를 보면 자영업자의 가처분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액 비율(DSR)은 42%로 상용근로자(31%)보다 훨씬 높다.

이런 판에 이달 중순 미국 금리 인상 이후 국내 시중금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생계형 자영업은 내수침체에 취약해 금리가 조금만 올라도 어려움을 겪는다. 은행 돈은 언감생심이라 제2금융권 고금리 대출이 빠르게 늘고, 업종별 쏠림까지 있다는 점에서 주택담보대출 중심의 가계부채보다 훨씬 위태로운 뇌관이다. 500조원 넘는 자영업 대출의 부실화는 한계가구 양산과 실물경제 타격에 이어 금융시스템마저 위협한다. 금융위원회·기획재정부 등이 8월 내놓는다는 가계부채 범정부 대책에 자영업 문제가 각별하게 다뤄져야 하는 까닭이다.



[조선일보]

7. 6·25 날에 생각하는 '콜라 훔치던 연평해전 부상 군인'

24일 자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린 '연평해전 부상 용사, 콜라 한 병 훔치다' 기사를 읽은 많은 독자가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1999년 해군에 입대한 조모(38)씨 이야기다. 그는 그해 6월 15일 서해 연평도 바다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밀어내는 전투에 참여했다.



​인근 지원 전투함에서 소총으로 응사하던 그는 겨드랑이 부분 파편을 확인하고 군 병원으로 후송돼 스무 차례 수술을 받았다. 수술 부위가 괴사하고 염증이 번져 폐를 절제했고 한쪽 눈은 시력을 잃는 지독한 후유증을 겪었다. 의병 제대 후엔 사기를 당해 돈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지금은 유공자 연금 170만원 대부분을 빚 갚는 데 쓰고 끼니를 해결하기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다 지난달 편의점에서 1800원짜리 콜라 한 병을 훔치다 붙잡혔다.

조씨가 겪는 고통 중엔 자기 책임이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를 지키다 폐를 자르고 한쪽 눈을 보지 못하게 된 사람이라면 국가가 적어도 치료를 받고 먹고살 수는 있게 해줘야 한다. 적과의 전투에서 건강을 잃은 상이군인이 편의점에서 콜라 한 병을 훔치도록 방치해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제 6·25 참전 유공자 위로연에서 "참전 용사들께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대통령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6·25 참전 용사 11만명과 베트남전 참전 용사 22만명에게 월 22만원의 참전 수당을 지급하고 있을 뿐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현역 병장 경우 월급을 21만원에서 40만원으로 인상해주겠다고 했는데, 참전 용사 수당은 그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의무 복무병의 월급을 올려줄 여건이 된다면 참전 용사의 수당을 먼저 인상하는 것이 옳다.

6·25 참전 용사 평균 나이가 86세다. 해마다 생존자가 줄어 곧 10만명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나라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시간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모든 참전 용사에게 일률적으로 지원을 늘리기 어렵다면 참전 용사 가운데 생활이 어려운 분들을 가려내 우선 그분들에 국한해서라도 수당을 올려주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있게 몸을 던진 사람들을 잊으면 나라가 아니다.



8. 한국대사관이 시위대에 포위되면 어떻겠나

민주노총·참여연대 등 90여개 단체로 구성된 '사드한국배치저지 전국행동' 소속 수천명이 토요일인 24일 서울 도심에서 집회를 하다 주한 미국대사관을 19분간 인간띠로 포위했다. '이것이 동맹이냐 사드 들고 나가라' 같은 현수막을 들었고, '사드배치 결사반대' 등의 구호를 외쳤다. 집회를 주도한 단체들은 촛불집회 주도 단체들과 대부분 겹친다.



이들은 촛불집회 당시에도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 석방, 국정교과서 철폐, 전교조 합법화 등을 주장했다. 사드 배치가 대표적 적폐(積弊)라며 미 대사관 건물에 'NO THAAD'라는 레이저빔을 쏘기까지 했다. 최순실 사건 여파 속에서 그냥 넘어갔지만 새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촛불의 요구'라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들고 일어나고 있다.

이날 집회는 충돌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 대사관이 포위당했다는 그 자체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더구나 한반도 전쟁 억지와 평화 유지에 핵심 역할을 하는 유일한 동맹국의 대사관을 포위했다. 사드는 북핵·미사일로부터 주한미군과 우리를 지키기 위한 방어 체계다. 원해서가 아니라 불가피하게 한 선택이다. 그런데 중국은 북핵 제재는 미온적으로 하면서 한국이 사드를 들여왔다고 보복을 하고 있다. 이런 중국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망동이라고 해도 미국 사람들이 이 행태를 어떻게 볼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워싱턴이나 도쿄의 우리 대사관이 미국이나 일본 사람들에 의해 포위당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겠나.

민노총은 28일부터 다음 달 8일까지를 이른바 '사회적 총파업 주간'으로 설정하고 30일 서울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 예정이라고 한다. 앞서 지난주에는 건설노조 조합원 수천명이 출근길 서울 도심 도로를 점거하고 청계천 일대에서 노숙하기까지 했다. 이번 사드 집회도 이 총파업을 위해 분위기를 돋우려는 것이다.



파업에 사드 문제가 왜 끼어드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어떻든 핵심 중 하나다. 사드는 이미 논란이 끝났어야 하고 그럴 수 있었다. 그것을 새 정부가 끊임없이 논란거리를 만들어내고 이제 민노총 같은 극렬 세력들이 미대사관 포위까지 하고 있다. 이번 주 한·미 정상회담이 겉으로 어떤 발표가 나오든 속으로 동맹 관계는 많은 상처가 나고 있다.



[서울신문]

9. 靑 앞길 개방을 '생떼 멍석'으로 아는 민노총

청와대 앞길이 오늘부터 시민들에게 24시간 개방된다. 50년 만의 이번 조치는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국정을 보는 곳이 바깥세상과 담 쌓은 별천지여서는 애초에 곤란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상식을 되찾는 작업은 다행스럽다.

그런데 시작부터 찬물을 끼얹는 소식에 많은 국민은 걱정이 앞선다.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청와대 근처의 인도에 농성 그늘막을 세웠다가 관할 구청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 청와대 앞 100m 지점에 농성 텐트를 치고는 “노동계 요구를 들어 달라”고 외쳤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농성 천막을 쳤다가 뜯기면서 몸싸움도 벌였다. 참 딱하다. 힘들게 길 닦아 놨더니 엉뚱한 사람이 지나가 김을 뺀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청와대 앞길이 시민 품으로 온전히 돌아올 수 있을까 벌써 걱정이다. 산책로는커녕 광장의 시위 구호가 청와대 앞으로 옮겨지는 결과라면 반색할 사람은 거의 없다. 청와대 앞길을 지금 이 순간 민노총이 점거하고 있든 않든 그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다. 지금은 새 정부와 국민이 어떻게든 소통의 대의가 담긴 작업에 운을 떼보려는 지점이다. 그런 마당에 노동계의 간판 단체가 작심하고 엇박자를 낸다는 사실이 개탄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민노총은 오는 30일 사회적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주 민노총은 일자리위원회와의 간담회에서 최저임금 1만원 즉각 인상, 근로시간 단축, 전교조 합법화를 요구했다. 몰아치기 요구에 문재인 대통령은 “1년 정도는 지켜봐 달라”는 통사정까지 했다.

문 정부가 노조 친화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다만 지금은 국민 염원인 일자리 확대를 위해 노동계의 공감과 양보를 구하고 있는 단계 아닌가. 그런데 노동계의 양보를 요구하는 정부와 여론을 시작부터 눌러 입막음하겠다는 식의 공격 자세는 동의를 얻기 어렵다. 촛불의 수혜를 많이 봤으니 그 빚을 갚으라고 대놓고 새 정부에 요구하고도 있다. 큰 오산이다.



새 정부가 촛불 민심으로 탄생했다고 한들 그 민심을 민노총이 마치 제 것인 양 들먹거릴 자격은 어디에도 없다. 민노총의 말마따나 문 정권의 탄생에 기여한 바 크다면 오히려 지금은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자중하고 자제해 주는 게 도리다. 그런 진정성이 있는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10. 평창 남북단일팀 제의, 능동 외교 시금석돼야

문재인 대통령이 내년에 열릴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사실상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그제 전북 무주에서 열린 2017 세계태권도선수권(WTF) 대회 개회식 축사를 통해서다. 문 대통령은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여하면 인류 화합과 세계 평화 증진에 기여할 것”이라고 전제한 뒤 1991년 성사된 최초의 남북단일팀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북한 국제태권도연맹(ITF) 시범단도 이번 대회에 10년 만에 참석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남북 체육 교류가 된 이번 대회에 북한은 장웅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등 36명을 보냈다. 적어도 북한이 이번 대회에 참석한 것은 스포츠를 통한 남북 대화에 부정적이지 않다는 의미도 된다. 문 대통령의 제의는 북핵·미사일 문제 등으로 남북 간 대치 국면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인류의 제전인 올림픽과 스포츠를 통해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겠다는 구상이다.

북한의 반응은 아직 미지수지만 장 IOC 위원은 지난 2003년, 2007년 평창의 겨울올림픽 개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당시 남북 단일팀 구성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다. 2011년 7월 우리가 어렵사리 평창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이후 북한이 공식적인 반응을 하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문 대통령의 남북한 단일팀 제의에 대해 야당 일각과 보수진영에서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북핵·미사일 문제가 미해결 상태인 데다 웜비어 사망 이후 미국의 대북 정서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다. 더욱이 오는 29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굳이 대북 유화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응도 있다.

남북문제는 긴 호흡으로 볼 필요가 있다. 북핵·미사일 문제는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의 외교 안보는 물론 군사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사안이다. 지난 30년간 끌어온 북핵·미사일 문제가 단시일 내에 해결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을 남북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했던 지난 10년간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한·미 동맹 균열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지만 꼭 그렇게 볼 일도 아니다. 미국 역시 ‘압박과 관여’를 대북정책으로 발표했고 최종적 해결은 무력이 아닌, 대화를 통해 풀겠다고 했다. 우리가 선도적이고 능동적으로 남북 대화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 우리 외교 안보의 공간은 더욱 넓어진다.

적대적 관계에 있는 북·미는 유엔주재 북한 대사관을 채널로 뉴욕라인을 가동하고 있고 지난 수년간 스웨덴 등지에서 1.5트랙(반관반민) 형식으로 대화를 지속하고 있다. 남북은 박근혜 정부 들어 인도적 접촉은 물론 학술대회 등 민간 교류마저 끊긴 상태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10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더 넓은 시각에서 창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진정한 국익 외교라 할 수 있다.





주요신문칼럼



1. [중앙일보][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여자 남자, 말고 사람

어릴 적부터 ‘훤칠한’ 아이라 레이스 달린 핑크 원피스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로봇 조립에 심취했던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바비 인형을 사 달라 부모님을 졸라 본 적도 없다. 여성스럽다거나 여자답지 않다거나, 톰보이라거나 혹은 중성적이라거나, 이런 식의 평가는 늘 불편했다. 대학교 때, 남녀 관계의 바이블이라 불리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고는 ‘뭐지?’라고 생각했다. 갈등 상황에 처하면 ‘동굴’을 찾아 들어가고픈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사진)는 남자와 여자의 ‘타고난’ 특징을 규정해 차이를 강조하는 진화 심리학자들을 비판하는 책이다. 미국 사회학자이자 문학가인 저자 마리 루티는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남자와 여자를 분류해 ‘사용 설명서’를 내놓는 행태를 ‘젠더 프로파일링’이라 표현한다. 예를 들어 ‘남자는 더 많은 여성과의 짝짓기를 원하도록 생물학적으로 결정돼 있으며, 여자는 무능한 유전자를 피하기 위해 성에 소극적이다’라는 주장, ‘남자는 여성의 외모를 보고, 여자는 남자의 돈을 본다’는 통념 등은 왜 이토록 지속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가.

저자가 ‘성별에 따른 차이는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 제시된 특징들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인지 문화적으로 학습된 것인지에 대해선 과학계에서도 논란이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원래 그런 것이므로 어쩔 수 없다’를 강조하는 데는 특정한 의도가 끼어든다. 즉 과학의 권위를 등에 업고 어떤 권력관계를 방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인



간은 침팬지 같은 영장류와 유전적으로 가깝지만, 언어는 물론 자기애·공감·환멸 같은 단순하지 않은 감정을 지닌 존재다. 배우자의 자질에 대한 선호도 조사 결과를 분석하면, 한 문화권에 속하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문화에서 온 동성들끼리보다 더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이런 결과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갑자기 이 책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눈치챘을 것이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저명인사들의 ‘남자 담론’이 왜 문제인지 생각해 보고 싶어서다. 나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둘러봐도 ‘남자’ 아니면 ‘여자’라는 기준만으로는 해석도 소통도 불가능한 복잡한 피조물이 차고 넘친다. “남자/여자는 원래 이래” 라는 말에 대해 곱씹어 볼 때가 왔다는 게 한편으론 다행스럽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논쟁을 했으면 좋겠다. 여자 또는 남자다운 것도, 중성적인 매력의 소유자인 것도 싫고 그냥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을 뿐이라면 더더욱.



2. [매일신문][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쓸모없는 것의 쓸모

요즘 텔레비전에서 하는 가장 흥미로운 예능 프로그램은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역사, 철학, 문학, 과학, 여행 등의 다양한 주제로 끝도 없이 이어가는 국가대표급 지식인들의 수다를 듣고 있으면 은근히 몰입하게 되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프로그램의 제목이 ‘쓸모 있는’이 아니라 ‘쓸데없는’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쓸모 있는 것을 찾아 자투리 시간도 낭비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 치열한 세상에 대놓고 ‘쓸데없는’을 내세우는 프로그램이라니!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 프로그램의 진정한 재미는 바로 ‘쓸모없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 혹은 재발견에 있다.



‘쓸데’, ‘쓸모’라는 말은 한자로 표현하면 ‘유용’(有用), ‘유익’(有益)이다. 반대말이 ‘무용’(無用), ‘무익’(無益)인 것을 생각해 보면 ‘쓸모’는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당연히 쓸모없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치가 있다, 없다’를 판단하는 기준은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며, 이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장자」 ‘소요유’ 편에 나온다.



장자가 평소 하는 말들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혜자가 말을 한다.
“우리 집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가죽나무라고 부르더군. 그 큰 줄기는 울퉁불퉁해서 먹줄을 쓸 수 없고, 작은 가지는 꼬부라져서 자를 댈 수가 없네. 길가에 있어도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네. 이 나무처럼 자네의 말은 거창하기만 하고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외면하는 걸세.”



그러자 장자는 말한다.
“자네는 그 나무가 쓸모없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지만, 어찌 저 넓은 들판에 나무를 심어 그 주위를 노닐며 즐기고, 나무 아래에서 거리낌 없이 누워 편안히 잠잘 생각을 않는가? 나무가 도끼질을 당해서 없어질 일도 없으니 어찌 근심 걱정이 있겠는가?”



혜자는 나무가 재목으로 집을 짓거나 도구를 만드는 데 사용되어야만 나무로서 존재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장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나무가 삶의 여유와 재미를 주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장자는 쓸모에 대한 편협한 생각 때문에 큰 관점에서 삶을 가치 있게 사는 데 쓸모가 있는 것을 놓쳐버리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말한다. 이 칼럼의 제목이 ‘우리말 이야기’라고 하면서 맞춤법, 많이 틀리는 표준어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맨날 쓸데없는 이야기만 한다고.(그래서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쓸데없는 말이라고 생각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새롭게 뭔가를 아는 재미가 있고,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면 맞춤법 하나를 아는 것보다 더 쓸모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3. [세계일보][권오길의 생물의 신비] 뿔이 넷인 동물

하도 가물어 농민의 마음이 몹시 타들어간다. 힘에 부칠 정도로 물을 날라 상추밭, 배추밭에 뿌려줘 보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꼴로 농작물을 감질나게 할 뿐이다.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는 옛말이 백번 옳다.

그런데 몇 골 안 되는 배추밭에서 지난해 태어난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달팽이 녀석이 잎사귀를 갉아먹고 있다. 참 검질긴 생물들이다. 느림보달팽이의 어눌한 품새에다 둥그스름한 됨됨이 탓에 퍽 정답고 저절로 정감이 간다. 사실 필자는 그 많은 생물 중에서 산들에 나는 달팽이를 전공한지라 ‘달팽이박사’라 불린다.

달팽이는 몸에 골격이 없고 유연한 연체동물 중 배의 근육으로 움직이는 배발동물(복족류)로 아마도 밤하늘에 비친 둥근 ‘달’을 닮았고, 땅바닥에 지치는 팽글팽글 돌아가는 ‘팽이’와 흡사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리라. 달팽이의 한자어는 ‘와우(蝸牛)’인데 와(蝸)는 달팽이, 우(‘牛)는 소로 행동이 소처럼 느릿느릿함을 뜻한다.

달팽이는 신기하게도 뿔이 넷이다. 각자무치(角者無齒)라고 ‘뿔이 있는 자는 이가 없다’ 하듯이 한 사람이 모든 복을 다 갖지 못한다. 아무튼 달팽이는 머리 위에 한 쌍의 큰더듬이(대촉각), 그 아래에 한 쌍의 작은더듬이(소촉각)가 있다.

추켜세운 더듬이 넷이 제 맘대로 이리저리 엇갈려가며 까닥거리는 것을 보고 있을라치면 괴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사람들은 네 더듬이들이 끄덕거리면서 서로 다투는 것으로 알고 와우각상쟁(蝸牛角上爭), 와각지쟁(蝸角之爭)이라 했다. 장자 칙양편에 나오는 글로 ‘달팽이 뿔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말인데,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집안끼리 싸움박질함을 이른다.

뿔이 넷이 난 동물. 곧추세워 간들거리는 큰더듬이 끝은 좀 부풀어지면서 그 안에 눈이 들어 있지만 오직 명암만 구별할 따름이다. 그리고 아래의 작은더듬이는 늘 밑으로 구부려 냄새·기온·바람·먹이·천적을 알아내려고 쉼 없이 설레설레 흔든다. 소촉각이 일을 도맡아 다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달팽이 눈을 살짝 건드려 보면 얼김에 눈알이 더듬이 안으로 또르르 말려 들어갔다가 이내 곧 쑥 밀려나온다. 객쩍고 머쓱한 일을 어디 달팽이만 당하겠는가. 그래서 민망스럽거나 겸연쩍은 일에 처했을 때 ‘달팽이 눈이 됐다’고 한다.

알고 보면 달팽이는 여린 옥수수나 배추, 밀감 순을 뜯어먹는 해충이다. 그리고 달팽이는 다른 무척추동물처럼 암수 한몸이면서 꼭 딴 놈과 짝짓기를 해 정자를 바꾼다. 제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면 좋지 않는 자식이 난다는 것을 아는 탓이다. 또한 식물이 제꽃가루받이(자가수분)를 꺼리는 것도 같은 연유다. 하여 우리는 영리하기 짝이 없는 이들 동식물에서 19세기 후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했던 우생학(優生學·eugenics)을 배웠다.

흙을 발로 파 20∼30개의 알을 구덩이에 낳아 덮어두면 2∼3주쯤 어엿한 새끼달팽이가 나온다. 달팽이 새끼들은 얇디얇은 껍질을 둘러쓰고 태어나고 자라면서 몸집과 집을 더디지만 차근차근 늘여간다. 달팽이는 한평생 제 집을 짊어지고 다니기에 이사하지 않아도 되고, 주택부금을 붓지 않아서 좋다. 두어라. 굼뜨지만 꾸준한 느림뱅이 달팽이를 닮으리라. ‘달팽이크림’으로 이름 날리는 내 달팽이를 말이다.



4. [경향신문][아침을 열며] 난 잘 살고 있는 걸까

얼마 전 접한 한 기사의 제목이 가슴 한구석을 서늘하게 뚫고 지나갔다. 지난 7일자 경향신문 2면에 보도된 “한열아, 난 잘 살고 있는 걸까…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다”는 제목의 기사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연세대 앞에서 시위 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부축해 일으켰던 이종창씨의 인터뷰다. 이한열 열사와 함께 중환자실에 있다 살아남은 이종창씨는 매년 열사를 추모하는 자리에 나갈 때마다 “나는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린다고 한다.



그 시절을 통과했던 많은 이들이 이종창씨가 되뇌던 질문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잘 산다’의 ‘잘’이 돈 많이 벌고 높은 권세를 얻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짐작이 된다. ‘제대로’ ‘옳게’ ‘부끄럽지 않게’ 등등의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을 그 시절 사람들은 공감한다.



어쩌면 아주 무서운 말이다. 함께 추구했던 자유롭고 평등하며 민주적인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에 과연 맞게 살고 있느냐는 강요적인 질문이다. 그 시절 학교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분투했던 선배, 친구, 후배, 이름 모를 동지 또는 나 자신에게 미안하게 살지 말자는 뜻도 담겨 있으니 답을 하기가 쉽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에서 낭독한 기념사에도 이런 질문이 담겨 있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저는 오늘 오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 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다”며 박관현·표정두·조성만·박래전 열사를 일일이 부른 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헛되이 하지 않고 더 이상 서러운 죽음과 고난이 없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다”고 했다.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진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많은 이들 덕분에 30년 전 6월항쟁에 이어 지난해 촛불집회가 타올랐다.

무정한 세월은 야속하다. 30여년 동안 많은 이들이 그지없이 변했고, 속절없는 소시민이 됐다. 가끔씩은 자신들이 비판하고 경멸했던 이들의 모습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청년들은 세상을 바꾸려 들지만 흔히 자신이 변화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는 냉소적인 경구처럼. 사랑이 가면 신파만 남듯이 열정이 증발한 자리엔 그저 일상이 똬리를 틀고 있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이 모두 거룩하고 위대한 존재인 건 맞지만 모두가 불퇴전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모두가 역사의 흐름을 읽는 지성과 그 흐름에 온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갖기는 쉽지 않다.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는데 사람만 그대로라면 그게 문제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아직 시대를 움직이는 건 이 질문을 하던 세대다. 문재인 대통령뿐이 아니다. 이한열 열사의 영정을 들고 있던 우상호 연세대 ‘총짱’은 여당 원내대표를 거친 정계 거물이 됐고, 신출귀몰 ‘홍길동’ 임종석 전대협 ‘의장님’은 대통령비서실장이 됐다.

사실 아주 예외적인 양 끝의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어느 정도 선하면서도 속물이고, 아주 나쁜 놈까진 아니지만 이기적이다.

그래도 진지했던 그러면서 아프기까지 했던 과거를 품고 있는 이들이 보다 더 진심으로 현실을 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손을 들어주고 싶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아는 인물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볼 것이라는 데 걸고 싶다. 난 잘 살고 있는 걸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이들이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왜 하냐는 이들보다 덜 나쁠 것이라는 믿음이다.

가수 안치환은 이런 이유로 너를 사랑한다는 노래를 불렀다. “너의 시댄 이미 흘러갔다고 누가 말해도/ 나는 널 보면 살아 있음을 느껴/ 너의 길이 비록 환상일지라도/ 그 속에서 너는 무한한 자유를 느낄 거야/ 포기하지 마 너를 사랑한 이유/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이 시대도 길어야 이제 10여년 남지 않았나 싶다. 이 시대가 지나면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주류가 되는 세상이 될까. 그 걱정은 그 시절을 담당할 이들에게 맡겨두자. 새 시대는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생각들이 끌고 갈 것이다. 그 사람들과 생각들에 동의 못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집불통 아재’가 되는 건 경계하자. 그들의 몫이다.

이 계절이 가기 전에, 서로 사는 데 바빠 언제 얼굴 봤는지 기억조차 가물한 그 시절 친구를 만나 소주 한잔 기울이고 싶다. 가끔 통화할 때마다 언제나 그런 명랑한 목소리로 “그래 잘 먹고 잘 살고 있냐”고 인사하는 그 친구와.



5. [한국일보][기억할 오늘] 제비뽑기

​미국 작가 셜리 잭슨의 단편소설 ‘제비뽑기’(TheLottery)가 1948년 6월 26일자 ‘뉴요커’ 에 실렸다.

“6월 27일 아침은 날이 맑고 햇볕이 눈부시게 내리쬐었으며 완연한 여름날답게 싱그러운 온기로 가득했다.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 올랐고(…)”(김시현 옮김, 엘릭시르)로 시작되는 소설은, 마을 전체 주민 300명이 연례행사로 벌여온 제비 뽑기 날의 오전 반나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집집마다 가장이 나서 제비를 뽑고, ‘당첨’된 집 식솔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2차 제비 뽑기를 해서 최종 선발된 이를 향해 가족을 포함해 전 주민이 돌을 던져 살해하는 이야기. 

버몬트 주의 작은 도시 노스베닝턴의 30대 초반 무명 작가 잭슨은, 어쨌건 그 소설로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주로 항의와 분노를 담은 것이긴 했지만, 잡지사와 작가의 집으로 독자 편지가 쇄도했다.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하고 거대한 폭력을 갓 겪은 뒤였다. 하지만 전쟁은, 시민들에게는 뚜렷한 적이 있고 명분이 있는 폭력이었다.



서정적이고 자못 다정하기까지 한 문체로 잭슨이 던져놓은 ‘낯선’ 폭력에, 미국 시민들은 자신들이 믿던 이성과 도덕이 뺨을 맞은 듯 분노했다. 끔찍하고, 당혹스럽고, 역겹고, 혐오스러운 글을 어떻게 저명한 주간지에 실어 주말 분위기를 망쳐 놓느냐는 거였다. 60년 한 강연에서 잭슨은 그 해 여름 받은 약 300여 통의 편지 중 우호적인 건 13통에 불과했고, 그건 대부분 친구들이 보낸 거였다고 말했다. 그 ‘행사’를 직접 참관하고 싶으니 어느 마을이냐고 묻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나고 자란 그가 노스베닝턴으로 이사한 건 남편이 베닝턴대 교수가 되면서부터였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 잭슨에게 그 마을 주민들이 살가웠을 리 없다. 구심력 강한 공동체 사회에 발을 들이게 된 타자의 공포가 그 작품의 바탕이 됐으리라는 얘기. 2차대전 홀로코스트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의 남편이 유대인이었다.



2년 뒤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에 쓴 글에서 잭슨은 “뭔 말을 하려 했는지 설명하긴 무척 힘들다. 다만 고대의 희생제의를 지금 내가 사는 마을로 가져와 초점 없는 폭력과 보편적인 비인간성을 드러내 독자들을 자극하고 싶었다”고 썼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남아공이 그의 책 발매를 금했다는 말에 잭슨이 “그들이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했나 보다”며 뿌듯해 했다는 말도 있다. 

‘제비 뽑기’는 이제 열에 아홉이 멋진 작품이라며 엄지를 세우는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그들 아홉 중 다른 손에 돌멩이를 든 이가 또 열에 아홉쯤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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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늙은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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