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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30일 수요일 오늘의 주요 신문사설·칼럼

※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올리는 자료로 상업적 목적은 없으며 선정된 사실의 정치적 성향은 블로그 운영성향과 무관합니다.

 

 

 

 

 

 

주요 신문사설

[중앙일보]

1. 매표용 공약 근절이 경제 살리기의 시작이다

예산을 짜는 것은 정부의 국정 철학을 숫자로 담는 행위다. 어제 정부는 내년 예산안 편성 지침을 확정했는데 재량지출 사업의 10%를 줄여 일자리 창출 등에 쓰기로 했다. 이렇게 줄이는 돈은 최대 16조8000억원에 달한다. 정부가 쓸 돈, 곧 세출의 구조조정을 명문화한 것이다. 재정 사정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는 터라 세출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꾸준히 언급돼 왔는데 이를 7년 만에 처음 명시한 것이다. 집권 후반 정부의 국정 철학이 ‘재정 건전성 강화’라는 얘기다. 이는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쏟아지는 포퓰리즘 공약에 대해 정부가 먼저 자물쇠를 채웠다는 의미도 크다.

선거는 공약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행위다. 그런데 허황된 공약(空約)이 춤추고 선거판이 혼탁해질수록 정부가 먼저 중심을 잡아야 한다. 여당의 공약도 덩달아 차분해지고 있다. 새누리당의 공약엔 4년간 4조3000억원이 든다. 추가로 세금을 더 안 걷고 달성 가능한 수준이다. 강봉균 공동 선대위원장표 공약의 핵심은 반(反)포퓰리즘이다. 그는 “무상 복지 시리즈를 감당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다”고 말했다. 그가 다듬은 7대 경제 공약의 기본틀에는 유권자의 환심을 살 사탕발림이 없다. 과거에 비하면 이게 과연 총선 공약인가 싶을 정도다.

반면 더민주당은 돈이 좀 더 드는 공약을 내놨다. 10대 주요 공약에만 약 15조원이 든다. 소득 하위 70% 어르신에게 기초연금 30만원, 0~5세 무상교육, 공공 임대주택 240만 가구 공급 등 선심성 복지공약도 꽤 담겼다. 쓸 것 줄이고, 부자한테 더 걷는 재정·조세 개혁이 중심이다.

이런 패턴은 과거 선거와 비교하면 나쁘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 정치는 선거 때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포퓰리즘 광풍에 휘말려 책임지지 못할 공약으로 나라 살림을 거덜 내는 일에만 몰두해 왔다. 이번 총선은 이런 과거의 패턴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다. 굳이 가르자면 야당의 공약은 적극적·공격적·진보적, 여당은 소극적·수비적·보수적인 쪽이 바람직하다. 그 안에서 절충점을 찾는 것이다.

우리 경제가 어렵다는 사실은 여야 모두 알고 있다. 원인과 처방도 대개 서로 공감한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가 어렵고, 우리 산업의 구조개혁이 안 됐으며, 규제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처방은 구조개혁, 규제완화다.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같다. 일자리와 가계소득 증대다. 다만 방법론과 우선 순위가 차이가 날 뿐이다.

여야가 실현 가능한 경제 공약을 내놓고 제대로 맞붙어 보라. 한정된 자원으로 누가 더 효율적으로 경제를 잘 살릴 수 있는지 겨루는 것이다. 선거가 끝나면 돌아보지도 않을 비현실적인 공약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책조합을 놓고 유권자들이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선거가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래야 유권자도 표를 줄 마음이 생길 것 아닌가.

2. 통신자료, 마구잡이로 들여다봐선 안 된다

검찰·경찰과 국가정보원의 통신자료 조회에 대한 시민들의 불안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무차별적으로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그제 기자간담회에서 “통신자료가 정해진 용도로만 활용되고 외부에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관련 절차를 전반적으로 점검할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고 말했다. 시중에 확산되고 있는 논란을 의식해 보완 방안을 마련해보겠다는 얘기다. 최근 국회의원과 노동단체 실무자, 기자, 대학생 등 일반 시민들까지 통신자료를 조회당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통신 사찰(査察)’이란 지적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현행 전기통신사업법 83조는 수사·정보기관이 재판, 수사, 형 집행, 국가안보에 대한 위해 방지를 위해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 등 인적 사항을 사업자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관들은 이 조항을 활용해 법원 영장 없이 인적 사항 일체를 제공받아왔다. 2014년의 경우 통신사는 전화번호 수 기준으로 검찰 426만 건, 경찰 837만 건, 국정원 11만 건의 통신자료를 제공했다(미래창조과학부 집계). 1년간 1270만 개 넘는 전화번호 보유자의 인적 사항이 수사·정보기관에 제공된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제공요청서에 요청사유 및 연관성 등만 간략하게 적으면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해당자들의 인적 사항 일체가 넘어간다는 데 있다. 당사자는 통신사에 제공 내역을 요청해야 알 수 있다. “인적 사항쯤이야…”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인적 사항은 프라이버시의 핵심이다. 특히 주민번호 하나만 있으면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에서 추가적인 개인정보를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생활의 울타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경우 표현의 자유도 위협받기 마련이다.

분명한 건 인권이 수사 편의에 희생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경찰은 물론이고 국정원과 검찰 모두 시민이 납득할 수 있게끔 명확한 기준과 절차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통신자료 조회는 원칙적으로 법원 허가를 거치도록 법을 고치고 당장 법 개정이 어렵다면 최소한 사후 통지 절차라도 도입해야 한다.

[이데일리]

3. 법원으로 옮겨가는 '미인도' 위작 논란

지난해 타계한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둘러싸고 그동안 벌어졌던 위작 논란이 끝내 법원으로 옮겨갈 조짐이다. 천 화백의 유족이 무료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조만간 국립현대미술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한국 화단에서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던 천 화백의 위작 시비와 관련해 마찰을 빚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족이 소송을 제기하려는 취지는 단순하고도 명백하다. 천 화백이 생전에 문제의 그림에 대해 거듭 자기 작품이 아니라고 밝혔는데도 이 그림을 소장한 국립현대미술관 측이 계속 천 화백을 저작자로 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막아 달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국가기관인 미술관이 저작권 침해 및 사자명예훼손을 저지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확대해서 바라보자면, 고인에 대한 인권모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술관 측은 이 그림을 이용해 엽서와 달력 등을 제작·판매하기도 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미술관 측이 이 그림과 관련해 국회에 허위 보고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이다. 위작이 아니라는 근거를 마련하려는 술책이었다. 미술관 고위 관계자들이 천 화백으로부터 “위작 주장이 착오에 의한 것이었다”는 진술을 청취했으며, 문제의 그림이 실린 화집이 발간된 데 대해서도 “천 화백이 편집과정에 참여했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위작 논란으로 한참 옥신각신하던 1990년 무렵의 얘기들로, 지난해 국회 제출 경과보고서에서 확인된 내용이다. 관계자들 사이의 진술이 약간씩 엇갈리고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술관 측이 허위 공문서 작성 범죄까지 스스럼없이 자행한 셈이다.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의 이중적인 시각이다. 이우환 화백 위작 논란이 제기되자 “작가가 살아 있으니 작가에게 물어보면 된다”며 작가의 뜻을 최우선 존중해야 한다면서도 문제의 미인도에 대해서는 “충분한 위작 근거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한 논란에 대해 제대로 보고를 받지 못했거나 일방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일단 법원으로 문제가 옮겨가는 만큼 모든 논란이 말끔히 해소됨으로써 고인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4. 능력중심 채용이 선진사회 앞당긴다

모름지기 조직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야 한다. 그게 조직이 발전하는 지름길이다. 나라나 기업, 단체가 똑같다. 하지만 이처럼 지극히 당연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어느 지역 출신이고, 어느 대학을 나왔으며, 누구와 어떤 관계냐가 취업에 훨씬 요긴한 요소가 되곤 한다. 민주노총 산하노조 4개 중 1곳꼴로 기업이 종업원 자녀를 우선 채용해 주는 ‘고용 세습’을 누리고 있다니, 이젠 노조의 ‘갑질’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취업준비생들이 능력 키우기보다 학벌과 스펙 쌓기에 집착하는 것이 그래서다. 대한상의에서 그제 열린 ‘능력중심 채용 실천선언’ 선포식은 그릇된 채용 풍토를 확 바꾸자고 민관(民官)이 손잡은 자리다. 국무총리실을 비롯해 고용노동부, 교육부,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와 공공기관, 경제단체인 대한상의·경총·전경련·중소기업중앙회가 참여했다. 기업 중에서도 삼성·현대·SK·LG 등 대기업 25곳과 몇몇 중소·중견기업이 동참했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이날 선언에서 채용기준과 절차를 사전에 명확히 알리며, 합리적 이유 없이 사진·연령·출신지·가족관계 등의 인적사항을 요구하지 않으며, 업무와 무관한 어학성적·해외연수·사회봉사 등 과도한 스펙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등 10개 실천과제를 제시했다. 이대로만 된다면 고학력 인재를 과잉 공급하느라 부담하는 사회적 비용과 막상 취업하고 나면 쓸모도 없는 스펙을 쌓느라 취준생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크게 줄어들 게 틀림없다.

채용기관이나 취준생 모두에게 이로운 ‘상생’ 조치를 더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 정부의 복안은 각 직종의 필수 직무능력을 규정한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이다. 지난해 130개 공공기관에 도입돼 성과를 낸 NCS를 내년에는 모든 공공기관으로 확대하고 앞으로 기업들의 능력중심 인사관리를 유도해 나간다는 것이다.

능력중심 사회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자 선진국으로 가는 디딤판이다. 만시지탄이지만 후진적 채용 관행에 제동을 걸려는 시도를 환영해 마지않는다. 이번엔 결코 말로만 끝내지 말고 새로운 채용제도로 굳건히 뿌리내리도록 민관이 함께 힘써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동아일보]

5. F-35A 격납고 로비 의혹, 수사도 않고 덮을 참인가

차기 전투기(FX)로 미국에서 도입하는 F-35A의 격납고 건설을 놓고 국내 대형 건설사들이 로비를 벌인 정황이 기무사령부에 포착돼 국방부 특별건설기술심의위원회 영관급 장교 40명이 전원 교체됐다. 대기업 계열사 A사와 대형 건설사 B사가 공병 병과 출신 예비역들을 영입해 작년 10월부터 경쟁적으로 로비했고, 이들의 상관에게도 로비를 했다고 한다. 청와대 지시에 따라 국방부는 이들과 민간인 심사위원 28명 등 68명 중 20명을 새로 심사위원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로비 의혹을 철저하게 수사해 진상을 가려내는 대신 당초 예정대로 1일 결과를 발표키로 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총사업비 7조3400억 원대의 FX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비리 의혹이 불거졌으니 사업이 본격 진행됐더라면 ‘먹자판’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격납고는 전투기를 보관하고 정비하는 시설로 2400억 원 규모의 대형 사업이다. 건설사가 ‘군피아’를 이용해 로비했는데도 군이 현역 심사위원만 교체하고 의혹을 묻어둔 채 아무 일도 없는 듯 로비 기업에 사업을 맡긴다니 이해하기 힘들다. 군은 로비 기업의 제재도, 입찰을 새로 할 법규도 없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청와대와 국방부에 보고는 왜 했는지, 사업을 둘러싼 곡절이 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건국 이래 최대 무기도입 사업인 FX는 그렇지 않아도 논란이 많았다. 미국 록히드마틴사에서 F-35A를 도입하면서 핵심 기술을 이전받아 한국형전투기(KF-X)를 개발하려던 정부의 구상은 미국의 거부로 우리가 독자개발을 해야 할 판이다. 아직 개발 중인 F-35A는 중력가속도와 무기 발사, 비상시 조종사 탈출 기능에 결함이 나타나 미 국방부는 내년 7월 말로 예정됐던 개발시험 완료 일정을 1년 정도 늦출 것임을 미 의회에 보고했다. 그런데도 국방부가 뭐가 급해 그렇게 서둘러 의혹을 덮고 넘어가려는 건지 모르겠다. 

정부는 방산비리의 뿌리를 뽑겠다고 방위사업비리합동수사단을 설치해 작년에 1조 원 규모의 비리를 적발한 데 이어 올 1월 서울중앙지검에 방위사업수사부를 신설했다. 이적행위나 다름없는 방산비리를 척결하기 위한 사정 당국의 노력이 계속되는데도 일선에선 달라진 게 없다. 파문의 최소화에 급급해 이번 사건을 그대로 덮고 넘겨선 안 된다. 차제에 부패의 화근을 근본적으로 수술하지 않으면 FX 사업이 더 큰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져 국가안보에 큰 구멍이 뚫릴 수 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지 못하는 사태를 예방하려면 철저한 수사와 일벌백계가 필요하다.

6. 헌재가 해산시킨 통진당 출신, 간판만 바꿔 출마하나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정당 결정으로 해산된 옛 통합진보당 소속 인사 40명이 지난달 창당한 민중연합당 후보로 20대 총선에 출마한 것으로 확인됐다. 40명 중 36명이 과거 통진당 간판으로 총선이나 지방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다. 이 중 4명은 주요 당직자였고, 이상규(서울 관악을) 김재연(경기 의정부을) 전 의원도 포함됐다. 비례대표 4명 모두와 상당수의 시도당 위원장도 통진당 출신이다. 이력을 정확히 기재하지 않은 사람까지 감안하면 수가 훨씬 늘어날 것이다. 민중연합당의 총선 후보 60명 가운데 무려 3분의 2가 통진당 출신이니 사실상 ‘통진당의 간판만 바꿔 단 신장개업’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민중연합당은 “99% 민중의 직접 정치를 실현하자”는 모토로 2월 27일 비정규철폐당 농민당 흙수저당 연합으로 창당했다. 공동대표인 강승철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과 이광석 전 전농 의장도 통진당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창당 한 달도 안 돼 13개 광역시도당을 구축하고 단시일 내 당원 2만여 명을 확보한 것을 보면 통진당 세력과의 연계 의혹이 짙다.

정당법상 해산 정당의 강령 또는 기본 정책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정당의 창당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성원들에 대한 제재 규정은 별도로 없다. 해산 당시 통진당 소속 의원 5명의 의원직 박탈도 헌재의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다.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은 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위헌을 이유로 정당을 해산하면서 그 사유가 된 강령을 만들고 활동에 동조한 구성원들에게 입법 미비로 법적 제재를 가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홍성규 전 대변인 등 통진당 출신 10명은 이번에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독일은 정당 해산 결정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할 경우 일정 기간 피선거권을 제한한다. 또한 ‘헌법에 적대적 활동을 하는 사람은 공무원에 임용될 수 없고, 적대적 조직에 소속된 구성원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공무원 임용을 거부할 수 있다’는 규정까지 두고 있다. 일본도 비슷하다.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불순 세력까지 용인하는 것은 자유와 민주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서울신문]

7. 청년 실업 비웃는 고용세습 특권 뿌리 뽑으라

정부와 경제단체가 그제 능력 중심의 채용을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사회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청년 실업 문제가 임계점에 달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고용노동부는 근로자 100명 이상 기업 2769곳을 대상으로 노사 단체협약 실태를 조사한 결과 업무상 재해를 당한 직원의 가족을 우선 채용하는 규정을 둔 사업장이 505곳으로 가장 많았고, 정년 퇴직자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직장이 442곳이나 됐다고 밝혔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사원들의 복지 차원에서 회사를 위해 일하다 불행을 당한 직원의 자녀에게 취업 기회를 주는 것을 비난할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국가 유공자에게 취업 기회를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능력 유무와 상관없이 부모의 지위나 단체교섭의 특권으로 취업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양질의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운 현실에서 대기업의 블루칼라 고용세습도 이제는 시대 상황에 맞게 개선돼야 한다. 화이트칼라 고용세습도 마찬가지다. 기업마다 임원 출신 자녀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하는 현대판 음서제도가 공공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일부 대기업에서 적성검사 등 창의적인 면접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비교적 공정할 것으로 여겨지는 대학교 로스쿨 입학 전형에서도 면접을 담당하는 교수들의 정성평가가 당락을 결정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반영돼 금수저 논란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공기업은 물론이고 민간기업의 고용 실태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정부는 공정한 채용을 위해 국가직무능력표준(NCS) 을 이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NCS는 산업 현장에서 직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과 기술, 소양 등을 산업부문별 수준별로 구성해 놓은 체계다. 산업 현장에서 곧바로 투입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그러나 아직도 교육 현장과 산업 현장의 괴리가 크다는 것이 약점이다. 이를 활용하려면 교육 프로그램 개발이 선행돼야 한다.

능력 중심의 사회가 되려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그동안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노동조합도 예외가 아니다.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고용세습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게 마땅하다.

8. 탈당파에 대통령 사진 떼라는 친박의 갑질

4·13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내부에서 유승민 탈당 파동에 이어 대통령 ‘존영’(尊影) 반납 소동까지 일어나 시끄럽다. 그제 새누리당 대구시당이 탈당 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유승민(대구 동을), 주호영(대구 수성을), 권은희(대구 북갑), 류성걸(대구 동갑) 의원 등 4명에게 대통령 존영을 반납하라는 공문을 보내 논란이 일어났다. 존영은 사진이나 화상을 높여 부르는 말로 박근혜 대통령 사진이 들어간 액자를 반납하라는 의미다.

새누리당 대구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 명의로 보낸 공문에는 “2013년 6월 새누리당에서 당 소속 국회의원 사무실에 배부해 드린 ‘대통령 존영’을 29일까지 반납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대구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은 조원진(대구 달서병) 의원은 유 의원 등이 사무실에 대통령 사진을 계속 걸어 두는 것에 대해 “대통령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조롱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문을 받은 의원들은 “황당하고 옹졸한 처사”라고 반발했고, 청와대 측은 “특별히 언급할 게 없다”며 말을 아꼈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 파동의 여진이 계속되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반응일 것이다.

최근 유승민 탈당 파동에 이어 이번 소동까지 지켜보는 국민들은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친박(친박근혜)계 인사들이 대통령의 눈 밖에 난 인물들을 낙천시키고 탈당까지 몰아간 것도 부족해 박 대통령의 친분을 앞세워 반사이익을 보려는 속셈에 그저 혀를 찰 뿐이다. 탈당 의원들이 잘못을 했다면 유권자에게 당을 내친 그들의 행태를 지적하고 정정당당하게 표로 심판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 정도다. 탈당 인사들이 대통령·새누리당과 결별한 무소속 후보라는 점을 부각하려는 전략 자체가 정정당당한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다.

유승민 탈당 파동에 이어 대통령 사진 반납 논란까지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는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 등 친박 측의 독선에 있다. ‘당 정체성’ 문제로 공천을 줄 수 없다면 당당하게 이유를 제시하고 유권자들의 판단에 맡기면 될 일이다. 대통령 사진 반납 소동은 김무성 대표의 옥새 파동까지 겪은 집권당의 부끄러운 민낯에 다시 먹칠을 하는 꼴이다. 새누리당은 ‘친박’의 전유물이 아니다. 집권당으로서 통합과 포용의 자세를 보여 주지 않는 한 유권자들의 심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9. 이번 핵안보회의에선 반드시 북핵 의지 꺾어야

박근혜 대통령이 3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제4차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오늘 출국한다. 핵무기와 핵물질은 물론 원전 등 핵시설을 테러 집단으로부터 방호하려는 목적의 회의이지만 국제사회의 ‘발등의 불’인 북핵 문제가 주관심사다. 회담 기간 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그리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연쇄 회동과 3국 정상회담이 주목되는 이유다. 핵 비확산이 아닌 핵테러 문제를 다루는 정상 간 협의체라지만, 목마른 쪽이 우물을 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부는 이번에 북핵 문제를 적극 이슈화해 북한 김정은 정권이 핵 개발을 포기하도록 빈틈없는 국제 공조를 견인하는 무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핵안보정상회의는 이번 4차 회의를 끝으로 일단 역사적 수명을 다한다. 물론 항구적 글로벌 핵안보 체제 구축이란 회의의 근본 취지는 우리가 의장국으로 예정된 국제원자력기구(IAEA) 각료회의로 이어지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주도적으로 이번 정상회의에 임해야 할 당위성은 차고 넘친다. 핵테러 예방 등 핵안보에 대한 글로벌 기여도를 늘려 대외 의존도가 높은 자원부족국인 우리나라가 안정된 국제통상 활동을 영위할 중장기적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차원만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북한의 핵 도발을 억제하고 비핵화를 압박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란 뜻이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도발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전례 없이 강도 높은 대북 제재 결의안 2270호를 발동한 지 한 달이 다 돼가는 시점이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핵을 포기하긴커녕 핵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등 대남 핵공갈을 일삼고 있다. 심지어 북측은 이번 핵안보정상회의를 앞두고 “미국의 적대적 행동에 대응해 사전 핵공격을 가할 준비가 돼 있다”(리수용 외무상)는 등 신경질적 반응까지 보였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 등 한반도 주변 당사국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이번 회의야말로 북한의 핵 포기를 이끌어 낼 실효성 있는 방안을 논의할 적기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현시점에서는 중국이 대북 제재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게 관건이다. 미 의회가 김정은의 통치자금과 북측의 석탄 등 광물 수출을 차단하는 독자적 제재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중국이 협력하지 않는 한 실효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란 대북 정책을 당분간 유보하고 제재의 고삐를 죄기로 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전 배치가 시간문제가 된 상황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번 핵안보정상회의야말로 북한에 핵을 포기하라는 확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절호의 기회임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차제에 국제사회가 지난 20여년간 되풀이된 북한의 ‘도발→제재→대화→보상→도발’의 악순환을 끊겠다는 의지를 보여 줘야 할 것이다. 김정은이 핵무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세습 체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촘촘한 그물망 국제 제재를 다지는 데 우리의 외교 역량을 총동원하기를 당부한다.

[매일경제]

10. 中 반도체 투자 무서운 기세, 격차 유지할 방안 있나

중국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 최대 반도체 업체인 칭화유니그룹과 국영기업인 XMC는 각각 300억달러와 240억달러를 투자해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메모리 반도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시장을 과점하고 있어 한국 반도체 산업에 도전장을 내민 것과 다름없다. 중국은 이미 인텔 퀄컴 등과 합작해 생산시설을 유치했고 한국과 대만, 일본의 반도체 기술인력 영입을 위해 기존 연봉의 5~10배를 제시하는 등 공세를 펼치고 있다.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한 인수·합병(M&A)은 무서울 정도다. 칭화유니그룹은 크고 작은 업체를 합병하며 덩치를 키웠고, 지난해에는 D램 세계 3위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 인수금액으로 무려 230억달러를 제시해 업계를 놀라게 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37.9%와 19.6%를 점유하고 있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아직 공정기술을 확보하지 못해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은 미미하다. 중국이 지금 당장 한국의 D램 미세화 공정이나 낸드플래시 3차원(3D) 적층 기술을 따라오는 것은 역부족이다. 바로 생산한다고 해도 기술 격차는 최소한 2~3년 벌어져 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그러나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을 확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화웨이와 하이얼 등 중국 토종 가전·전자업체들의 반도체 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점도 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호재로 작용한다. 칭화유니그룹이 이들을 고객사로 확보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생산설비에 14조6000억원, 연구개발(R&D)에 3조6000억원을 투자했고 SK하이닉스도 5조원 이상 투입하는 등 막대한 자금을 쓰고 있지만 중국의 투자 규모에 비하면 충분한 수준은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의 미세화·적층 기술은 한계에 봉착했다는 주장도 있는 만큼 초격차를 유지하려면 독창적인 선행기술 개발에 더욱 고삐를 죄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자율주행차와 웨어러블 기기 등에 탑재되는 시스템반도체도 세계시장 점유율을 높여 나가야 중국의 매서운 추격을 따돌릴 수 있다.

주요 신문칼럼

1. [주간경향][백가흠의 눈]인심은 그곳에 있어야 한다

실종아동 전수조사를 통해 몇 년째 행방불명이 된 아이들을 찾고 있는 중, 한 명씩 그 행방을 찾을 때마다 안타까움과 충격이 가실 길 없다. 실종되었던 대부분의 아동들은 부모에게 고문에 가까운 체벌을 받다 숨져 야산에 묻힌 채 발견되고 있다. 폭력과 학대로 희생된 가엽고 불쌍한 어린 영혼들에게 어떤 위로와 평안의 기도도 할 수 없을 만큼 그 내용은 충격적이고 가혹하다. 우리의 더 큰 공포는 사건 자체에 있지 않다. 옆에 사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학대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그것을 막을 아무런 장치도 이 사회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 반복되고 있는 우리 사회와 안전에 대한 민낯이다. 현재 20여명에 가까운 아이들을 경찰이 찾고 있는 중이다. 마음은 무겁기만 하고 비관적이다.

우리에게는 인심(人心)이라는 것이 있었다. 타인을 도와주거나 배려의 마음을 뜻하는 인심은 사람에 대한 온정,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타인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자문해보고 발견한 그 답이 우리가 처한 안전의 현재일 것이다. 다시 선거철이 되었고, 모든 현안과 관심은 총선 이슈에 함몰되었다. 우리의 정치라는 것이 편할 날이 없고 근심이 되지 않는 순간이 없다. 국가의 행정과 운영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정부도, 이 사회 안의 다양한 계층의 고충과 목소리와 보편적이고 올바른 시각을 담아야 할 언론마저도 온통 선거와 정치 얘기뿐이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이 없어져도 알 수 없고 무감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로지 ‘힘’과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과 뺏으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과 눈치 보며 빌붙으려 하는 자들과 구경꾼까지 모여 만들어내는 떠들썩한 굿판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그것에만 인심(人心)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정치란 국민에게 행해져야 하는 인심이다. 우리의 정치는 누구를 위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다. 오로지 편을 가르고 그 ‘힘’을 차지하고 유지하고 빼앗기 위한 이전투구. 국민들은 씁쓸하지만 주체를 되돌릴 방법이 묘연하기만 하다. 정책이 없어도, 고난과 불투명한 미래밖에 주어지지 않아도 근소한 다수의 국민은 무조건 그들에게 동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희귀해진 인심(人心)이 존재하는 듯하다.

‘다수’라는 개념은 현 시대에서는 가장 불공정한 룰 같다. 정치에서 근소한 다수의 승리는 가장 다이내믹한 승부를 만들어낸다. 정치는 승부만 존재하는 게임에 불과하다. 그저 승패만 존재하는 스포츠다. 거기엔 매너도 없고 룰도 없고 보편적인 가치의 목적도 없다. 그러니 신성한 스포츠도 아닌 무엇이다. 어쨌든 근소한 우위의 다수를 만드는 것만이 오로지 목적이다. 선거라는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은 사라지고 있고, 여전히 실업자는 늘어나고, 부자들과 재벌에 대한 법의 테두리는 느슨해진다. 소득의 분배는 갈수록 불공평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이 부과된다. 하지만 승리에 도취된 사람들은 실종된 이 많은 것들을 잊고 승부에만 집착한다. 다수의 편에 서야만 한다는 생각, 무조건 우리 편이 이겨야 한다는 신념뿐이다.

윤리와 가치, 안전과 희망, 생명과 자연, 이 모든 것이 실종되고 돌아오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무책임은 우리 사회의 현실과 정치의 현재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 모욕적 언사를 일삼은 정치인들 다수가 출마를 했다. 이번에는 인심이 다른 곳에 있는 자들을 심판하는 선거를 하자.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실종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 투표하자. 인심(人心)은 그곳에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믿는 사람들, 비록 근소한 차이의 소수이겠지만 서로를 위안 삼아 보자.

2. [뉴시스][리뷰]창작뮤지컬, 새로운 길 찾다…'마타하리'

올해 최대 기대작인 '마타하리'가 창작뮤지컬의 또 다른 길을 보여줬다. 29일 밤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통해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에 뒤지지 않는 화려한 무대와 조명의 위용을 드러냈다. 

EMK뮤지컬컴퍼니가 3년여 간 제작비 125억을 쏟아부은 것이 오롯이 드러났다. 제작비의 8할이 무대 세트 제작에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규모를 자랑했다. 창작은 물론 라이선스 뮤지컬보다 훨씬 많은 29대의 자동화기기의 움직임으로 인해 무대 세트가 마치 또 다른 배우처럼 시시각각 변주됐다. 

EMK뮤지컬컴퍼니는 '모차르트!' '엘리자벳' '황태자 루돌프' '팬텀' 등 유럽 중세를 배경으로 한 라이선스 뮤지컬로 입지를 다져왔다. '마타하리'는 이 회사의 첫 창작뮤지컬이다. 그간 노하우를 반영하듯 주요 스태프는 외국 창작진으로 꾸렸다. 실존 인물인 마타하리를 뮤지컬로 만들자고 EMK뮤지컬컴퍼니에 제안한 프랭크 와일드혼과 미국 뮤지컬 연출가 겸 안무가 제프 칼훈이 주축이다.

와일드혼은 넘버 '지금 이 순간'으로 유명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히트 이후 '황태자 루돌프' '몬테크리스토'로 EMK뮤지컬컴퍼니와 작업하며 국내 뮤지컬계에서 마니아층을 구축한 인물이다. 칼훈은 뮤지컬 '뉴시즈'로 토니상 최우수 연출 부문 후보에 올랐으며 '하이스쿨 뮤지컬' '올리버' 등을 지휘했다. 여기에 아이반 멘첼(대본), 잭 머피(작사), 제이슨 하울랜드(편곡·오케스트레이션·음악감독)가 힘을 실었다. 

주요 스태프만 보면 과연 한국산 창작뮤지컬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뮤지컬 '드라큘라'의 4중 턴테이블 무대로 호평 받았던 오필영 무대 디자이너의 무대의 메커니즘은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원형 모양이 아닌 한쪽 끝이 뭉뚝한 삼각형 모양의 턴테이블은 끊임없이 다양한 공간감을 입체적으로 연출한다. 대형 뮤지컬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도맡는 김문정 음악감독과 그녀가 이끄는 더 엠시(M.C)의 탄탄한 연주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컴퍼니와 미국 스태프가 협업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소재로 만든 뮤지컬은 오히려 한국적인 것에 대한 강박관념을 넘어서며 또 다른 창작뮤지컬의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앞서 충무아트홀이 영국 작가 M W 셸리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창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 국내 창작진 만으로 같은 사례를 보여준 바 있다. '프랑켄슈타인'이 장르적 문법에 충실한 새 기준의 창작뮤지컬을 보여줬다면 '마타하리'는 마타하리의 정서와 감수성을 원동력으로 삼아 긴장과 이완을 조절해나간다. 

제1차 세계대전 중 2중 스파이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체포돼 총살당한 아름다운 무희 '마타하리'(마가레타 거트루이다 젤러)의 실화가 바탕이다. 마타하리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인 파일럿 '아르망', 마타하리에게 스파이가 될 것을 제의한 프랑스군 대령으로 투철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지만 점점 그녀에게 이끌리는 '라두'의 이야기가 섞여 들어간다.

다만, 인물들의 감정에 기반해 이야기를 밀고 나가다보니 종종 이야기가 늘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빠른 무대 전환의 속도감을 쫓아가지 못하니 흐름에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대사에 감정의 힘을 실어주기 위한 음악인 '언더스코어'로 지루함을 덜어내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러닝타임을 덜어낼 필요가 있다. 25~27일 프리뷰의 러닝타임은 3시간 가량이었다. 라두 대령의 아내 캐서린의 1막 솔로 넘버, 앙상블들의 무대 등을 덜어내며 10분 정도 줄였는데 조금 더 압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장면마다 무대를 중심으로 한 볼거리가 넘쳐 조정이 쉽지 않을 것로 보인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장면마다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덜어낼 장면을 쉽게 고르지 못할 정도"라고 말했다. 

마타하리의 지난한 인생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 라인은 따라갈 만하다. 어릴 때 자신을 겁탈한 삼촌, 하녀를 겁탈한 전 남편 등 남자에게 수차례 배신감을 느낀 마타히리가 아르망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연다는 설정은 사실 납득하기 힘들다. 그러나 뮤지컬 무대에서 남녀 간의 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마법 같은 순간으로 수긍이 된다. 사전에 노출되지 않은 아르망에 대한 또 다른 정보는 1막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와일드혼 특유의 한국 대중가요 같은 멜로디에 기반한 넘버는 무난하다. 36곡을 4년에 걸쳐 완성했는데 인도 지방의 음악, 아메리칸 재즈, 드뷔시 등 클래식음악을 아울렀다. 아르망과 라두 대령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표현한 '남자 대 남자', 마타하리가 1막에서 절규하는 '어딘가'가 특히 귀에 들어온다. 하지만 넘버들이 전체적으로 음이 높아 피로도가 쌓이는 흠이 있다.

이날 무대에 오른 배우들도 성공적인 프리미어의 공헌자다. '옥주현의 옥주현에 의한 옥주현을 위한' 수식이 나돌 정도로 옥주현의 마타하리는 기대를 모았는데 그녀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다. 1910년대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지난함을 표현한 이 뮤지컬에서 넘버마다 알맞은 연기력을 과시한다. 주요 라이선스 작품의 국내 초연을 도맡는 류정한은 역시 안정된 연기력을 선보인다. 자신의 욕망으로 마타하리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라두 대령에 품위를 부여한다. 하지만 바리톤 음역인 그가 너무 많은 고음을 소화해야 해서 후반으로 갈수록 목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가창이 종종 불안하기는 했으나 송창의는 순수한 아르망의 캐릭터에 덧 없이 어울렸다. 노래, 춤 뿐 아니라 잠깐 보여주는 연기력까지 갖춘 앙상블들의 실력이 탄탄한 점도 눈길을 끈다. 

임춘길이 맡은 MC, 즉 극의 해설자이자 사회자 역은 프리뷰 기간 호불호가 크게 나뉘었다. 마타하리에게 감정을 이입하는데 방해가 되는 등 사족이라는 것이 불호의 큰 이유였다. 작가인 멘첼은 "MC와 (마타하리의 물랭루주 무대의상 담당자인) 안나가 마타하리라는 인물을 만들어준 아버지, 어머니 같은 역"이라며 "마타하리 삶 자체가 연극적이었다. 현실과 공연이라는 경계선이 희미했는데 MC가 그녀의 인생을 이야기로 전달하는 것이 걸맞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날 초연에 '월드 프리미어'라는 수식을 단 이유는 '마타하리'가 해외 진출을 계획 중이기 때문이다. 앞서 '프랑켄슈타인'이 일본 진출을 확정했는데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소재로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가는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김준수·홍광호를 앞세운 라이선스 뮤지컬 '데스노트'로 흥행에 성공한 씨제스컬처는 첫 창작 뮤지컬로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바탕으로 한 '도리안 그레이'(프로듀서 백창주·연출 이지나·작곡 김문정)를 준비하고 있다. 

'마타하리'가 앞서 '명성황후' '영웅' 등 말 그대로 한국적인 뮤지컬로 해외 진출을 꾀한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험대에 올랐다. 


이날 초연에 '월드 프리미어'라는 수식을 단 이유는 '마타하리'가 해외 진출을 계획 중이기 때문이다. 앞서 '프랑켄슈타인'이 일본 진출을 확정했는데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소재로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가는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김준수·홍광호를 앞세운 라이선스 뮤지컬 '데스노트'로 흥행에 성공한 씨제스컬처는 첫 창작 뮤지컬로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바탕으로 한 '도리안 그레이'(프로듀서 백창주·연출 이지나·작곡 김문정)를 준비하고 있다. 

'마타하리'가 앞서 '명성황후' '영웅' 등 말 그대로 한국적인 뮤지컬로 해외 진출을 꾀한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험대에 올랐다. 

3. [뉴시스][신진아의 이주이영화]꿈꾸는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 '대배우'

아동극 ‘플란다스의 개’의 파트라슈 역할 전문으로 20년째 대학로를 지키고 있는 성필(오달수)은 한때 극단 생활을 함께했던 설강식(윤제문)이 국민배우로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언젠가 대배우가 되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사 한 마디 없는 개 역할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자신의 꿈을 성원해주는 가족들마저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남편의 속내를 우연히 알게 된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버리고,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성필은 설강식이 주연하고 ‘깐느 박’(이경영)이 연출하는 새 영화 ‘악마의 피’ 사제 역할을 따내려 몸부림친다.  ‘천만요정’ 오달수가 무명배우로 나오는 ‘대배우’는 여러 사건이 겹쳐진 영화다. 무명배우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다가 배역을 따내기 위해 소동을 벌이기도 하며, 오디션을 거쳐 영화에 출연하나 삶이 늘 그렇듯 영웅이 되기란 쉽지 않다. 

무명배우가 유명배우가 되는 성공담이 아니여서 극적인 감동이나 대리만족의 즐거움은 크지 않다. 무명배우의 설움을 보여주는 초반부는 다소 구태의연하기도 하다. 하지만 삶의 페이소스가 영화를 관통하며 매순간 유머를 잃지 않는다. 뭔가 뭉클한 감동이 있고, 구석구석 소소한 재미가 포진해있다. 특히 ‘박쥐’를 패러디한 ‘악마의 피’ 촬영현장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알듯 몰랐던 영화판의 이면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서툰 배우 연기를 절묘하게 해낸 오달수의 연기는 생각할수록 놀랍다. 박찬욱 감독에게 빙의된 듯 열연한 이경영의 호연은 이 영화를 보는 큰 즐거움이다. 현실에서는 조연을 주로 맡는 윤제문이 극 속에서 주연을 연기할 때는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배우부터 감독까지 제작진의 삶이 투영돼 있는 진정성이야말로 이 영화의 최대 무기다. 다소 부족하고 모자란 점이 있더라고 예쁘게 봐달라는 인사에 무조건 화답하고 싶어진다.

윤제문이 연기한 설강식은 다들 아는 설경구, 송강호, 최민식 이름 석 자를 조합해 만들었다. 연극판에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지금의 자리에 오른 영화판 모든 배우들을 상징한다. 오달수도 그 중 한 명이다. 극중 깐느 박의 모델인 박찬욱 감독은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나 ‘공동경비구역 JSA'(2000)로 스타덤에 오르기까지 2편의 영화를 말아먹었다.

석 감독은 이제 시작이다. 그는 박 감독의 ‘올드보이’(2003)와 ‘친절한 금자씨’(2005) ‘박쥐’ (2009) 그리고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 조연출로 나름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하지만 영화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불안감에 휩싸였다고 한다. 영화는 늘 한 편씩 할 때마다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데뷔 준비에 들어가면서는 조감독 일을 할 수 없어 생활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가정을 꾸린 뒤로는 데뷔도 쉽지 않고 데뷔 이후 삶도 고단한 감독의 꿈을 접을까 고민이 컸다. 

‘대배우’는 석 감독이 10년 넘는 세월 숱한 갈등과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내놓은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닌 시작이다. 영화의 흥행 성적에 따라 차기작을 연출할 기회가 쉽게 혹은 어렵게 주어질 것이다. 그렇게 징검다리 건너듯 매 발걸음이 도전이고, 한 발만 헛딛어도 물에 빠질 수 있는 게 이 바닥의 생리다. 하지만 오랫동안 품어온 열정을 저버리기란 쉽지 않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오달수가 하나뿐인 아들의 연기를 모니터하는 장면이다. 이때 그가 보이는 기쁜 듯 부러운 듯 복잡 미묘한 표정은 지금 이 순간 재능을 타고 났는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그 누구보다 간절히 연기를, 연출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어쨌든 성필은 한때 온힘을 다해 그 배역을 원했고, 최선을 다해 도전했다. 

석 감독은 “어떻게 보면 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객관성을 잃을 때도 있었고 선배님들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오달수는 “아무리 자기 꿈을 좇아가고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자 지지고 볶더라도 결국엔 옆에 가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가족들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경영은 “무언가 자기가 원하고자 하는 꿈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온 모든 세대들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전했다. 

4. [이데일리][특파원의 눈]뉴욕의 소금 전쟁

영국이 설탕이 많이 들어간 제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설탕세’ 도입으로 시끄럽다면 미국 뉴욕은 소금 때문에 난리다. 뉴욕시가 소금과의 전쟁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짠맛에 관해서라면 한국인이 둘째가라면 서럽지만 사실 미국인도 만만치 않다. 미국인의 하루 평균 나트륨 섭취량은 3436mg으로 세계적으로 상위권에 속한다. 한국인(4027mg)의 나트륨 섭취에 근접한 수준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권장하는 하루 나트륨 섭취량은 2000mg이다. 미국심장학회(AHA)는 이것보다 더 엄격한 기준인 하루 1500mg을 넘지 않을 것을 권장한다.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 권장량의 두배 이상인 나트륨을 먹고 있는 셈이다. 미국인들도 한국인 못지않게 짠맛을 좋아한다.

심지어 단맛이 포인트인 햄버거 가게에서도 테이블마다 소금과 후추를 놓아둔 곳이 적지 않다.(햄버거에 소금을 뿌려 먹으면 느끼함이 덜하고 맛이 한결 좋아진다.)

급기야 뉴욕시는 ‘소금 경고 표시제’라는 걸 도입했다. 올해부터 15개 이상 체인점을 갖춘 대형 음식점은 나트륨이 2300mg이상 함유된 메뉴 이름 옆에 소금통 그림이 그려진 경고 모양을 의무적으로 부착하도록 한 것이다. 

나트륨 2300mg이라는 기준은 WHO의 하루 권장 섭취량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메뉴마다 ‘당신이 이 음식을 먹으면 하루동안 먹어야 할 나트륨 소비를 초과해 섭취하는 겁니다’란 경고를 붙이라는 뜻이다. 

뉴욕시는 식당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두지 않았다. “경고 표시는 반드시 하얀색 삼각형에 검은색 바탕이어야 하고 메뉴 글씨와 똑같은 크기여야 한다. 경고 표시는 반드시 눈에 두드러지게 표시돼 있어야 한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소금 경고를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식당엔 벌금 200달러(약 23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자 뉴욕 식당 메뉴판은 그야말로 소금 경고로 도배될 지경이다. 어떤 식당은 메뉴판의 80% 정도에 소금경고 표시를 부착해야 했다. 대체 뭘 먹으라는 거냐는 푸념이 나올 정도다. 

뉴욕의 식당들도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미레스토랑협회는 “이러다 뉴욕의 식당이 모두 망하겠다”며 뉴욕시위생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금 경고를 둘러싼 소송전은 엎치락뒤치락이다. 뉴욕주 법원은 지난달 “뉴욕시가 제정한 소금경고 표시 의무화제 시행을 중단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뉴욕시의 손을 들어줬다. 빌 드블라지오 뉴욕시장은 “너무 많은 뉴욕 시민들이 고혈압의 위험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대량의 나트륨 함유를 경고하는 표시는 분명 시민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시민들의 건강을 지키도록 판결을 내려준 대법원 결정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며칠 후에 판결이 뒤집혔다. 뉴욕시가 소금 경고 조치를 잠정 중단하도록 미국 연방 항소법원이 결정한 것이다. 전미레스토랑협회는 성명을 통해 “뉴욕시의 전례 없고 불법적인 조치에 대해 연방법원이 잠정 중단을 결정할 걸 환영한다”는 입장을 냈다. 뉴욕시는 법적 판단이 최종적으로 내려질 때까지 벌금 부과는 하지 않기로 했다. 

짜게 먹는 게 몸에 해로운 건 틀림없다. 소금 섭취를 하루 1~3g만 줄여도 혈압약을 먹는 것보다 효과가 좋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핀란드에서는 30년 동안 나트륨 섭취량을 3분의1로 줄였더니 평균 수명이 5년 연장됐다는 발표도 있었다. 뭐든지 과한 건 좋지 않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뉴욕 식당들이 과연 뉴욕시의 소금 경고 표시 조치를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5. [서울신문][공희정 컬처 살롱] 사랑, 너마저

다시는 잎이 돋지 않을 것 같던 나무에서 연둣빛 새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볕 좋은 담벼락에는 노란 개나리가 방긋방긋 입을 벌리고, 솜털 보송한 목련도 만개할 준비를 마쳤다.

미처 떠나지 못한 겨울이 바람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하늘거리는 옷 입고 설레는 마음 살짝살짝 보여 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할 시절. 그래서일까, 가상일지라도 달달한 연애 프로그램에 자주 눈길이 머문다.

가상 연애 프로그램이 처음 등장한 것은 8년 전쯤이다. 가상현실이 익숙하지 않았던 때이다 보니 보는 시청자도, 보여 줘야 하는 출연자도 어색했다. ‘연애에 대한 공감과 결혼에 대한 설렘’을 보여 주기에 적합한 미혼의 젊은 연예인들이 가상 부부가 돼 출연했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물리적 거리도 가까워졌다. 그 모든 순간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달됐다. 가끔은 이 사람들 진짜 결혼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얼’했다.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 된, 또는 혼기를 한참 넘긴 중년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가상 결혼 프로그램도 있다. 사랑의 아픔을 알고 있는 그들은 새로운 사랑 앞에 조심스러웠다. 사람들은 혼기를 놓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에도 무감각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가슴 설레는 사랑을 꿈꾸는 건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임을 이들은 보여 주고 있다. 가상 부부인 40대 개그맨 커플은 시청률 7%를 넘으면 실제로 결혼하겠다고 공약을 내걸었다. 그 덕분인지 시청률은 꾸준히 상승해 5%를 넘었다. 정말 7%를 넘으면 이들은 결혼할까?

밀고 당기는 사랑의 현장을 보여 주는 가상 프로그램도 있다. 일명 ‘싱글 중년 친구 찾기’. 출연자는 한때 대중들의 마음을 홀딱 뺏어 갔던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가수나 배우들이다. 팽팽했던 젊음은 세월따라 가버렸고, 아무리 화장을 해도 숨길 수 없는 주름과 탄력 잃은 피부 때문에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자신만만했다.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한때 스타들은 좁고 허름한 시골집에 옹기종기 모여 밥을 해 먹고 설거지를 한다. 세수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고, 익숙하지 않은 집안일에 우왕좌왕한다. 엉성한 일상의 틈새를 뚫고 남자와 여자는 자신과 주파수가 맞는 상대에게 은근슬쩍 신호를 날려 본다. 짓궂은 웃음이라도 날아들면 어느새 얼굴은 발그레해진다. 밀고 당기는 현장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가상 연애 프로그램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오락이다. 기획에 의해 설정된 상황에서 주어진 캐릭터를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 주면 된다. 드라마와는 다른 현실감이 시청자들을 묘하게 유혹한다. 간혹 카메라 밖 그들의 실제 애정 생활을 보면서 프로그램 속 상대방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바람난 남동생 보듯 실망도 하지만 아무도 속이지 않았다. 가상을 현실로 오해한 것은 시청자다.

그래도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눈이 먼 것도 아닌데 사랑을 이렇게 상품화해도 될까 싶은 마음이 든다. 가상이 현실인 듯, 현실이 가상인 듯 천지 분간되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사랑마저 참과 거짓을 구분해서 봐야 하는 이 봄이 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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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늙은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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