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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올리는 자료로 상업적 목적은 없으며 선정된 사설의 정치적 성향은 블로그 운영성향과 무관합니다.
주요신문사설
[한국일보]
1. 헌재로부터 부실 판정받은 박 대통령 세월호 7시간 답변서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이 10일 헌법재판소에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 답변서를 제출했다. 국회가 헌법 10조에 규정된 생명권 보호의무 위반을 박 대통령의 탄핵 사유의 하나로 제시한 만큼 이번 답변은 헌재의 탄핵 여부 판단에 중요한 잣대가 된다. 하지만 “사고 수습에 적극적 노력을 했다”는 박 대통령 측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박 대통령 측이 헌재에 제출한 답변서는 15장 분량이지만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대리인단은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를 처음 인지한 것은 오전 10시께 국가안보실 보고라고 밝혔다. 헌재도 이날 변론에서 지적했듯이 참사 당일 오전 9시 직후에 TV 등을 통해 사고가 보도됐는데 왜 한 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첫 보고를 받았는지에 대한 해명이 없다.
지난 5일 변론에서 헬스트레이너인 청와대 윤전추 행정관이“당일 아침 관저에서 비공식 업무를 수행했다”고 밝힌 것과 무관치 않을 거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날 오후 2시50분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을 지시하고도 도착하는 데 두 시간 이상 걸린 경위에 대해서도 “경호상 기밀이라 얘기할 수 없다”며 빠져나갔다. 불리한 부분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은폐하고 있으니 헌재로부터 “답변서가 요구에 못 미친다”는 질책을 받는 게 당연하다.
박 대통령 측은 대면보고를 받지 않았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참사 당일 오전과 오후 안봉근ㆍ정호성 비서관의 대면보고를 받았다고 밝혔으나 구체적 시간과 내용은 적시하지 않았다. 김장수 국가안보실장과 오전에 두 차례 통화했다고 했지만 통화기록도 제시하지 않았다. 수십 차례 보고를 받고 지시를 했다고 장황히 나열했지만 정작 핵심 당사자로부터 어떤 내용의 보고를 받고,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참사 당일 관저 근무의 정당성을 강조한 것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박 대통령 측은 “청와대는 24시간 재택근무 체제이며,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도 관저 집무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과 전후나 휴일 등에 관저에서 집무했던 대통령들과 평일 낮에도 관저에 자주 머문 박 대통령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와 같은 1분1초가 아까운 그 절박한 순간에 재택근무를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세월호 답변서를 통해 박 대통령은 최고결정권자로서 국민 생명 보호의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됐다. 수많은 어린 생명을 구하지 못한 자책 대신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행태가 뻔뻔스럽다. 그날의 행적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매일신문]
2. 여전히 풀리지 않는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
박근혜 대통령 측은 10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세월호 7시간 행적’ 답변서에서 “그날 공식 일정이 없었고 신체 컨디션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관저 집무실에서 근무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관저에서 보고받거나 전화로 지시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처리했으니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단이 제출한 답변서는 청와대가 지금까지 밝힌 내용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그동안 국민과 유족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7시간 미스터리’가 ‘단순한 관저 근무’였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답변서를 보면 ‘7시간 미스터리’가 일부나마 해명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궁금증을 키우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설명의 앞뒤가 맞지 않고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아 대통령의 행적을 완전하게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거기다 당일 관저 출입자의 명단이 설명과는 달랐고, 김장수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참모와의 통화 기록도 빠져 있다. 답변서를 받은 이진성 헌법재판관이 오죽했으면 ‘헌재 요구에 못 미친다’며 보완을 요구했겠는가. 헌재는 이 답변서를 탄핵재판의 기초자료로 삼기에는 부족한 수준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박 대통령 측이 지난달 22일 헌재로부터 답변서 제출을 요구받고 19일 만에 이런 수준의 답변서를 제출했다고 하니 아직도 뭔가 감추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시간이 충분했을 터인데 명쾌한 설명을 못 하는 것도 이상하고, 답변서를 부실하게 만든 것도 이상하다.
설령, 박 대통령의 주장대로 ‘관저 근무’가 사실이라면 진작에 국민과 유족에게 사과하고 진실을 알렸으면 될 일을 이렇게 큰 사건으로 키운 이유도 아리송하다. 2년여 동안 그날 행적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뒤숭숭할 정도였는데 대통령 체면이나 권위 때문에 이를 회피하고 모른 체 했다면 기가 찰 일이다.
박 대통령의 답변은 국민의 궁금증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국민은 304명이 희생된 그날,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권리가 있다. 박 대통령이 진실을 털어놓으면 될 일인데 그럴 가능성은 없는 것 같고, 특검을 통해서라도 진실 규명이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3. 대책도 없이 '위안부 합의' 파기하겠다는 야당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10일 국무회의에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상황 악화를 가져올 수 있는 언행은 자제하는 게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는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한 일본의 무례한 외교 압박에 일침을 가한 것이지만 야당의 성급한 ‘위안부 합의 파기론’에 대한 우회적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다.
주한 일본대사와 총영사의 귀국 조치, 한`일 통화 스와프 협상 일시 중단, 한`일 고위급 경제 협의 연기 등 일본의 전방위적 외교 압박은 상식을 넘었다. 10억엔 출연을 위안부 소녀상 철거의 조건이라고 억지를 쓰기 때문이다. ‘위안부 협정’에서 우리 정부는 ‘철거’를 약속하지 않았다.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했을 뿐이다. 소녀상 문제는 말 그대로 양국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해야 할 문제다.
일본의 이런 생떼에 대해 우리는 냉철하게 대응해가야 한다. 흥분해서 분기탱천(憤氣撑天)하면 당장은 속이 시원하겠지만 얻을 것은 별로 없다. 이는 정부 측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차기 대선을 겨냥해 마구잡이로 국민감정을 부채질하는 야당도 새겨들어야 한다.
야당의 반응은 일본만큼이나 유치하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소녀상에 딴죽을 거는 아베에게 10억엔을 돌려주라”고 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기존 합의는 무효”라고 했다. 국민의당 장진영 대변인은 “정부 간 공식 협정이 아니라 양국 외교장관이 서명한 문서에 불과해 차기 정부를 구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모두 합의를 없었던 일로 돌리자는 것이다.
국가 간 합의라도 잘못된 것이라면 파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폭풍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외교 미숙’일 뿐이다. 국가 간 합의를 지키지 않는, 믿을 수 없는 국가로 찍히게 된다. 야당은 호기롭게 합의 파기를 얘기하지만 이런 사태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다. 그저 대선에서 표를 얻으려는 포퓰리즘 경쟁에 몰두할 뿐이다. 수권(受權)을 바란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국민감정을 어루만지되 냉철한 현실 감각도 갖춰야 한다.
[세계일보]
4. 헌재로부터 "질질끌지 말라" 경고 받은 박 대통령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어제 탄핵심판 사건 3차 변론기일에서 “앞으로는 시간 부족 사유로 입증이 지연되는 일이 없도록 양측 대리인이 각별히 유념해 달라”고 요청했다. “양측 대리인에게 의문점 설명을 요구했고, 개별적·구체적 증거 설명과 의견 제시를 수차례 촉구했으나 일부분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그에 대한 설명이나 의견을 밝히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 측의 비협조와 시간끌기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박 대통령 측은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7시간 행적’ 답변서에서도 보완 요청을 받았다. 이진성 헌법재판관은 어제 “답변서는 상당 부분 대통령이 주장하는 세월호 참사 당일 보고 지시에 대한 것만 기재돼 있다”고 지적했다. 헌재의 기대 수준에 현격히 못 미치는 답변이라는 것이다. 답변서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적 모순을 드러냈다. 중앙재해대책본부 방문이 지체된 이유에 대해선 ‘경호상 비밀’이라며 장막 뒤로 숨었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헌재의 거듭된 출석 요구에도 불응으로 일관했다. 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안봉근 전 비서관은 아예 소식을 끊고 잠적했다. 증인이 출석하지 않으면 헌재의 진실 규명은 어려워지고 탄핵심판 일정도 지연될 수밖에 없다.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 대통령이 진실 규명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납득할 수 없다. 일부 재판관들의 퇴임을 고려해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전략이라면 국민의 반감만 부를 뿐이다.
헌재의 대통령 탄핵 결정은 신속하고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국정농단으로 혼란에 빠진 정국을 조속히 수습하는 길이다. 대통령이 헌재 심리에 협조하는 것은 헌정 질서 수호자로서 당연한 책무다.
[서울신문]
5. 청문회 위증 등 35명 고발, 처벌 선례 남겨야
‘최순실 청문회’가 끝났지만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주요 증인들이 출석을 거부하고 위증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결국 진상 규명보다는 불신감만 키운 청문회였다. 열릴 때마다 이런 문제로 큰 소득도 얻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리는 청문회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이른바 ‘최순실 청문회’는 7차 청문회를 끝으로 그제 막을 내렸다. 청문회가 시작될 때만 해도 최순실씨 모녀와 국정 농단 관련자들이 대거 증인으로 채택된 데다 특검수사까지 맞물려 어느 청문회보다 국민적인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진상을 규명하고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기대감보다 상실감만 더 크게 안겨 줬다.
재벌 총수 9명이 증인으로 출석한 1차를 제외한 2차부터 7차 때까지 상당수 증인이 출석조차 하지 않은 맥빠진 청문회가 계속됐다. 더구나 최순실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정호성 전 비서관 등 핵심 증인들이 출석을 거부하고 출석한 증인들조차 부실한 답변으로 일관해 ‘맹탕 청문회’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동안 증인이 청문회 출석을 거부하거나 위증을 해도 고발을 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처벌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제재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다. 청문회 위증은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으로 형법의 위증죄보다 형량이 무겁다. 출석 거부도 국회 모욕죄를 적용할 수 있다. 국회는 이번에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줬다. 국조 특위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비롯한 35명을 국회모욕죄와 위증죄로 고발하기로 의결한 것이다. 사법부도 이들에게 엄한 처벌을 내리는 선례를 남겨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청문회에서의 위증과 불출석을 막을 수 있다.
국회의원들의 태도 또한 문제가 많았다. 출석을 거부한 증인들이 수감된 구치소까지 찾아간 열의는 인정한다 해도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준비 과정은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증인들에게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거나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면박주기식 막말과 호통, 자기주장만 쏟아냈다.
청문회의 목적은 핵심 증인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있다. 미국처럼 증인에게 증언 요지를 제출토록 하거나 전문성을 갖춘 조사관들도 청문회 위원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더이상 청문회 무용론이 불거지지 않도록 국회는 선진국의 제도를 참조해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데 머리를 맞대기 바란다.
6. 中의 방공구역 침범, 정부 대응 너무 소극적이다
중국의 군용기가 그제 제주 남쪽 이어도 부근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수차례 침범했다고 합동참모본부가 어제 밝혔다. 중국 군용기가 들어온 지역이 한국과 중국, 일본의 방공식별구역과 겹치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우리 측에 가해지는 중국의 각종 보복 조치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군사적인 행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중국 군용기의 비행항로를 보면 대마도 남쪽 대한해협 상공을 통과해 동중국해와 동해 사이를 왕복했다는 점에서 사드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은 물론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에 대해서도 경고성 메시지를 날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KADIZ에 들어온 군용기는 중국군의 훙(轟·H)6 폭격기 6대와 윈(運·Y)8 조기경보기 1대, 윈9 정찰기 1대 등 10여대로 우리 공군도 F15K 전투기 등 10여대를 발진시켜 대응 출격을 했다. 합참이 밝혔다시피 우리 KADIZ로 들어오는 중국 폭격기가 소수였던 과거와는 달리 그제는 무려 6대나 동원한 드문 사례라는 점도 의심을 증폭시킨다.
우리는 중국 군용기의 KADIZ 침범이 지난해 7월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이 취해 온 서울안보대화 초청 거절이나 한국 국방대 안보과정 대표단의 중국 군부대 방문 불허 등 일련의 군사협력 중단 조치에 이어 발생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합참은 중국의 KADIZ 침범 의미를 축소라도 하려는 듯 “중국 군용기가 작년에 수십 차례 KADIZ로 진입했다”고 설명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중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KADIZ 침범이 갖는 의미를 군 당국이 부풀려서도 안 되지만 함부로 축소해서도 안 될 것이다. 또한 방공식별구역이 자국 영공으로 접근하는 군용기를 조기에 식별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의 선으로 배타적인 개념의 영공과는 구별된다고 해서 그냥 흘려 넘길 일도 아니다. 더욱이 정부와 군 당국은 한·중 간의 외교적인 상황이 미묘한 지금, 오전 10시에 발생한 상황을 발표조차 하지 않고 쉬쉬하다가 밤늦게 언론 보도가 나자 확인을 해 주고 다음날 브리핑을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지금은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진행되고 있어 국가 리더십이 일시적으로 공백이 된 비상 상황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내정을 비교적 잘 챙기고는 있다. 그러나 군사·외교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국민이 안심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안보 부서 장악력을 높여야 한다.
중국 측이 군용기의 방공식별구역 비행을 “자체훈련”이라고 했다지만 한국 겁주기인지를 정밀히 분석해 정말 그렇다면 강력히 대응해야 할 것이다. 황 권한대행이 위안부 소녀상을 둘러싼 한·일 갈등에 대해 “상황 악화를 가져올 수 있는 언행은 자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양측에 촉구한 점은 평가하고 싶다. 중국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는 게 권한대행의 역할이다.
[매일경제]
7. 특검 성과과시용 기업인 구속 수사는 자제해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박영수 특검이 삼성 최지성 부회장과 장충기 사장을 9일 소환해 10일 오전까지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했다. 조만간 이재용 부회장 소환 가능성이 점쳐지고 SK롯데 등 다른 기업으로 조사가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방침이 정해진 것이 없다는 특검 측 부인에도 불구하고 주요 기업인 몇몇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될 것이란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 소문은 뚜렷한 혐의에 근거하기보다는 "돈 준 쪽에서도 구속되는 사람이 나와야 수사의 구색이 갖춰지지 않겠느냐"는 다분히 정치적인 추론에 기반하고 있다.
만에 하나 특검 내부에 이 같은 기류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매우 위험한 접근법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관심이 높은 사건 수사에 있어 그 성과를 구속자 머릿수로 판단하는 문화가 있다. 잘못된 관행이다. 형사소송법은 피의자 인권 보호를 위해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법원 판결로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 구속영장은 도주나 증거 인멸 등에 대한 합당한 의심이 제기될 때에 한해 청구하는 것으로 유무죄 판단과는 직접적 상관이 없다. 어느 수사가 됐건 구속 수사는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특검 수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현직 기업 총수나 CEO들은 우리 사회에서 도주 우려가 가장 낮은 집단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모든 기반을 국내에 둔 그들이 도망갈 곳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앞서 검찰과 특검은 수사 선상에 있는 기업들에 대해 수차례 강도 높은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채증 가능한 증거는 이미 확보됐을 것이고 아직까지 증거 인멸을 우려한다면 그건 수사 부실을 자인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권력과 기업은 절대 갑을 관계로 설명된다. 기업은 권력의 요청을 거부하기도, 지원 대가로 직접적 반대급부를 요구하기도 어렵다. 이들에 대가성을 전제로 성립되는 뇌물공여죄를 적용할지 말지는 특검의 판단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무리한 영장 청구로 기업활동을 저해하는 것은 자제돼야 한다. 특검은 사실관계를 밝히고 그에 대한 처벌과 평가는 법원에 맡겨야 한다.
8. 걸핏하면 주변국 위협하는 중국은 대국 자격 없다
지난 9일 '훙-6(H-6)' 전략폭격기를 포함한 중국 군용기 10여 대가 제주도 남쪽 이어도 인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기습적으로 들어와 4~5시간 동안 날아다녔다. 우리 공군은 전투기 10여 대를 대응 출격시키고 중국 공군과의 핫라인을 통해 경고 메시지도 보냈다. 중국 군용기들이 동해의 일본방공식별구역(JADIZ)으로 날아가자 일본 자위대도 전투기 20여 대를 출격시켰다.
방공식별구역은 국제법상 영공 개념과는 다르다. 각국이 영공을 침범할 수도 있는 미상의 항공기를 조기에 식별할 목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어도 상공은 한·중·일 방공식별구역이 중첩돼 우발적 충돌이 빚어질 수도 있는 곳이다. 2013년 중국이 일방적으로 이어도를 포함한 항공식별구역(CADIZ)을 선포하자 우리도 이어도 남쪽까지 확장된 새 KADIZ를 발표했다.
지금까지 중국 군용기가 이곳에 진입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최신형 장거리 전략폭격기가 떼지어 날아든 건 처음이다. 중국 측은 이번 위협 비행에 대해 '훈련 상황'이라고만 밝혔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여러 목적을 지닌 고도로 계산된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자국과 대치하고 있는 미국, 동중국해에서 영유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일본,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반도 배치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을 상대로 한꺼번에 무력시위를 한 것이다. 한·미·일 동맹 강화 움직임에 맞서 판을 뒤흔들어 보려는 조치다.
중국은 이처럼 걸핏하면 힘 자랑을 하며 이웃나라들을 위협한다. 틈만 나면 남중국해 주변 국가들과 대만을 겁박하던 중국은 이제 미국이 패권을 잡고 있는 서태평양까지 항공모함을 진출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사드 배치를 트집 잡아 노골적으로 무역 보복 조치들을 취하더니 이제 한반도 주변 수역에 폭격기까지 보내며 은근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아시아의 평화와 협력을 위해 책임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되레 역내 안보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대국답지 못한 행동이다. 중국은 지금 같은 거친 무력시위가 오히려 장기적으로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해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9. 글로벌기업 끌어들이는 트럼프, 있는 기업도 옥죄는 한국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어제 국회에서 싱크탱크인 정책공간 국민성장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포럼에 참석해 재벌개혁 방안을 내놓았다.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경제 분야 공약을 발표한 셈인데 출자총액제한제 부활과 금산분리 강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지주사의 자회사 지분 의무소유 비율 상향 등 대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규제들이 다수 포함됐다.
문 전 대표는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문제점과 삼성을 비롯한 4대 재벌로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일부 공약은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소지가 있어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취지와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지나친 규제로 기업 경영에 지장을 준다면 그렇지 않아도 쪼그라들고 있는 고용 시장에 한파를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글로벌 기업을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는 법인세 대폭 인하를 공약으로 내건 것도 모자라 최근엔 자신의 트위터에 특정 글로벌 기업들을 거론하며 미국 밖에 투자하면 엄청난 국경세를 내야 할 것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미국 에어컨 업체인 캐리어와 포드가 공장 이전을 포기했고 피아트 크라이슬러는 미국 공장 증설에 총 10억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협박을 받은 도요타가 5년간 미국에 10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은 지난 9일 트럼프와 만나 100만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각종 규제로 기업을 옥죄며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막는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수출 부진과 내수 불황, 기업 구조조정 등으로 고용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지난해 말 9.9%까지 치솟은 청년실업률은 10%대 진입을 목전에 둘 만큼 심각하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려면 기업들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자를 막고 있는 규제들을 과감하게 풀어 기업들이 마음 놓고 신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개혁이나 정책도 일자리 창출이라는 최고의 복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재벌개혁을 이유로 기업들을 오히려 해외로 내몰고 고용 시장에 한파를 불러온다면 우리가 원하는 경제성장은 요원할 것이다.
10. 親文의 문자테러, 反文의 폭력행사를 개탄한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지지자들의 '문자테러'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이들은 문 전 대표를 비판하거나 정치적 입장이 다른 비문계 의원들을 향해 수천 통의 항의 문자를 보내고 욕설 의미가 담긴 18원의 후원금을 입금하는 등 집단행동을 벌이고 있다. 여야 의원 가리지 않고 공격 대상을 정해 조직적으로 문자 융단폭격을 퍼붓고 있다.
김종인 의원이 "노인 죽을 날 얼마 안 남았다"는 막말 문자를 받았는가 하면 민주당이 펴낸 '개헌 저지 보고서'를 비판한 김부겸 의원은 3000개가 넘는 인신공격성 문자테러에 시달린 끝에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기까지 했다니 어이가 없다. 민주주의 실현을 내세우고 있는 공당 지지자들의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극도로 선동적이고 비이성적이다.
이런 맹목적 지지는 '친문 패권주의'에 대한 반감만 키워 문 전 대표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뿐이다. 오죽하면 문 전 대표 열혈지지자들을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 탈레반에 빗대 '달레반'이라고까지 하겠는가.
이와는 반대로 경북 구미를 방문한 문 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25분간 발이 묶이는 일도 벌어졌다. 보수단체 회원들은 지난 8일 태극기를 흔들며 차량을 가로막고 "문재인 빨갱이" "탄핵 무효" 등의 구호를 외쳤다. 차량에 발길질을 가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개탄할 만한 장면이다.
문 전 대표 측은 이에 대해 "우리가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적폐이자 구악"이라며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폭력 행위는 마땅히 엄벌해야 한다. 하지만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규정짓고 비난과 폭력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는 점에서 '친문의 문자테러'나 '반문의 폭력행사'는 '오십보백보'다. 국내 정치에서 몰아내야 할 적폐라는 점에서 둘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조기대선이 확실시되면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우상화하고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맹목적 추종세력들이 목소리를 키우고 있어 심히 걱정스럽다. 소위 '○○빠' '○○사모' 등 광신도적인 지지자들의 집단행동은 패권주의를 강화시켜 한국 정치에 독이 될 게 뻔하다. 대선주자들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패권주의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주요신문칼럼
1. [매일신문][매일춘추] 마흔, 꿈을 꾸다
어느 날 문득, 현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의 잔해들이 먼지처럼 일었다. 먹는 것과 숨 쉬는 것, 자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모든 삶에 의심이 생겼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 걸까. 두려웠다. 막막했다. 오래된 병이 서서히 뼈와 살에 깃들 듯 내면이 조금씩 분열하고 있었다. 가족을 사랑했지만 버거웠다. 허무했고 어디론가 내달리고 싶은 격정이 들끓었다. 너무 빠듯하고 조급했다. 무언가를 빨리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삶의 여유를 잠식했다. 솔직하게 이빨을 드러내는 감정에 적잖이 당황했다.
마흔에 찾아온 몸살은 낯설고 지독했다. 밥벌이의 절박함, 돈에 휘둘리는 사람들, 나도 똑같았다. 익숙해진 채, 꿈도, 희망도 뒷전으로 밀쳐두고 서서히 잊고 있었다. 무기력한 삶은 괜찮은 척하는 나를 거침없이 공격하고 흔들어댔다. “엄마는 꿈이 뭐야?” 아이의 질문에 서러우면서도 한없이 고마웠다. 밀쳐둔 꿈에서 오래된 냄새가 났다. 온몸의 진액을 쥐어짜며 지독하게 앓았던 꿈, 거짓과 계산 없이 좇아가던 꿈을 나는 언제부턴가 묵인했고, 치밀하고 정확하게 현실에 스며들어 생존해야만 했다.
구멍 뚫린 가슴으로 닿을 듯 말 듯한 꿈들이 들락거렸다. 도시의 최면에서 눈을 떴다. 도시는 더 이상 꿈의 도시가 아니었다.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 일었다. 헤매기 시작했다. 꿈도 야망도 기계화시키는 허무한 도시, 더는 버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작정 연고도 없이 동해를 건넜다. 그러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생떼를 쓰는 나와 그런 엄마를, 아내를, 며느리를 애써 이해하려 했던 가족들.
울릉도에 정착한 어느 밤, 마음이 가벼워지고 비로소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에 투영된 민낯이 낯설지 않았다. 미친 듯 걷고, 혼자 말을 하고, 비를 맞고, 그리고 웃었다. 가슴 밑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유연하고 투명한 태초의 웃음. 그리고 힘겹게 달려온 시간을 기억하며 꿈을 꾸었다. 바다를 끼고 몽환적이고 신기루 같은 꿈을. 성큼성큼 꿈속으로 걸어가 묵은 숙제를 하듯 몰아의 경지를 탐닉했다. 요정이 되어 바다 위를 날고, 알 수 없는 전설의 사회에서 공주가 되거나,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는 무사가 되기도 했다. 사무치고 사무쳐 가슴 서늘한 비움의 사색 속에 나는 오늘이 진정 아름다웠다.
허황한 꿈이면 어떠랴. 주어진 몫의 오늘이 기묘하고 애틋하게 바닷바람에 펄럭인다. 나는 오늘도 꿈을 향해 고독하지만 의연하게 순례의 길로 들어선다. 이상향이 존재할 것만 같은 간절한 오늘. 너른 바다를 끼고 나는 또, 현재진행인 꿈을 향해 하루를 시작한다.
2. [서울신문][고전으로 여는 아침] 스파르타의 자녀 교육법
금쪽같은 자식 앞에 딸 바보, 아들 바보 아닌 부모가 어디 있으랴. 부모의 내리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변함없다. 고대 그리스의 강소국 스파르타인들의 자녀 사랑방식은 다른 나라와 많이 달랐지만, 애틋함은 동일했다. 그들은 자기 자식들을 개개인의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국가 공동의 자식처럼 키웠다.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자녀를 공동의 자산처럼 여겼던 것이다. 아이들이 ‘공공재’(?)라는 이런 인식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테네의 장군이자 저술가인 크세노폰(BC 430?~355?)이 쓴 ‘라케다이몬 정체’에는 스파르타 시민들의 독특한 교육법이 나온다. 이들이 자녀를 공동체의 공동 자식으로 여긴 이유는 자기 자식과 남의 자식을 동등하게 대하도록 함으로써 시민들의 우애를 북돋우고 서로 어떤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인식으로 자식들을 대하는 사회문화가 만들어지자 다른 이의 자식에 대해서도 자기 자식을 가르치는 듯 훈육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자기 자식이 밖에서 누군가에게 얻어맞고 들어왔다고 해 보자. 우리나라 부모들의 전형적 대응 태도는 ‘왜 얻어맞고 다니느냐’고 나무라면서, ‘너도 상대를 한 대라도 때리고 왔어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아이들을 다그치는 게 예사일 터다.
그런데 스파르타인들의 대응 방식은 우리와 매우 달랐다. 한 아이가 두들겨 맞고 와서 부모에게 일러바치면, 부모들은 오히려 그 고자질한 잘못을 들어 자기 자식을 더 두들겨 패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스파르타 시민 누구나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그릇된 짓을 시키지 않는다는 믿음을 모두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스파르타 시민들은 미래의 전사, 미래의 어머니가 될 아들딸들을 강인하게 키웠다. 남자의 신체가 유약해지는 것을 경계하여 가혹해 보이는 습관들에 익숙해지게 했다. 어려서부터 맨발로 다니도록 하여 발을 단련시켰고, 추위나 더위에 잘 견디도록 일 년 내내 옷 한 벌로 나도록 했던 것이다. 또 아무 음식이나 잘 먹을 수 있도록 허기를 채울 정도의 소식을 습관화시켰다.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달리기와 씨름 등 운동을 시켰다. 부모가 모두 튼튼해야 건강한 아이가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자들은 8세부터 20세까지 의무 집체교육인 아고게(Agoge)에서 공동숙식하며 체력단련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왕이나 귀족의 자식도 시민들과 똑같이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내 자식만은 특별하게 키우겠다는 욕망은 자칫 내 자식을 위해 남의 자식을 부당하게 배제하는 불공정과 반칙에 둔감하게 만들 수 있다. 또 부모가 부와 권력의 힘으로 자녀가 무엇이든 쉽게 이루도록 해 주는 것은 참으로 그릇된 교육이다.
3. [중앙일보][시선 2035] 배려는 됐고, 돈으로 주세요
넉 달 전 방송한 코바코의 저출산 공익광고 ‘아이의 마음’편은 ‘출산지도’ 논란의 전조곡이었다. 광고는 임산부를 어린아이로 묘사한다. 미래의 아이를 위해 임산부를 배려하란 취지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일찍 퇴근을 시켜주고, 자리를 양보해 주고, 무거운 짐을 들어 주는 ‘배려’를 베풀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반발은 컸다. 여성을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아이를 낳을 존재로만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비판만큼이나 나는 광고 카피가 마음에 걸렸다. “엄마가 되는 기쁨, 모두의 배려에서 시작합니다. 당신의 배려를 보여주세요.”
‘배려’란 단어가 걸쩍지근하게 전두엽에 남아있는 사이, 1년째 여행 중인 핀란드 기자와의 대화에서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5월 즈음에 돌아가면 여름휴가 대체근무가 쏟아지기 때문에 당장은 굶을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 대체 인력이 보편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름휴가 때문에 대체 인력을 고용한단 얘기는 가물가물했다. “직원이 육아휴직을 하거나, 병가를 내거나 휴가 시즌이 되면 회사는 대체 근무자를 고용하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구성원이 피해를 보잖아요. 한국은 그럼 육아휴직을 안 해요?” 핀란드인 에바에게 육아휴직은 대체인력 고용을 의미했다.
육아휴직의 장벽을 낮추는 건 직장 동료들의 배려가 아니다. 배려는 맨땅에서 생기지 않고 대가도 따른다. 업무 공백으로 일이 많아지면 불만이 쌓이는 게 사람이다. 선한 마음으로 이해하라는 주문은 먹히지 않는다. 쌓인 불만은 ‘여자들은 일을 안 한다’는 직장 신화와 낮은 평과 고과로 고스란히 돌아온다. 불만도 빚도 없는 ‘아름다운 휴직’은 회사와 정부가 추가 인력을 고용하거나 추가 업무만큼 수당을 줄 때만 가능하다.
어린이집 운영시간도 마찬가지다. 법적으론 저녁 7시30분까지 운영해야 하지만 어린이집은 오후 네다섯 시면 아이를 데려가라고 한다. 학부모들은 발을 동동 구르지만 8시간 치 월급밖에 못 받는 선생님들에게 ‘12시간 운영이 법’이라며 엄격하게 ‘직업정신’을 요구하진 못한다. 복지부는 매번 어린이집 단속에 나서겠다고 발표하지만 교사들에게 야간근무 보조금을 제대로 지급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럼 엄마들이 “7시30분이 법”이라고 먼저 당당하게 얘기하고 이들도 시간을 지킨다.
배려가 사람의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건 환상이다. 돈에서, 시간에서 나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은 돈과 시간의 곳간이 텅텅 비었다. 당연히 인심이 나기 어렵다. 고위 공직자들이 “국민들 의식이 문제해결의 걸림돌”라고 얘기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진짜 걸림돌은 개개인의 배려로 문제를 때워보려는 정부 아닐까.
4. [경향신문][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다] 붕어빵 할아버지
어릴 적 내 영웅은 짱가, 마징가, 태권V 따위였다. 이들 중 유일하게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태권V의 실체는 구체적이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눈에서 뿜어져 나온 레이저빔이 63빌딩에 반사되어 국회의사당을 비추면 둥근 돔이 열리면서 그가 등장할 거라고 했다. 꽤 오랫동안 63빌딩을 보며 발차기로 지구를 구할 거대한 존재를 떠올렸다.
허무맹랑하지만, 가슴 뿌듯한 이 판타지가 깨진 것은 우리 동네에 59층 아파트가 들어선 뒤였다. 배추가 새파랗게 자라고, 호박 넝쿨이 뻗치던 곳에 어느 날 우뚝 솟은 아파트의 위용에 익숙해지면서부터 63빌딩을 봐도 경이롭지 않았다. 그리고 정의를 수호할 존재에 대해서도 잊었다. 따지고 보면 고층 아파트 탓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더는 꿈꾸지 않게 되면서 판타지 세상은 멀어졌다.
하지만 꿈꾸지 않는 것도 나이 탓은 아니다. 59층 아파트 입구에서 붕어빵 포장마차를 하는 할아버지는 여전히 새로운 꿈을 품고 있었다. 교직에 있었다는 그는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과 영어를 가르칠 공부방을 열 생각이라고 했다.
단팥을 꼬리까지 꽉 차게 넣어주며 손님한테는 반드시 식지 않은 뜨거운 붕어빵만 판다는 그는 의기소침해 있는 청년들을 걱정했다. 나 같은 노인도 이렇게 하는데, 청년들은 못할 게 없다는 뻔한 말도 그의 형형한 눈빛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장 뜨거운 순간을 세상에 내놓아도 외면당하는 청년들의 현실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매번 다른 빛깔의 붕어빵이 나오는데, 더 구워지거나 덜 구워지는 것이 부지기수지요.” 그는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달궈져야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는지 모르는 것. 인생은 붕어빵 틀이 아니라 무엇이 될지 모르는 쇳덩이를 올려놓은 모루와 같다는 것.
우리 동네에는 태권V를 끌어낼 레이저빔 따위를 반사할 리 없는 고층 아파트가 있고, 그 아파트 아래에는 날마다 자신의 꿈을 달궈내는 붕어빵 포장마차가 있다. 그 포장마차 주인은 문제를 맞히면 한 개를 덤으로 준다. ‘붕어빵을 먹는 까닭은 ㄴㅁ이니까, ㅊㅇ이니까, ㄱㅇ이니까.’ 초성만 보고 낱말을 맞히면 된다.
5. [경향신문][송혁기의 책상물림] 거짓말과 개소리
맹자는 자신의 장점이 남의 말을 잘 아는 것이라고 했다. 말은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지만, 말이 그대로 그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음을 우리는 안다. 말을 아는 것 자체보다,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을 아는 것이 관건이다. 맹자가 경계한 네 가지의 말은, 편견에 치우쳐서 객관성을 잃은 말, 무언가에 지나치게 빠져들어서 절제하지 못하는 말, 못된 마음을 품어서 도리에 어긋나는 말,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본질을 회피하려는 말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옳음과 틀림, 진정과 거짓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맞으면 저건 틀리고, 어떤 말에 진정성이 있으면 거짓이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것과 저것 모두 맞을 수도 있고, 진정성만 있으면 맞고 틀리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현상이 팽배해지고 있다. 이런 추세를 가장 잘 이용하는 이들이 정치인들이다.
민생, 복지, 경제 민주화. 참 좋은 말들이다. 그런데 지향에 맞는 정책인지 따져 볼 겨를도 없이 자체 정합성마저 의심되는 말들이 진정성의 탈을 쓰고 호소된다. 겨냥했던 실체가 수시로 모양을 바꾸는 가운데, 이전의 기준과 방식으로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은 점차 무력해진다.
철학자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OnBullshit)>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짧지만 묵직한 통찰을 던지는 글이다. ‘개소리’는 터무니없는 허튼소리 정도의 의미다. 의도적인 거짓말의 경우 거짓임을 증명할 방법이 있고 책임도 요구할 수 있는 데 반해서, 신념에 가까운 ‘진정성’을 내건 개소리는 객관적인 분석으로 거짓을 입증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애초에 ‘아님 말고’ 식의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상대하기 더 난감하다. 치밀하게 꿰맞춘 거짓말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의도를 감추고 떠벌리는 개소리다.
맹자가 경계한 네 가지 말 역시 의도적인 거짓말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진정성이 있든 없든 간에, 그런 말을 내뱉는 이들이 정치에 참여해서 중요한 결정들을 내릴 때 많은 이들에게 치명적인 해로움을 끼치기 때문에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정치권력을 쥔 이들의 진정성을 문제 삼고 거짓말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이 연일 양산하고 있는 개소리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새로운 지혜와 전략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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