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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올리는 자료로 상업적 목적은 없으며 선정된 사설의 정치적 성향은 블로그 운영성향과 무관합니다.



주요신문사설


​[이데일리]

1. 아직도 ‘안전불감증’ 화재 사고인가

그제 오전 11시께 경기 화성 동탄의 메타폴리스단지 상가건물에서 불이 나 4명이 숨지고 47명이 다쳤다. 불은 4층짜리 상가건물 3층 264㎡ 넓이의 점포에서 철거작업 중에 일어났다고 한다. 동탄 메타폴리스는 66층의 초고층 주상복합건물로, 만약 불이 상가동에서 연결통로를 따라 주거동으로 번졌다면 자칫 엄청난 인명피해가 날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작은 점포 하나가 탔는데도 51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화재 현장에서 용접장비와 가스용기 등이 발견된 점을 들어 용접 도중에 불이 났을 것이라는 게 소방당국의 추정이다. 용접할 때는 분말소화기와 불티받이포 등을 비치하고 화기 감시자를 배치해야 하는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안전사고 예방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지는 화재 안내방송이나 경보음을 듣지 못해 대피가 늦어졌다는 일부 피해자들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점포 내부에 스티로폼 등 가연성 소재가 많아 불이 나자 유독가스가 순식간에 뿜어져 나왔다는 것도 늘 지적돼 온 문제점이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경보장치와 미흡한 유독가스 피해 대책 등이 인명 피해를 키운 셈이다.

지난해 11월 대구 서문시장에 이어 새해 들어서도 여수 수산시장에서 불이 나는 등 최근 화재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전통시장은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므로 일단 불이 나면 쉽게 잡을 수가 없다. 갈수록 늘어나는 초고층 건물도 마찬가지다. 화재진압 장비가 건물의 고층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데다 미관을 고려해 화재에 취약한 마감재를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화가 어려울수록 대형 참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2015년 120여명의 사상자를 냈던 의정부 10층짜리 대봉그린아파트 화재사고가 단적인 예다. 

그런 점에서, 동탄 메타폴리스 화재사고는 ‘인재(人災)’일 가능성이 크다. 안전수칙을 지키는 일은 불편하고 비용이 따른다. 하지만 편의성과 효율성만을 좇아 안전을 소홀히 하면 그 대가는 끔찍하다. 재앙이 닥쳤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안전불감증으로 피해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2. 박 대통령, 자꾸 부인만 할 것은 아니다

박영수 특검팀의 박근혜 대통령 대면조사가 다가오는 가운데 박 대통령 측이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에 대해 눈길이 쏠린다. 특검팀이 지난 3일 청와대 압수수색을 시도했다가 군사상 기밀유출 우려를 내세운 청와대 측의 거부로 불발된 상황에서 대면조사가 특검 수사의 정점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도 대면조사를 피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박 대통령 측이 특검팀의 공세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할 것이라는 분위기는 벌써부터 충분히 감지된다. 특검팀이 청와대 압수수색 영장에 박 대통령을 뇌물수수 및 직권남용 혐의의 ‘피의자’로 명시한 점을 놓고도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을 보장하는 헌법에 위배된다”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단 신년인사회에서나 보수성향 인터넷TV 인터뷰에서 밝힌 입장도 마찬가지다.

더욱이 특검수사 결과가 현재 고비를 향해 치닫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심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 측이 대면조사를 앞두고 다각적인 대응 논리를 마련하고 있는 이유다. 특검의 증거 제시에 그대로 밀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특검이 주장하는 사실관계나 법리 해석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박 대통령 측으로서 자기 입장을 내세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그동안 진행된 헌법재판소 심리와 특검 수사를 지켜보면서 박 대통령이나 이미 구속된 그 측근들에 대해 실망감을 감출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 자신에게 쏠리는 혐의를 벗어나려고 ‘모른다’, ‘아니다’는 식으로만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로 굳어진 블랙리스트 존재가 하나의 사례다. 서로 부인하다 보니 ‘확신범’은 없고 대부분 ‘파렴치범’으로 전락한 상태다. 차라리 “정부 시책에 반하는 작가들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한정된 재원에서 정부의 고유 권한”이라고 말하는 게 훨씬 떳떳할 뻔했다.

박 대통령도 무조건 ‘아니다’고만 할 게 아니다. 자기 스스로 임기 도중에 물러나겠다며 국회에 그 시기를 정해 달라고 했던 입장이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하지만 사실로 드러난 문제에 있어서까지 부인으로 일관해선 곤란하다. 그럴수록 자신의 입지는 좁아지고 나라꼴은 우스워지기 마련이다. 박 대통령의 정치철학에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에게도 실망감만 안겨줄 뿐이다.



[매일신문]

3. 소아청소년과 의사 집단 이기심에 갈 곳 잃은 어린이 환자

어린이 환자를 위해 야간`휴일에 진료하는 ‘달빛어린이병원’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올해부터 병원 지정 요건을 완화하고 진료비 수가를 크게 높였으나, 참여하려는 병`의원이 거의 없다. 참여 의향을 밝혔다가 막판에 철회하는 곳도 여럿이다. 그 이유가 개원의의 조직적인 반발 때문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달빛어린이병원은 2014년 처음 도입돼 전국에 11개 병원이 운영 중이고, 올해 7개 병원이 추가 지정됐다. 지난해 말 보건복지부가 사전 수요조사를 통해 최소 30개, 최대 40~50개 기관이 추가 지정될 것으로 전망한 것에 비해 초라한 결과물이다. 보건복지부가 이용자의 높은 만족도를 바탕으로 시`구`군별로 1개씩 지정하려 했으나, 서울과 경기`충북 등에서 일부만 추가하는데 그쳤다.



대구`경북에도 추가 지정된 곳이 없다. 기존에 운영 중인 대구 남구의 한영한마음병원, 경북의 김천제일병원 두 곳뿐이다. 보건복지부는 이 제도를 강하게 반대해온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의 조직적인 방해 행위 탓으로 보고 있다. 소아청소년과의사회는 ‘달빛어린이병원 확대로 동네 소아청소년과 의원이 몰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야간`휴일 진료비를 달빛어린이병원에만 지원하는 정부 정책은 오후 8시까지 야간 진료를 하는 소아청소년과 병`의원들과 형평성이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소아청소년과의사회의 항변은 이해할 만하지만, 국민 정서와는 전혀 맞지 않는 논리다. 아픈 아이 때문에 한밤중이나 휴일에 황급하게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은 경험이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의사들의 이기주의를 탓할 것이다. 마치 의사들이 야간 진료는 싫고, 환자는 빼앗기기 싫다는 식으로 보일 수 있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어느 때든 저렴한 가격에 전문의 진료를 받고 싶은 욕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달빛어린이병원은 취지와 목적이 좋은 제도다. 의사회가 더는 보건복지부와 대립하지 말고 개원의와 국민, 모두가 유리한 점을 찾아 협상에 나서는 것이 옳다. 의사회가 현재의 입장을 고수하다간 자칫 국민 건강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한다는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4. 사드 부지 제공 미루는 롯데, 중국에 만만하게 보일 뿐

한미 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를 한국의 차기 정부 출범 이전에 배치하기로 합의했으나, 부지를 제공하기로 한 롯데 측은 결정을 미루고 있다. 사드 배치 부지로 예정된 경북 성주 스카이힐골프장 소유주인 롯데상사는 3일 이사회를 열어 부지 제공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에 앞서 정부와 롯데는 성주골프장과 경기도 남양주 군용지를 맞교환하기로 합의했으며, 현재 정부는 지난달 상순에 나온 부지 감정 결과를 롯데 측이 승인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롯데 측이 부지 제공 결정을 미룬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국방부는 지난 1월 중으로 교환계약이 체결된다고 했지만 무산됐다. 롯데의 미온적 태도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은 국방부와 롯데 간의 부지 맞교환 합의 직후 중국에 진출한 롯데 관련 기업에 대해 세무조사와 위생`소방점검을 벌였다. 롯데로서는 이런 보복이 확대될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이번에 부지 제공 결정을 미룬 것 역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여기에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유력 대권주자들이 사드 배치에 반대하고 있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중국 내 사업이 차질을 빚을 수 있고, 유력 대권주자들의 사드 배치 반대 주장을 모른 체 할 수도 없는 노릇임은 이해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롯데 측의 이런 행태는 하나를 지키려다 둘을 잃는 것임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정부와의 합의도 합의이다. 합의 이행은 가장 기초적인 기업 윤리이다.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기업은 아무도 상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에 우습게 보이는 길을 자초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방부와의 합의 미이행은 롯데를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기업으로 각인시킬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사드 부지가 제때에 제공되지 못했을 때 우리에게 몰아칠 후폭풍이다. 차기 정부 출범 이전에 사드 배치가 되지 않으면 사드 배치는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이는 기업의 이윤 논리에 국민의 생존권과 국가 안보가 희생당하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다. 롯데는 자신을 포함한 국민을 지킬 수 있는 국가가 있어야 장사도 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서울신문]

5. 신축 건물서 경보기도 제때 안 울린 동탄 화재

지난 주말 대낮에 경기 화성 동탄신도시 랜드마크인 초고층 주상복합건물 ‘메타폴리스’ 부속 상가에서 불이 나 50여명의 사상자를 낸 것은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안전불감증이 빚은 참사일 공산이 크다. 메타폴리스는 최고 66층(248m)의 건물로 1266가구가 살고 경기 남부권 최대 복합쇼핑몰이 들어선 곳이다. 게다가 준공된 지 6년 4개월밖에 되지 않은 건물이다. 우리나라에서 몇 되지 않는 이런 초고층 신축 건물에서 불이 났다는 사실이 우선 어이없고 안타깝다. 만에 하나 더 큰불로 번졌더라면 어찌 됐을까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현장에서 용접 장비와 가스 용기가 발견된 점으로 미뤄 내부 철거공사 용접 과정 중 불꽃이 가연성 소재로 튀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한다. 2008년 12월에도 경기 서이천물류창고에서 용접 작업 도중에 불꽃이 가연성 소재에 옮겨붙어 8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를 경험한 적이 있다. 2014년 5월 70여명이 사상한 경기 고양터미널 상가 화재 역시 용접 작업을 하다가 불씨가 천장 가연성 소재에 옮겨붙어 발생한 사고였다. 언제까지 후진적 안전관리로 인한 참사를 두고 봐야 하는가.

안전관리 강화는 윗선에서 아무리 외쳐 봤자 현장 근로자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공염불일 뿐이다. 더구나 규모가 작은 공사에는 원가절감 차원에서 안전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무자격 일용직 노동자를 현장에 투입한 사례가 적지 않다. 현장 근로자의 안전관리 감시 소홀로 발생한 화재에 대해서는 책임자를 가중 처벌하는 쪽으로 법과 제도를 과감히 손질해야 한다.

메타폴리스 화재 현장에서 제때 대피 안내방송이 안 나오고 경보음이 울리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밖에 검은 연기가 퍼지고 엘리베이터 내부에 검은 연기가 가득 찼는데도 불이 난 지 10분이 지나도록 경보음이 울리지 않았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메타폴리스 측이 정상적인 소방시설을 갖추고 영업을 했는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메타폴리스는 과거 화재 감지가 안 되는 ‘불량 불꽃감지기’를 설치해 소방당국으로부터 교체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교체 했는지 여부는 조사를 통해 확인해야 할 사안이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수도권과 부산 지역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의 방재 관련 시설에 대한 전면 재점검 작업이 이참에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6. 靑, 특검 대면조사 응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청와대 압수수색이 성사되지 못하면서 주말 내내 여론은 들끓었다. 청와대는 특검과 5시간이나 대치했고, 군사 기밀 보호를 사유로 끝내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빈손으로 돌아서는 특검을 보면서 조속한 진상 규명을 기대했던 많은 국민들은 허탈해했다. 압도적인 민심은 국정 기밀을 민간인 비선 실세에게 무방비로 넘긴 책임이 청와대에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청와대가 국가 안위를 사유로 정식 영장을 발부받은 특검을 가로막은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특검은 청와대 압수수색 영장의 유효 기간을 오는 28일로 전례 없이 길게 받아 놓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혐의 입증에 강도 높은 압박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특검은 즉각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압수수색 승낙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기대하는 답변을 얻기는 어렵다. 상황이 이러니 여론의 관심은 이번 주 후반으로 예정된 특검의 박 대통령 대면조사로 쏠릴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놓고 민심은 더 뒤숭숭하다. 특검의 수사에 비협조적인 청와대의 일관된 태도로 미뤄 봐서는 대면조사인들 제대로 응할 것인지 의심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진상을 하루빨리 밝혀 국정의 안정을 되찾으려면 특검의 수사 일정이 순탄하게 진행돼야만 한다.

특검의 수사는 다음달 13일 이전에 결론이 날 공산이 커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검의 전방위 압박에 박 대통령이 위기감을 크게 느끼고 있을 것은 당연하다. 설 연휴를 앞둔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억지로 엮은 것”이라며 수사의 부당함을 재차 주장했었다. 그 억울함을 입증해 보일 지름길은 청와대 압수수색을 부분적으로라도 당당하게 특검에 허용하는 것이다. 뒤질 테면 어디 한번 뒤져 보라는 선명한 태도를 지금이라도 보이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지 않고서 박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특검의 조사에 지체 없이 임하는 것뿐이다. 장외에서 밑도 끝도 없이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말만 자꾸 하지 말고 움직일 수 없는 반박 증거와 법리로 특검의 주장을 꺾어 보길 바란다. 청와대 압수수색을 원천 봉쇄했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 얻은 것은 없다. 현실적인 부담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이달 말 종료되는 특검을 연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당장 커지고 있다. 아예 국회가 특검법을 개정해 연장하자는 주장도 있다. 국정 혼란을 질질 끌어서는 박 대통령의 설 자리도 점점 좁아진다.



[세계일보]

7. 박 대통령, “특검 조사 받겠다” 약속 성실히 이행해야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진실 규명에 미온적이었다. 지난해 검찰의 압수수색과 조사에 불응했고, 지난주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청와대 압수수색도 거부했다. 특검이 압수수색 재시도를 거론하고 있지만 청와대가 거부하는 한 성사되기 어렵다.

특검은 오는 9∼10일 중 박 대통령 대면조사를 위해 일정과 장소를 조율하고 있다고 한다. 조사 장소는 청와대 인근 안가, 연무관, 삼청동 금융연수원 등이 후보로 꼽힌다. 현직 대통령이므로 경호와 예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수사에서 드러난 혐의를 규명하는 엄정한 조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특검은 미르· K스포츠재단 출연금을 거두고, 삼성이 최순실씨를 지원하도록 한 혐의(제3자 뇌물수수 및 뇌물수수),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혐의(직권남용) 등에 대해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이번 특검 조사만은 거부해선 안 된다. 진실을 밝힐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특검과 검찰에 구속된 대통령의 측근, 참모, 현 정부의 장·차관 출신이 10명에 가깝다. 이것만 해도 대통령으로서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 최씨는 문화·체육계뿐 아니라 외교관 인사까지 주무른 것으로 특검 조사에서 드러났다. 국정이 불·편법과 비정상으로 운영됐다는 방증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기자간담회와 인터넷TV를 통해 “거짓말로 쌓아 올린 거대한 산이고 엮어진 것”이라며 의혹을 부인했다. 대통령의 말대로 거짓이 산처럼 쌓였다면 특검이든 헌법재판소든 공적인 장소에 나와 소상히 진위를 밝히는 게 옳다.

헌재의 탄핵심판 결정이 이달 말 혹은 3월 초 내려질 것으로 전해지면서 찬반 시위는 더욱 거칠어지고 있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탄핵정국의 후유증이 예상되는 엄중한 상황이다. 양측이 충돌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최씨 농단사태의 전모를 털어놔야 한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박영수 특검을 임명하면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본격적인 특검수사가 시작되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특검의 직접 조사에도 응해서 사건 경위에 대해서 설명할 예정”이라고 악속했다. 당시 “특검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사건의 모든 진상이 밝혀지고 책임이 가려지길 희망한다”고 밝힌 만큼 진위가 명명백백하게 가려지도록 적극 협조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약속과 희망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8. 중국, 유엔 대북제재 ‘뒷문’ 열어놓고 사드 비판하나

개성공단 폐쇄와 유엔 대북제재에 직면한 북한 경제가 예상과는 달리 호조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이 ‘KDI북한경제리뷰’ 1월호에 게재한 ‘총괄: 2016년 북한경제 동향 평가와 설명 가설’에 따르면 지난해 북·중 무역 규모는 58억3000만달러로 전년보다 7.3% 늘었다. 2014, 2015년에 감소했던 북·중 무역이 지난해 증가세로 돌아선 것이다. 북·중 무역은 북한 대외무역의 90%를 차지한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지난해 연초부터 제4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강력한 대북제재에 돌입했다. 우리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 결정을 내렸고 미국과 일본도 독자 제재에 나섰다. 북한 경제가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실상은 거꾸로였다. 

지난해 대중 수출은 6.1%, 대중 수입은 8.3% 증가했다. 대중 수출을 견인한 것은 대북제재의 핵심인 무연탄 등 지하자원 품목이었다. 무연탄 수출의 경우 대북제재가 실시된 지난해 중반에 잠시 주춤하다가 하반기에 빠르게 늘었다. 대북제재가 북한의 대외 상품교역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이 대북제재 시늉만 낸 채 뒷문을 활짝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중국은 북한 위협에 맞선 한반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에 협박과 경제 보복을 서슴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는 한민구 국방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연내 사드 배치에 합의하자 묵과하지 않겠다는 경고성 발언을 쏟아냈다. 루캉 외교부 대변인은 3일 “우리는 한·미의 사드 배치 추진이 중국의 국가 전략 안전과 이익을 파괴하며 지역 전략 균형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 문제 해결과 평화, 안정에 도움이 안 된다”고 압박했다.



관영매체인 환구시보는 “이대로라면 한국이 미국의 바둑돌로 전락할 것이고, 이는 한국인은 물론 동북아의 비극이 될 것”이라는 막말까지 했다. 통일연구원에 따르면 작년 7월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한국을 겨냥해 취한 보복성 조치가 43건에 이른다. 경제에서 문화 교류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이다.

중국이 핵·미사일 도발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는 북한에는 뒷문을 열어주면서 자위권 차원의 사드 배치에 보복과 협박을 일삼는 행위는 명백한 이중잣대다. 한·중의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에 금이 가게 하는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중국은 사드에 딴죽을 걸기에 앞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부터 충실히 이행하기 바란다.



[서울경제]

​9. 정부의 ‘갑질 근절’ 일회성으로 끝나지 말아야

범정부 차원의 갑질 퇴치작전이 시작됐다. 정부는 지난주 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로 사회적 약자 보호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갑질문화 근절대책을 확정했다. 항공기 내에서 소란을 피우면 3년 이하 징역에 처하고 이유 없이 음주 후 아동·여성·장애인 등에게 폭력을 쓰면 구속 수사한다는 게 골자다.



프랜차이즈 본사가 가맹점에 원부자재 구매를 강요하거나 청년을 다수 고용하면 심층 조사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갑질이 경제·사회 전반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황 대행의 지적처럼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갈등을 키운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갑질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배금·물질만능주의가 왜곡된 행태로 표출된 병리 현상이다. 그만큼 완전히 뿌리 뽑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의미다. 사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열정 페이’ 논란이 식기도 전에 대기업 계열사가 아르바이트생을 상대로 수백억원의 임금을 떼먹는가 하면 ‘땅콩 회항’의 기억이 생생한데도 오너 2·3세의 난동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하청기업에 대한 원청업체의 횡포, 가맹점에 불리한 계약조건을 강요하는 프랜차이즈는 아예 뉴스 거리도 안 된다. 이러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지수가 일곱 번째로 높을 수밖에 없다.

만연한 갑질에 정부가 단기간 안에 일회성 조치로 대응하려 한다면 큰 판단착오다.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립서비스’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효과가 있으려면 좀 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관리 감독과 단속 같은 일회성 조치 외에 수직적인 대·중소기업 협력관계를 수평적으로 바꾸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를 줄여 갈등을 완화하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오너의 자녀라도 능력에 맞는 지위를 부여하는 공정하고 투명한 기업평가 시스템이 구축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매년 30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사회적 갈등 해소에 쏟아붓지 않아도 된다.



10. 원화가치가 올들어 세계 두번째 상승률이라는데

원화 환율이 수직 하락(원화가치 상승)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달러당 1,207원70전을 기록했던 원·달러 환율은 3일 1,147원60전까지 떨어졌다. 원화가치가 불과 한달 만에 5.2%나 상승한 것이다. 이는 주요 국가 가운데 호주(6.2%)에 이어 두 번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발언 이후 주요국 통화들이 대부분 달러화 대비 강세를 보였지만 원화의 절상폭은 유독 심한 편이다. 원화가치 상승폭은 대만달러(3.9%)나 엔화(3.3%), 유로화(2.6%) 등 수출 경쟁국에 비해서도 훨씬 크다. 

그러지 않아도 트럼프 미 대통령의 환율 관련 발언 수위가 심상치 않다. 대선 전부터 중국과 일본·한국 등 대미 무역흑자국을 상대로 공격에 나섰던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들어서는 아예 무역 당사국들을 특정하면서까지 비난 강도를 높이고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조만간 환율조작국 지정 등 후속 조치를 통해 통화전쟁을 본격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우리도 통화전쟁의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해 10월 미 재무부가 발표한 환율관찰 대상 국가에 포함돼 있는 만큼 환율조작국의 불똥이 언제 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불안한 움직임이 원화 환율에 그대로 반영되는 셈이다. 

급격한 원화가치 절상은 올 들어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는 수출에 찬물을 끼얹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들어 세계 제조업 경기는 미국과 일본·유럽 등의 회복에 힘입어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의 호전이야말로 우리 수출기회를 최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원화가치가 급격히 상승할 경우 눈앞의 기회도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만에 하나 미국의 환율조작국 지정 등 인위적 조치가 겹칠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제품 품질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출국을 다변화하는 등 환율 문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배가돼야 할 시점이다.





주요신문칼럼



1. [매경이코노미][신동민 셰프의 푸드오디세이]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던 ‘어만두’ 생선을 포 떠서 만두피로 사용하는 별미

설날이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풍경이 하나 있다. 어머니가 도마 소리를 내면서 하얀 가래떡을 써는 모습이다. 그리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만두를 빚었다. 펄펄 끓는 뽀얀 사골 국물에 떡만둣국을 끓여주시면 그 맛있는 한 그릇으로 나이 한 살 더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얀 가래떡은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만두는 복을 상징한다고 하니, 떡만둣국 한 그릇에도 한 해의 행복을 기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만두는 원래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진 음식으로,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소를 넣고 먹기 좋게 아물려 만든다. 추운 겨울철 잘 익은 김치를 넣고 만두를 만들면 별미 음식으로 식구들이 참 좋아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야 그 김치만두가 전부인 줄 알았지만 음식을 공부하면서 껍질과 소의 재료, 조리법과 빚는 모양에 따라 아주 다양한 만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만두소의 주재료에 따라 김치만두, 호박만두, 고기만두, 버섯만두 등 다양한 만두가 있다. 조리법에 따라 음식 이름이 붙여지기도 한다. 만두를 빚어서 더운 장국에 넣고 끓인 것은 만둣국, 차게 식힌 장국에 넣은 것은 편수라고 부른다. 빚는 모양에 따라서는 세모 모양으로 빚은 변씨만두, 해삼 모양으로 빚은 규아상 등이 있고, 작은 만두 여러 개를 싸서 만든 대만두도 있다. 요즘엔 퓨전요리로 비빔만두, 잡채만두튀김, 과일탕수만두 등 무궁무진하게 만두가 응용된다. 

만두피는 대부분 밀가루로 만들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메밀이 많이 나는 지역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두피 반죽을 하기도 했다.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같은 비율로 섞어 익반죽을 한 뒤 질지 않게 반죽을 해 곱게 치대어 소를 넣으면 맛있는 메밀만두가 된다. 밀가루 대신 생선을 포 떠서 만두피로 사용하는 어만두(魚饅頭)도 있다. 어만두 하면 이름부터 좀 생소하게 느껴진다. 어만두는 서민층보다는 양반가에서 별미로 먹던 음식으로, 임금님 수라상에도 오를 만큼 귀히 여겼다. 

조선시대 반가(班家) 조리서의 대표적인 문헌인 ‘음식지미방’ ‘시의방’ 등에 보면 어만두에 대한 자세한 조리법이 나와 있는데 손이 무척 많이 가는 음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선살을 소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 대신 만두피로 사용하기 때문에 만드는 데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소는 기존 만두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만들고 겉을 얇게 뜬 생선포로 감싸서 쪄내는데, 생선포를 최대한 얇게 뜨되 쪘을 때 살이 부스러지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만두용 생선은 민어, 숭어, 도미, 광어, 병어, 준치 등 흰 살 생선이면 어느 것이나 좋다. 봄에는 준치나 도미, 여름에는 민어가 대표적으로 쓰였다. 만드는 법은, 먼저 흰 살 생선의 살을 7∼8㎝ 길이로 얇게 포를 뜬다. 이때 얄팍하고 일정하게 떠야 모양이 예쁘게 만들어진다. 생선포에는 소금과 후춧가루를 뿌려 밑간을 해둬야 맛있다. 소는 대개 다진 쇠고기와 채 썬 표고, 석이를 양념하여 볶고 오이도 채 썰어 절인 후 볶는다. 데친 숙주와 볶은 오이, 볶은 쇠고기 등을 섞어 소를 만든다.



만두를 빚을 때는 포 뜬 생선의 안쪽에 녹두녹말을 뿌린 뒤 소를 한술씩 떠 넣고 잘 아물려 겉에도 녹두녹말을 씌워준다. 이것을 김이 오르는 찜통 속에 넣고 찬물을 뿌려 찐다. 찔 때나 꺼낼 때 찬물을 뿌리면 윤기가 나서 좋다. 쪄낸 뒤에는 가위로 가장자리를 만두 모양으로 다듬는다. 

어만두와 함께 곁들이로 홍고추, 표고버섯, 석이버섯 등을 골패 모양으로 썰어 녹말에 굴려 끓는 물에 데친 다음, 찬물에 헹궈 접시에 함께 담으면 색감이 예쁘고 담음새도 푸짐해진다. 어만두는 초간장이나 겨자즙과 함께 내는데, 주로 교자상이나 주안상 등에 올려져 양반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사실 요리사인 필자 또한 어만두를 많이 접해보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 이모께서 어만두 먹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식 요리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었던 이모는 나름 한식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손맛이 특히 좋았던 이모는 음식을 만들어 내놨을 때 가족들의 반응이 좋으면 정말 해맑게 미소를 짓곤 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은 사람이 즐거워할 때의 그 기분이란! 요리사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때 이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다. 

생선포를 최대한 얇게 뜨되 살이 부스러지지 않게 해야 성공
홍대 ‘편의방’ 중식당 눈이 휘둥그레지는 어만두 인기

이모는 흰 살 생선에 고기와 야채를 넣어 만든 만두를 내오셨다. 그때는 끓는 물에 삶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찜통에 살이 부서지지 않게 찐 것이었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느낌은 입안에서 그냥 사르르 녹았다.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어떻게 이런 만두가 있는지 감탄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최근 홍대에 맛있는 어만두가 있다고 해서 가봤다. 편의방이라는 간판을 보니 중국집이다. 중식당이기에 생선에 만두소를 넣고 기름에 바삭 튀길 거라 상상했다. 손님이 많아 좀 대기하다 들어가 보니 자장면이나 짬뽕을 드시는 분이 꽤 있어서 일반 중식당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군데군데 찐만두인지 물만두인지 하얀 만두를 손님들이 맛있게 먹고 있었다. 혹시 저 만두인가 생각하는 순간 주문한 어만두가 나왔다. 배가 고파 한입 베어 물었을 때 “오! 이 맛은 뭐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드러운 생선 속에 고수의 향이 은은히 올라오면서 입안에서 행복이 요동쳤다. 겨자소스를 곁들여 먹으니 어만두 맛이 한층 더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단 만두피가 살짝 두꺼워 따로 도는 느낌이 조금 있었는데, 바로 만든 어만두였다면 소와 더 잘 어우러졌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많은 음식을 내는 식당에서 이 정도 수준이라면 정말 대만족이다. 

지난해에 필자 또한 손님을 위해서 어만두를 만들어 드린 적이 있다. 물론 한국의 어만두를 일본식 요리로 변형시켜 완성했다. 민어를 얇게 포 떠 새우와 시소 그리고 쇠고기를 조금 넣어서 어만두를 만든 다음 담백하면서 깔끔한 오완(국물요리)으로 완성했더니 반응이 참 좋았다. 그 맛은 감칠맛이 듬뿍 담긴 육수에 입에서 녹아 없어지는 생선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상상이 되실 듯. 

이번 설에는 집에서 일반 만둣국이 아닌 어만두로 더욱 특별한 새해맞이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2. [조선일보][일사일언] 음악이 건네는 위로

영국 오케스트라 협회의 리더십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수업을 받고 있다. 오케스트라 행정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업계에 대해서 배우고, 오케스트라의 사회적 역할과 음악의 미래를 생각한다.


요즘 가장 관심이 가는 분야는 청중이다. 공연장에 오는 사람만이 아니라 집에서 라디오를 듣는 사람,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부는 초등학생도 다 청중이다. 오케스트라는 늘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은 사람에게 음악을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전체 인구에 비해서 음악을 누리는 사람의 숫자는 미미할 정도로 적다. 더구나 연주회는 그 시간 그곳에 함께 있는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공연장에 올 만한 여유가 있는 소수의 사람과만 그 순간의 특별함을 나눌 수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사실 음악 하는 사람도 공연에 자주 못 간다. 음악 하는 사람이 먹고살기 바빠서 음악을 못 듣는다고 하면 역설적이지만, 저녁과 주말이 없는 직업을 가졌고 다들 그렇듯 집에도 할 일이 산더미인데 내가 하는 일 외에 다른 공연을 듣고 보러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가장 최근에 본 공연도 워낙 지친 상태로 가서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갈 걸 후회했다. 프로그램은 무반주 사중창으로 부르는 17세기 초기 음악이었다. 그런데 성악가들이 입을 여는 순간 그야말로 천상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이 번쩍 뜨이고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온 듯하면서 어느새 마음이 개운해졌다. 음악에는 그런 힘이 있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좋은 공연에 가면 새 기운을 얻는다. 각박한 삶이 정서적으로 잠시나마 풍요로워진다. 나는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세상을 살아갈 힘을 줄 수는 있다고 믿는다. 연주자는 청중이 음악을 들을 때 그 아름다움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기를 바라면서 무대에 선다.



3. [매경이코노미][신병주의 ‘왕의 참모로 산다는 것’]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 관상만으로 왕이 될 재목 알아본 ‘외교통’

태종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정몽주를 제거했고, 1398년 왕자의 난 때는 정도전과 방석이 희생됐다. 

태종이 피를 흘려 왕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참모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인물이 바로 하륜(1347~1416년)이다. 태조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하륜은 태종을 왕위에 올리는 데 기여하고, 왕이 된 태종을 보필하면서 마지막까지 ‘태종의 남자’로 살아갔던 인물이다.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이 정평에서 졸하였다. 부음이 이르니, 왕이 심히 슬퍼해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철조(撤朝·나라에 변고가 생기거나 국상(國喪)을 당했을 때에 조회를 멈추던 일)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육류를 금함)했다. 쌀·콩 각각 50석과 종이 200권을 치부(致賻·임금이 특명으로 신하에게 부의를 내려 주던 일)하고 예조좌랑 정인지를 보내어 사제(賜祭·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 지내는 일)하게 했다.”

1416년(태종 16년) 11월 하륜이 사망했을 때의 기록이다. 하륜에 대한 태종의 신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륜의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본관은 진주다. 순흥부사를 지낸 하윤린의 아들이다. 공민왕이 본격적으로 개혁정치를 펼치던 1360년(공민왕 9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고려시대 진사를 뽑는 시험), 1365년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다. 이인복과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신흥사대부의 길을 걸었다. 1367년 신돈의 측근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되기도 했지만 고려 말 공민왕, 우왕대에 주요 관직을 두루 지냈다. 

하륜에게 정치적 위기가 온 것은 1388년 최영이 주도한 요동(遼東)정벌에 반대해 양주로 유배됐을 때다. 이후 복권돼 1391년(공양왕 3년)에 전라도 도순찰사가 됐다가 조선 건국 후에는 경기좌도 관찰출척사가 돼 부역제도를 개편,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조선 건국 후 하륜의 활약이 가장 돋보인 것은 새로운 도읍지 선정 과정에서였다. 처음 태조는 신도(新都)를 계룡산 일대로 정하고자 했으나, 하륜이 강력히 반대했다. 

“태조가 계룡산에 도읍을 옮기고자 했는데, 감히 간하는 자가 없었다. 헌데 하륜이 힘써 청해 계룡산 도읍 이전이 무산됐다.”

하륜은 안산을 주산으로 해 현재 신촌 일대인 무악을 새 도읍지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태조는 결국 한양 천도를 주장한 정도전과 무학대사 등의 의견을 수용해 1394년 10월 북악을 주산으로 하는 한양으로 새 도읍지를 정했다. 1394년에는 명나라에 표전문을 보내는 문제로 정도전과 충돌하기도 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의 내용이 불손하다며 그 중심에 있던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이 이를 반대했지만 하륜은 외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누군가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정도전을 대신해 직접 명으로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태조의 신임을 받던 하륜이 본격적으로 태종의 남자가 된 과정에는 ‘관상’에 관한 일화가 있다. ‘태종실록’ 총서의 기록에는 하륜이 본래 관상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친구이자, 태종의 장인인 민제에게 “내가 관상을 많이 보지만 공의 둘째 사위 같은 사람은 없었소. 내가 뵙고자 하니 공은 그 뜻을 말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민제의 주선으로 태종을 만난 하륜은 마음을 기울여 섬기게 됐다. 관상을 본 하륜이 이방원의 풍모를 보고 먼저 접근했다는 것은 킹메이커로서 하륜의 자질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정적 정도전의 존재가 두 사람을 확실히 결속시켰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왕자였던 이방원은 태조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세자 방석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정도전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 하륜 또한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갔던 만큼 정도전을 껄끄럽게 여겼다. 15세기 학자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는 하륜이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가면서 베푼 환송연에서 일부러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고 사과를 핑계로 이방원과 정도전 제거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한 장면이 소개돼 있다. 

특히 1398년 왕자의 난 때 하륜은 태종에게 정도전과 방석에 대한 선제공격을 제안함으로써 태종이 주도권을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왕자의 난이 성공한 후 태종은 거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질적인 맏형 방과(후의 정종)를 왕위에 올렸다.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하륜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받고 정사공신(定社功臣) 일등에 오른다. 이어 1400년 11월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다시 좌명공신 일등에 봉해진다. 두 번 연속 일등공신이 되면서 하륜은 태종의 참모로서 그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1402년(태종 2년) 하륜은 명나라 황제 영락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명나라를 방문해 태종의 지위를 확실히 인정받는 성과를 얻었다. 이듬해 4월 명나라 사신 고득 등과 함께 황제의 고명과 인장을 받들고 온 것이다. 태종은 하륜에게 특별히 토지와 노비를 하사해줬다. 

태종의 남자로서 하륜이 보여준 대표적인 업적은 ‘연려실기술’에 기록돼 있다. 태종이 왕에 등극한 뒤,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태종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번 사신을 보냈지만, 태조는 오히려 이들을 죽이는 것으로 반감을 표시했다. 바로 ‘함흥차사’다. 태조 주변 인물의 설득으로 태조는 마음을 바꿔 서울로 돌아오고 태종은 아버지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하륜은 태조의 분노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것을 의식해 장막의 기둥을 크게 만들자고 제안했다.



놀랍게도 태조가 태종을 향해 쏜 화살은 하륜이 미리 대비한 나무 기둥에 박혔다. 그뿐 아니라 옥쇄를 전해줄 때도 태조는 쇠방망이를 소매 속에 숨겨뒀지만 하륜은 태종에게 “직접 받지 말고 내시를 시켜 받도록 하십시오”라고 조언함으로써 태종을 구했다. 이에 태조는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다”라며 태종을 인정했다. 하륜의 기지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신문고 설치와 저화 유통과 같은 주요 정책 결정에도 태종 곁에는 늘 하륜이 있었다. 1401년 태종은 백성들의 민원을 듣는 신문고 설치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조정 신료들 다수가 우려를 표방했으나, 하륜은 신문고의 적극적인 시행을 주장했다. 

“신문고를 치는 법이 사실이면 들어주고, 허위면 죄를 주고, 월소(越訴·하급 관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직접 상급 관아에 소송을 내던 일)로 치는 자도 또한 이같이 하는 것입니다. (중략) 관리가 백성의 송사를 결단함에 있어 왕에게 아뢸까 두려워해 마음을 다해 세시하게 해서, 결국 백성이 그 복을 받으니, 실로 자손 만세 좋은 법입니다.”

비록 제대로 유통되진 못했지만 지폐인 저화(楮貨)의 유통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하륜이 추진한 정책 대부분은 태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그의 구상에는 왕권이 튼튼한 조선 만들기가 있었다. 하륜은 태종의 뜻을 받들어 ‘고려사’와 ‘동국사략’ 등의 역사 사/서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며, 1408년에는 태조가 승하하자 ‘태조실록’ 편찬에 나서 5년 뒤 완성했다.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하륜은 1412년 8월에 다시 좌의정이 되고 1414년 4월에 영의정부사가 됐다. 이 무렵 하륜은 70세를 바라보는 원로대신이었는데 70세가 되던 1416년 선왕의 능침을 순시하러 함길도에 들렀다가 병을 얻어 객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태종의 참모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실록의 졸기에는 하륜에 대해 ‘책략가면서 언행은 신중했던 인물’로 묘사한다. 성리학 이외 다양한 학문에도 정통했으며 음양, 풍수지리에도 해박했다.

참모로서 하륜은 특히 외교 부문에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명나라와 외교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점에 외교 문서 작성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직접 명나라에 들어가 외교 현안을 여러 차례 해결했다. 

하륜은 고려 말 관직 생활을 시작했지만 조선 건국 후 태조와 태종의 연이은 신임을 받아 조선 건국 주역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정몽주, 정도전, 최영, 이성계, 이방원 등 여말선초를 이끌어간 쟁쟁한 인물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참모로서의 위상은 결코 낮지 않았다.



4. [한국일보][우리말 톺아보기] ‘김밥’의 발음, 어떻게 할 것인가

밥은 한국인의 주식이기 때문에 한국어에 밥과 관련된 어휘들이 많이 있다. 새벽밥부터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까지 밥 시간대 별로 밥들이 있고 밥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쌀밥, 오곡밥, 잡곡밥, 팥밥, 나물밥, 메밀밥, 콩나물밥, 콩밥, 계란밥, 약밥, 쑥밥, 굴밥, 쌈밥, 김밥 등이 있으며 밥을 만들거나 담는 형식에 따라 비빔밥, 고봉밥, 사발밥, 한솥밥, 덮밥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밥들을 발음할 때 [밥]으로 발음할지, [빱]으로 발음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먼저 받침 ‘ㄱ, ㅂ, ㅌ, ㅍ’ 뒤에 연결되는 ‘ㄷ’은 자연스럽게 된소리로 발음되기 때문에 새벽밥, 저녁밥, 오곡밥, 잡곡밥, 팥밥, 약밥, 쑥밥, 한솥밥, 덮밥 등은 [빱]으로 발음하면 된다. 

문제는 받침 ‘ㄴ, ㄹ, ㅁ, ㅇ’ 뒤에 오는 밥을 어떻게 발음할 것이냐 하는 것인데, 표기상으로는 사이시옷이 없더라도, 관형격 기능을 지니는 사이시옷이 있어야 할 합성어의 경우에는 뒤 단어의 첫소리 ‘ㅂ’을 된소리로 발음한다는 규정에 따라 아침밥, 점심밥, 비빔밥, 고봉밥, 사발밥 등은 [빱]으로 경음화시켜 발음해야 한다. 

그러나 쌀밥, 나물밥, 메밀밥, 콩나물밥, 콩밥, 계란밥, 굴밥, 쌈밥, 김밥 등은 관형격 합성어가 아니라 밥을 만드는 재료와 관련된 합성어이기 때문에 표기대로 [밥]으로 발음한다. 

따라서 ‘김밥’은 [김:밥]으로 발음해야 하지만 대다수의 언중들이 [김:빱]으로 발음하면서 괴리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립국어원은 2016년 3분기 국어심의회의 결정으로 [김:밥/김:빱] 복수 발음을 허용하게 돼 이제는 어느 것으로 발음해도 무방하다.



5. [한국일보][기억할 오늘] 영국의 여성 참정권

1918년 2월 6일 영국 의회가 30세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운동은 저 사진 속 여성들이 태어나기도 전이었을 1860년대부터 시작됐다. 

옥스퍼드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여성 참정권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Emily W, Davison, 1872~1913)이 런던 인근 엡섬다운스 더비에 출전한 국왕 조지5세의 경주마가 결승점으로 질주하던 순간 몸을 던져 숨진 게 불과 5년 전인 13년 6월이었다. 그의 외투에는 ‘Votes ForWomen’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저 사진의 삼각 깃발에 새겨진 문구도 그거였다. 

여성운동 지도자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Pankhurst, 1858~1928)는 서명과 의회 청원으로 참정권법을 얻으려다 잇달아 실패하자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맹(WSPU)’을 조직, 비합법 투쟁을 시작했다. 런던 도심의 진열장 유리창 부수기부터 국립미술관 작품 훼손, 전철이나 유명 정치인의 집 방화 등 그들의 투쟁은 가히 무정부주의자들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데이비슨도 서프라제트(Suffragette, 온건파 운동가 Suffragist와 구분해 전투적 참정권 운동가를 지칭하던 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격렬한 항의 시위로 번졌고, 체포와 구금, 투옥과 단식투쟁이 뒤따랐다. 

1918년의 참정권은 하지만 여성의 1차 대전 전시체제 협력의 보상이기도 했다. 팽크허스트는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의 참전을 지지하며 여성들의 협력을 적극 독려했고, 남성 의회는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이 21세 이상 참정권을 온전히 인정한 것은 또 10년 뒤인 1928년 7월이었다. 

여성 참정권을 최초로 인정한 국가는 1893년의 영국령 뉴질랜드였고, 유럽에서는 1906년 핀란드가 문을 열었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 획득은 북유럽과 소비에트연방, 캐나다보다도 늦었다. 하지만 서프라제트의 투쟁과 성취는 세계 여성 참정권운동의 분수령이 됐다. 미국의 참정권운동도 거기서 자극 받아 확산됐고, 1920년 수정헌법 19조로 결실을 맺었다. 그 힘이 저 웃음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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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늙은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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