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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올리는 자료로 상업적 목적은 없으며 선정된 사실의 정치적 성향은 블로그 운영성향과 무관합니다.
주요 신문사설
[한겨레]
1. 대통령의 뇌물수수 도운 ‘영혼 없는 공무원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이 찬성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그런 압력이 있었기에 국민연금이 수천억원의 손실이 예상되는데도 무리하게 합병에 찬성했던 것이겠다.
문 전 장관은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을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삼성의 합병 방침 발표 직후인 지난해 6월에 이미 합병에 찬성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보건복지부 간부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국민연금 의결권전문위원회의 성향 조사를 지시했고, 직접 위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합병 찬성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런 압박에도 전문위원회가 합병을 반대할 것으로 보이자, 문 전 장관은 전문위원회 대신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에서 합병 찬성 결정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홍완선 당시 기금운용본부장은 보건복지부 연금정책국 간부로부터 합병 찬성 요구를 받았다고 특검에서 진술했다. 투자위원회 개최 전에 위원이 교체되기도 했다. 그렇게나 무리수를 거듭한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연결고리는 이미 여럿 드러났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을 보건복지부에 지시하고 직접 지휘했다는 증언은 진작에 나왔다. 관련 문건도 확보됐다고 한다. 안 전 수석이 “단 하나도 내가 판단하고 이행한 것이 없고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 지시했다”고 밝힌 터이니, 누가 ‘찬성 강행’을 정했는지도 뻔하다.
이권 제공의 맞은편인 대가 수수 과정도 확연하다. 지난해 7월10일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고 7월17일 합병안이 주총에서 통과된 뒤, 7월25일 박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독대했다. 독대 직전인 7월20일께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과 박상진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사장이 만나 정유라씨 지원에 대해 논의했다. 이어 삼성은 8월 말 최순실씨의 독일 현지법인을 통해 220억원 규모의 지원을 시작했다. 국민연금-보건복지부-청와대-삼성-최순실·정유라 모녀로 이어지는 ‘제3자 뇌물수수’ 관계다.
국민의 노후자금 수천억원이 그렇게 날아가 버리는 동안 공무원들은 제지는커녕 적극적으로 방조했다. 눈앞에서 불법이 벌어지고 위법인 지시가 내려오는데도 그저 따랐다. ‘위에서 지시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변명할 일이 결코 아니다. 불법에 동조한 대가로 승진하고 영전한 ‘영혼 없는 공무원’들은 불법행위의 공범일 뿐이다.
[이데일리]
2. ‘계란값 파동’에 뒷북만 치는 정부
계란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그제 기준으로 중품 특란 한 판(30개)의 평균 소매가격이 7940원으로 한 달 전(5410원)보다 46.8%가 올랐다는 게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조사 결과다. 전날 1996년 집계 이래 최고가(7510원)를 기록한 지 하루 만에 또 갱신한 것이다. 동네 마트에서는 1만원 넘는 곳도 있으나 그나마 구하기조차 힘들다고 한다. 가히 ‘계란 대란’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의 여파로 알을 낳는 산란계를 대량 살처분한 때문이다. 지금껏 살처분된 산란계는 1964만 마리로 전체 사육 규모의 28%에 달한다. 이로 인해 AI 발생 전 하루 4200만개씩 공급되던 계란이 최근 3000만개 이하로 크게 줄었다. 하루 수요량이 평균 4000만개 수준인데 비해 1000만개 가량 공급이 부족해진 것이다. 물량이 달리면 값이 뛸 수밖에 없다.
유통과정에서의 부조리도 지나칠 수 없다. 가격급등 배경에 국내 물량의 65%를 처리하는 수집판매상들의 담합이나 사재기 행위가 개입됐을 공산이 작지 않다. 물량 방출을 하루나 이틀씩 늦추는 등의 방법으로 가격 구조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계란을 하루만 늦게 풀어도 가격이 한 판에 50원 이상 오를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뒤늦게 계란 수입관세 일시면제, 운송비 인하, 사재기 실태 점검 등 수급 안정화 방안을 내놨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어제는 AI 발생 농가 주변에 내려진 계란 반출금지 명령을 하루 동안 일시 해제했지만 이 역시 임시미봉일 뿐이다. AI 초동진압에 실패한 뒤 계속 뒷북만 치는 꼴이다.
내달 설을 앞두고 계란 수요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알 낳는 씨닭인 산란종계가 병아리를 낳고 그 병아리가 산란계가 되는 데까지 6개월, 산란계가 알을 낳기까지는 또 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당장 AI 사태가 끝난다 해도 계란 대란이 길게는 1년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것은 물론 사태의 장기화에도 대비해야 할 것이다.
3. 고은 시인도 옭아매려던 ‘블랙리스트’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고은 시인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박근혜 정부의 우파적 취향에서 벗어난 것이 주된 이유라고 한다. 올해 소설 ‘채식주의자’로 영국의 세계적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 작가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정부가 겉으로는 문화융성을 부르짖고 있었으면서 실제로는 선별작업으로 재갈을 물리려 한 것이다. CJ 이미경 부회장도 비슷한 이유로 퇴진 압박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 마당이다.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강제모금에서 비롯된 국정농단 사태의 여파가 이처럼 문화예술계까지 들이닥쳤다. 각종 폭로가 이어지면서 의혹이 일파만파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정부 노선에 맞지 않는 진보적 문화예술인들을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법으로 작품 활동에 불이익을 주려고 했다는 것이 의혹의 핵심이다. 문화계 인사들을 편가르기 하는 방법으로 정권 유지에 이용하려 했던 셈이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이에 대해 전방위 수사에 착수한 만큼 조만간 정확한 진상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김종덕·조윤선 전·현직 문체부장관, 정관주 전 문체부 1차관 등이 두루 수사 대상에 올랐다. 특검팀은 어제도 김상률 전 교문수석을 소환 조사했으며, 역시 교문수석 출신인 모철민 주프랑스 대사에 대해서도 소환을 통보한 상태다.
이미 유력한 단서도 확보된 상태라고 한다.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에 “사이비 예술가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문화예술가의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하라”고 적힌 상부의 지시 내용이 그것이다. 박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 2014년 퇴진한 유진룡 전 문체부장관도 “퇴임 한 달 전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직접 봤다”고 폭로했다. 그 대상자가 1만명 안팎에 이를 것이라는 게 문화계 내부의 판단이고 보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명단 작성에 국정원이 개입했는지도 명백히 가려야만 한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이나 문체부 조직만으로는 방대한 명단 작성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실로 드러날 경우 민간인 사찰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이런 의혹이 역대 정권마다 누적돼 왔다는 점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문화인들 스스로 정권의 도구가 되기를 자처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서다.
[서울신문]
4. 1조원대 퀄컴 과징금, 한·미 통상 갈등은 경계를
공정거래위원회가 휴대전화 칩셋 특허권 보유사인 미국 퀄컴에 이동통신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남용했다는 혐의로 시정 명령과 함께 1조 300억원의 역대 최대 과징금을 물린 것은 ‘특허 공룡’의 갑질 횡포를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뜻에서일 것이다. 퀄컴이 그간 절대적인 칩셋 시장지배력을 내세워 휴대전화 제조사들에 자사의 칩셋 관련 특허권을 일괄 제공하는 대가로 이들의 이동통신 관련 필수특허를 무차별적으로 끌어모은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제조사들은 휴대전화에 꼭 필요한 퀄컴의 칩셋을 공급받으려고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개발한 특허권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퀄컴은 또 휴대전화 제조사들로부터 단말기 가격의 5%에 해당하는 특허권 사용료를 받아 챙겼다. 국내 제조사들이 퀄컴에 지급하는 특허 사용료는 연간 1조 5000억원에 이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원성이 자자했다. 이번 공정위 결정에 십년 묵은 체증 내리듯 속이 후련하다는 반응이 통신제조업계에서 나오는 것은 십분 이해가 간다.
퀄컴 측은 “수십 년간 문제가 되지 않았던 라이선스 관행에 대한 전례 없는 결정”이라며 즉각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국 모바일 통신산업과 무선인터넷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면서 “국외 기업의 지적 재산권을 규제하려는 결정이 국제법과 갈등을 빚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예정된 수순으로,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글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퀄컴 측의 횡포가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에 과징금 폭탄을 때리면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움직임을 자극하지 않을까 걱정이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이 또한 제재 결정이 원칙대로 이뤄진 만큼 문제의 소지는 없다고 본다. 아직 한국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주의가 가시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통상 갈등을 점치는 것은 지나친 기우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미국 측에서 이번 제재를 달갑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만에 하나 불필요한 통상 갈등으로 번지지 않도록 대비할 필요는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관련 조항이 있는지 면밀히 검토하고, 적기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미리 갖춰야 할 것이다.
5. 과거사 반성 없이 진주만 찾은 아베 日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7일(현지시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기습 공격한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찾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희생자 추도 시설인 애리조나기념관을 방문해 공동 헌화한 것이다. 아베의 진주만 방문은 한마디로 오바마 대통령의 조력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치성 이벤트에 불과하다. 아베는 이 자리에서 이른바 ‘부전(不戰)의 맹세’를 공표할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우리는 전후(戰後)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를 만들고 법의 지배를 존중하고 부전의 맹세를 견지했다”는 발언에 그쳤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약속을 잘 지켜오지 않았느냐는 일종의 자화자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전쟁의 참화는 두 번 다시 되풀이하면 안 된다”는 아베의 발언에는 그 주체조차 명시하지 않았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제국주의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아시아 각국이 볼 때는 입 밖에 내놓지 않은 것만도 못한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아베는 이날 과거사에 대한 사죄는 물론 반성하는 뜻도 일언반구 내놓지 않았다. 대신 ‘희망의 동맹’이라며 과거 적국이었던 미국과 일본 두 나라의 ‘화해의 힘’만을 강조했다. “여기서 시작된 전쟁이 앗아간 모든 용사의 목숨,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영혼에 영겁의 애도의 정성을 바친다”는 대목 역시 ‘애도의 대상’은 미군과 일본군에 그쳤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전쟁의 상처가 우애로 바뀔 수 있고, 과거의 적이 동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맞장구를 쳤다.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이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고통쯤은 눈감을 수 있다는 뜻이라면 지극히 실망스러운 일이다. 더욱 참담한 것은 아베의 진주만 방문 직후 이마무라 마사히로 일본 부흥상이 제2차 세계대전 전범(戰犯)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찾았다는 것이다. 이마무라의 야스쿠니 참배 시점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 일본은 중국에 맞서는 동맹의 확고함을 과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하는 듯하다. 하지만 위안부 강제 동원에서 난징 대학살까지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는 아베의 모습은 국제사회에 더 큰 걱정거리를 안겨 주었다. 아시아 각국은 누구도 ‘부전의 맹세’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본은 알아야 한다. 과거의 악행을 반성하지 않는 미래의 약속은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 있는 허언(虛言)에 불과하다. 미국도 피해자들에게는 실망만 안겨 주는 아베의 이벤트에 더이상은 멍석을 깔아 주지 말라.
[조선일보]
6. 국민연금 의혹 철저히 수사하되 꿰맞추기는 안 돼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국민연금이 찬성하도록 부당한 압력을 가한 혐의로 문형표 국민연금 이사장(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긴급 체포했다. 특검은 문 이사장이 복지부 장관이던 지난해 두 삼성 계열사의 합병에 사실상 찬성하라는 압력을 가했다는 복지부 관계자들 진술을 확보했다고 한다. 합병 반대 의견이 나올 가능성 있는 의결권 전문위원회에 안건을 올리지 말고 국민연금공단의 기금운용본부 차원에서 독자 결정하라는 취지로 주문했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기금의 개별적인 의결권 행사에서 복지부 장관이나 관료들이 개입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복지부는 기금운용위원회를 통해 기금 전체의 운용 틀을 정하는 데만 관여하고 일상적인 기금 운용은 기금운용본부에 맡겨왔다. 그렇다고 문 전 장관이 안건을 의결권 전문위에 올리지 말도록 지시한 것 자체를 법적으로 문제 삼긴 쉽지 않다. 복지부 장관은 관련법상 기금 운용의 최종 책임자로 규정돼 있기 때문에 안건 처리 절차에 관한 의견을 제시할 법적 권한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문 전 장관이 삼성 측 청탁을 받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합병을 성사시킬 목적을 갖고 개입했다면 범죄 행위가 된다. 특검은 이런 의혹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제3자 뇌물죄 수사로 가기 위한 전 단계로 문 전 장관을 긴급 체포했다는 것이다. 특검의 수사 방향대로 입증된다면 중범죄가 아닐 수 없다. 개별 기업의 사적(私的) 이익을 위해 국민 노후 자금인 국민연금이 동원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 처리가 국민 정서에 휩쓸려 포퓰리즘으로 흐를 위험성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7월 삼성 합병 당시 압도적 다수의 전문가들과 투자기관, 언론이 합병을 지지했다. 미국계 투기자본 엘리엇 펀드가 주도한 합병 반대론이 국익을 해친다는 논리에 이의를 다는 여론은 소수에 불과했다. 실제로 국민연금 말고도 외국인과 소액 투자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주가 합병 찬성에 표를 던졌다. 순수 기금운용 논리로 보면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정책적 판단을 사후적으로 문제 삼는다면 그것은 대중의 분노에 올라탄 마녀사냥일 뿐이다.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고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특검은 국민연금이 삼성 합병에 찬성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외압이나 로비가 있었는지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다만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 다른 가능성에는 눈을 감은 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우(愚)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7. 벤처가 만든 일자리 삼성전자 7배
우리나라 벤처기업 3만1260개(2015년 말 기준)가 지난해 올린 매출 총액이 215.9조원으로 집계됐다. 대한민국 1위 기업 삼성전자의 작년 매출액(200.6조원)을 웃돈다. 주목할 점은 이 벤처기업들이 대기업보다 성장성도 높고 기술 혁신에도 투자를 많이 하며 일자리도 더 많이 창출한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청과 벤처기업협회에 따르면 벤처기업당 작년 매출액은 전년보다 평균 8.6% 늘어나 같은 기간 매출액이 4.7% 감소한 대기업보다 성적이 훨씬 좋았다. 아직 역사가 짧은 벤처기업의 특성상 영업이익률은 대기업에 못 미치지만 연구·개발에 더 많이 투자하고 있어 앞날도 밝다. 국내 대기업이 매출액의 1.5%를 R&D(연구·개발)에 투자하는 동안 3만여 벤처기업은 매출액의 평균 2.4%를 R&D에 투자한다. 그 결과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금, 판로 등 넘어야 할 난관은 많지만 벤처기업의 절반가량은 자사의 기술이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응답했고, 다섯 기업 중 한 기업꼴로는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자신했다.
실제로 이 벤처기업들의 72.6%가 자체 연구소나 연구 전담 부서를 갖고 있으며 1사당 평균 4.5건의 특허를 갖고 있다. 또한 3만여 벤처기업에 종사하는 인력이 72만8000명이다. 비슷한 규모의 매출을 올리는 삼성전자가 국내서는 10만 명 정도만 채용하고 있다. 국내에서 일자리를 제대로 못 만들어내는 대기업에 비해 벤처기업의 고용 기여도가 7배나 된다. 벤처기업 중 절반 가까이는 내년까지 평균 2.4명을 신규 채용할 계획이라니 벤처 분야에서만 새 일자리가 3만2000개 넘게 생겨날 전망이다.
한국 경제는 삼성·현대차 등 일부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다. 삼성전자 하나의 시가총액이 전체 유가증권시장의 20%를 차지한다. 청년들은 전체 기업 수의 1%에 불과한 대기업 취업만 선호하고 중소기업은 가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기업 못지않은 기술력을 갖고 쑥쑥 성장하는 벤처기업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유망 벤처기업을 1만 개 만들면 청년층 일자리가 24만 개 더 생긴다. 한국 경제의 활력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는 답이 쉽게 나온다.
[매일경제]
8. 기업하기 얼마나 싫으면 돈이 그리 남아돌까
지난 3분기 국내 기업과 가계의 자금 흐름을 살펴보면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기업들이 지난 석 달 동안 장단기 차입과 주식·채권 발행으로 조달한 자금은 모두 5조3000억원에 그쳤다. 기업들은 보통 분기마다 20조~30조원씩 자금을 조달한다. 많게는 60조원 넘게 조달할 때도 있다. 하지만 지난여름부터는 조달액이 급격히 줄었다.
지난 분기에는 기업 부문의 자금 조달보다 운용액이 4조5000억원 더 많았다. 그만큼 여윳돈이 생겨 금융자산 형태로 쌓아두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이 새로운 기준으로 자금순환 통계를 낸 2009년 1분기 이후 기업 부문에서 자금이 남아돈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반적으로 가계는 번 돈 중 일부를 저축하고 기업은 그 돈을 빌려 투자를 한다. 하지만 요즘은 기업이 돈을 쓰지 않고 되레 저축을 한다. 가계의 자금 잉여는 보통 분기마다 20조원을 넘었지만 지난 분기에는 2조원에도 못 미쳤다. 소규모 자영업자를 포함한 가계 부문 금융부채는 석 달 동안 38조원 가까이 늘어 1500조원을 넘어섰다. 반면 기업 부채는 17조원 줄었다. 주식 시가총액 기준 100대 기업의 잉여현금 흐름은 3분기 말 55조원을 넘어 한 해 전(25조원)의 두 배로 늘었다. 이쯤 되면 기업들이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에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 빈자리를 가계가 빚을 내 메꾸는 건 분명 한계가 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총투자율(국민총처분가능소득 대비 총자본형성)은 40%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은 30%에도 못 미친다. 한국이 아시아의 호랑이가 된 건 기업가들의 야성적 충동이 한껏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기업들은 잔뜩 움츠리고만 있다. 기업가정신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매일경제신문이 한국경제연구원에 의뢰해 기업가정신의 변화를 지수화해보니 1980년대 말 220에 이르렀던 이 지수는 지금 역대 최저 수준인 86으로 추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기업가정신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23위에 그쳤다. 우리 경제가 구조적 저성장의 늪에 빠진 데다 탄핵과 대선 정국의 혼란까지 겹쳤으니 기업하려는 의욕은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해서는 무슨 수를 쓰든 이 상황을 반전시켜야 한다.
[중앙일보]
9. 관광 한국, 언제까지 싸구려 쇼핑인가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하루 종일 서울 시내 면세점·건강식품점 등 여섯 군데 ‘뺑뺑이 쇼핑’에 끌려다닌다는 어제 보도를 보니 어이가 없다. 한국 고유의 향취가 나는 관광상품을 서둘러 개발하고 유·무형의 관광 인프라를 쌓아 나가도 시원찮을 판에 눈앞의 이익만 쫓는 일부 여행사들이 ‘관광 한국’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다.
우리 관광산업은 중국인 관광객의 급증 덕분에 외형성장을 거듭해 왔다. 문제는 그런 호황에 안주하는 바람에 오히려 관광품질 제고 노력은 퇴보한 것이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갈등이 관광에까지 중국의 한한령(限韓令)을 발동케 했다는 분위기도 있지만 사드 타령만 할 계제가 아니라고 본다. 여행사 난립과 과당경쟁을 구조조정하는 것은 물론 이번 기회에 ‘관광 한국’의 근본적 청사진을 다시 짜야 한다.
우선 국내 관광객의 절반 이상이 중국인인 상황에서 국적의 다변화가 중요하다. 또한 대도시와 인접 지방자치단체를 연계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지역마다 관광 특화상품으로 삼아야 한다. 깃발 앞세우고 수십 명씩 몰려다니는 유커(遊客)보다 삼삼오오 소규모 싼커(散客)의 개별여행이 늘어나는 추세에서 전통시장·역사탐방 같은 ‘다품종 소량’ 체험형 상품도 시급하다.
이웃 일본이 좋은 귀감이다. 관광입국 정책 드라이브가 효과를 내면서 한국에 오던 유커까지 일본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일본은 불법입국 폐해보다 관광객 증대로 인한 이득이 크다고 보고 비자 규제를 과감히 푸는 전략적 용단을 내렸다. 아베 총리가 일머리를 잡고 외무·법무 등 관련 부처 관광대책회의를 주도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시환급형 사후면세점을 대폭 늘린 것도 주효했다. 올해 일본의 외국인관광객이 2000만 명을 돌파한 것도 부럽지만, 이들이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쓰고 가게 한 지혜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관광은 서비스산업 중에서도 외화가득 및 고용유발 효과가 큰 편이다. 경기침체기 내수를 살찌울 효자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도 관광 한국의 업그레이드는 시급한 과제다.
[한국일보]
10. 젊은 리더의 고품위 정치, 모든 정치세력이 배워야
안희정 충남지사와 남경필 경기지사, 원희룡 제주지사 등 여야의 젊은 리더들이 보수신당 창당과 관련해 덕담과 애정 어린 비판을 주고받아 어수선한 정국에 신선함을 던졌다. 정치적 책임의 정도를 감안하지 않고 견제 일색인 여야의 야박한 정치행태에 비추어 이들의 유연성과 포용력은 한층 돋보인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안희정 충남지사는 보수신당 창당 선언이 있던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경필 원희룡 유승민 등 젊은 지도자들이 새로운 보수, 진정한 보수의 출발점을 만들어 달라”며 “색깔론과 특권, 반칙의 기득권, 영남 패권정치를 끝내고 자기 책임성과 애국심에 기초한 새로운 보수의 길을 개척하기 바란다”고 덕담과 주문의 응원을 보냈다. 안 지사는 “견해가 다르더라도 진심으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정치, 타인의 비난이 아닌 자신의 꿈을 말하는 정치가 국민이 바라는 새정치일 것”이라며 “그런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 보자”고 건승을 기원했다.
안 지사는 자기 반성과 진보 혁신의 다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독선적 정의감, 배타적 선민의식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합리적 진보의 길을 열기 위해 송영길 김부겸 등과 함께 노력하겠다”며 “민주당을 새로운 진보의 정당으로 혁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보수신당과 라이벌 정치인에 대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응원 메시지는 그의 진정성을 엿보게 한다. 이에 원 지사는 “공격적 비난보다 더 아프다”며 “개혁보수신당은 안 지사의 덕담성 질타를 무겁게 새겨야 한다”고 수긍했다. 남 지사 역시 “애정 어린 조언에 무거운 책임감도 느낀다”며 “20년 정든 집을 떠나오면서 되새겼던 새정치에 대한 다짐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보수신당에 대해 새누리당은 물론 야권과 대권주자들이 일제히 견제에 나선 것과 크게 대조적인 장면이다. 예상보다 줄어든 탈당의원 숫자를 들어 “보수신당의 실패”로 규정한 새누리당 반응은 차치하더라도, “박근혜 정권의 공범”“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 없다”는 민주당과 문재인 전 대표 측의 비판은 경직되고 성마른 견제에 지나지 않는다. ‘죽기 살기’식의 천박한 경쟁과 거친 막말에서 벗어나 상대에 대한 존중과 건강한 경쟁에 터잡은 격조 높은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는 우리 정치의 해묵은 과제만 일깨운다.
앞으로 대선 경쟁에서는 격한 비난과 폭로가 난무할 게 뻔하다. 불안정한 여야 4당 체제가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젊은 정치 리더들이 보다 나은 정치의 희망을 안겨 주니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주요 신문칼럼
1. [동아일보][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 싱거 미싱과 이매방의 춤
이매방은 한 시대를 풍미한 전통 춤꾼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춤을 배워 중요무형문화재 승무, 살풀이의 예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지금까지 두 종목을 보유한 인간문화재는 그가 유일하다. 이매방이 2015년 타계한 뒤 최근 유족들이 그의 유품을 전북 전주에 있는 국립무형유산원에 기증했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이 유품들을 토대로 ‘명무, 이매방 아카이브로 만나다’라는 기획전을 열고 있다.
기증 유품은 공연 영상과 사진, 공연 의상과 소품, 각종 편지 등 다양하다. 그런데 그중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오래된 재봉틀이다. 춤꾼과 재봉틀이라니. 이매방은 자신이 직접 무복(舞服)을 지어 입었다고 한다. 이매방 재봉틀은 1920년대에 생산된 ‘싱거(Singer)’ 모델이다. 이매방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니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들어왔을 것이다. 싱거는 재봉틀에 있어 세계 최고 브랜드의 하나로 꼽힌다. 그 역사도 깊다. 우리나라에 재봉틀이 도입된 건 1900년경 일본을 통해서였다. 예전엔 재봉틀을 미싱이라 불렀다. 재봉틀은 영어로 ‘소잉 머신(sewingmachine)’. 일본인들이 여기서 소잉을 떼내고 머신을 미싱으로 불렀고 그게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지금은 집에서 재봉틀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재봉틀을 갖고 있는 가정이 적지 않았다. 재봉틀을 이용해 옷 수선은 기본이고 치마 바지 버선 등 일상복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도 많았다. 재봉틀은 생계를 위한 중요 수단이었다. 그래서인지 재봉틀은 인기 있는 혼수품으로 꼽혔다. 6·25전쟁 때 재봉틀을 등에 지고 피란 간 사람도 많았다.
이뿐 아니다. 재봉틀은 1960, 70년대 봉제 섬유산업의 필수품이었다. 우리의 근대화 산업화의 숨은 역군이었던 셈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1989년)에 나오는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가사에 미싱의 역사와 애환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매방은 어려서부터 바느질을 잘했다고 한다. 그 재주로 싱거 미싱을 돌려가며 열심히 무복을 만들었다. 자신의 무복뿐만 아니라 제자들 것까지 만들어 주었다. 어찌 보면 재봉틀은 이매방 춤의 동반자였다. 그 덕분에 승무와 살풀이가 우리에게 잘 전해 올 수 있었으니, 흥미로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2. [동아일보][@뉴스룸/김창덕] 라이벌 구도가 바뀐다
‘참이슬 경쟁 상대는 파브? 엔씨소프트 맞수는 미드?’
2009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동료 기자의 기사 제목이다.
동종 제품 및 서비스 간 시장쟁탈전을 넘어 전혀 다른 산업에 속한 기업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게 요지였다. 퇴근 후 여가(餘暇)를 공략해야 하는 소주 회사는 일찍 귀가해 영화나 드라마를 보도록 유인하는 TV 제조사와 경쟁해야 한다는 식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한 시각이었고 또 화제도 됐었다.
지금은 어떨까. 이종 산업 간 경쟁은 산업경계의 파괴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융합’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변화가 가장 활발한 곳은 자동차산업이다.
자동차에 전자장비가 하나둘 얹히기 시작한 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다양한 정보기술(IT)이 적용되면서 자동차는 어느덧 거대한 IT 기기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다. 글로벌 IT 업체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는 건 당연한 얘기다. 구글은 이미 자율주행차 기술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삼성전자도 미국 하만을 인수하면서 자동차 전장부품 업체들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부 전문가는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자동차 시장의 주도권은 IT로 완전히 넘어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기존 완성차 및 자동차부품업체들도 IT와 융합한 차세대 자동차에 미래를 걸고 있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지금까지 부품을 납품하는 수천 개의 협력업체에 ‘산업의 주인’으로 군림해 왔다. 그러나 전혀 다른 세계에 있던 소프트웨어(SW) 괴물들이 자동차산업에 속속 뛰어들면서 위기감은 점차 커지고 있다. 자동차 핵심 기술로 ‘숨은 강자’ 역할을 해왔던 보쉬, 콘티넨탈, 덴소 등 글로벌 자동차부품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자동차와 IT 간 융합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지도 주목되지만 두 산업 간 주도권 쟁탈전의 향방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디트로이트에서 각각 열리는 ‘국제가전전시회(CES)’와 ‘북미국제오토쇼’는 큰 관심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개최 시기가 비슷한 것 외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던 두 전시회는 어느덧 서로를 닮아 가고 있다. 올해 CES 기조연설은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 회장이, 디트로이트 모터쇼 기조연설은 구글의 자율주행차 자회사인 웨이모의 존 크래프칙 최고경영자(CEO)가 맡는다. 독일 BMW, 보쉬 등은 자동차와 연관된 첨단 IT를 CES에서 선보이고, 구글과 IBM 등은 디트로이트 모터쇼를 신기술 발표 무대로 삼을 예정이다.
미래 자동차산업을 둘러싼 자동차 업체와 IT 업체 간의 경쟁은 1990년대 글로벌 스포츠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종격투기’를 연상시킨다. 주짓수, 유도, 복싱, 레슬링 등 다양한 종목에 기반을 둔 격투가들은 ‘챔피언 벨트’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경쟁을 펼친다.
이종격투기 팬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어느 종목이 실전에 가장 강한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과연 미래 자동차산업에서는 누가 챔피언이 될까. ‘한국 챔피언’을 기대할 수는 있는 것일까.
3. [세계일보][공감!문화재] 문화재 보존 인간 넘을 수 없는 AI
한국은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빠른 정보기술(IT)의 중심국가로 자리 잡았고 줄기세포, 배아복제라는 단어를 전 국민이 알 정도로 생명공학기술(BT)에도 익숙한 나라가 되었다. ‘알파고’(AlphaGo)의 등장으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발달된 인공지능기술은 문화재 보존과학(Conservation Science)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보존과학은 문화재의 보존을 위해서 과학과 기술을 활용한다. 우리나라에는 1970년대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존과학연구실이 생기면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재질로 이루어진 문화재를 훼손되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를 위해 다양한 과학분야의 융복합적 적용이 필요하다.
인공지능기술이 문화재 보존과학에 적용되면 어떨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가 입력된 인공지능 컴퓨터는 스스로 터득한 기술을 적용하고, 문화재의 기대 수명을 예측해서 보존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결과 값을 제시할 수 있을까. 물론 어느 정도의 예상 범위는 정할 수 있겠지만, 문화재 보존의 역할을 인공지능 컴퓨터에게 온전히 넘겨줄 수는 없을 것이다. 문화재는 과거나 현재나 사람의 정밀한 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고 지극정성으로 다루어야 한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인간의 감성과 섬세함을 대신할 수 없는 분야가 있는데 문화재 보존과학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인공지능기술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다수의 과학자들은 미래사회에는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직업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재 보존과학분야에 인공지능기술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보존과학자를 꿈꾸는 이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문화재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인간의 두뇌와 섬세한 손기술이 필요하다.
4. [아시아경제][일터삶터] 주름살의 향방
올해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나의 주름살이다. 잔주름에 불과하던 것이 올해를 기점으로 그야말로 ‘인상’깊이, 남았다.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면서 궁금하거나 의심하거나 골똘해질 때 입가에 바짝바짝 힘을 주는 버릇이 생긴 탓이다. 일 핑계를 댔으나 주름이 놀라울 나이는 아니라, 더욱더 일 핑계를 대는 중이다.
평소 사람의 얼굴을 보는 편이다. 관상을 볼 줄 안다거나 루키즘을 신봉하는 건 아니고 나이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지라는 옛말을 (내가) 나이 들수록 실감한다는 뜻이다. 얼마나 칠하고 가꾸느냐와 상관없이, 사람의 얼굴이 무심코 귀띔해주는 정보에 덕을 볼 일이 점점 많아진다. 누구나 각양으로 타고난 이목구비를, 각색으로 쓰며 산다. 태어나기는 제 의지가 아니지만 쓰는 동안에는 제법 의지가 깃든다.
회자되는 말에서는 나이 마흔부터 책임지랬던가. 좀 무섭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무엇을 보며 살았는지, 무슨 말을 하며 살았는지를 얼굴이 알려준다니. 어떤 근육을 많이 써서 어디에 주름이 깊은지, 사물을 볼 때 눈동자를 어떤 각도로 사용하는지, 입을 열 때와 다물 때 어느 방향으로 입매가 기우는지가 세월과 함께 누적된다. 단순히 웃는 상이니 좋은 인상,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는 식은 아닐 것이다.
사실 좋은 사람이란 말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도 없다. 뭐가 좋은 사람인가. 나의 은인이 누군가에게는 죽일 놈인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그냥, 모두에게 좋은 소리 듣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좋은 인상도 마찬가지. 적절히 지긋한 나이에 매양 맑고 청순하기만 한 인상처럼 기이한 것도 없다.
내가 본 ‘어른의 얼굴’은 대체로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모질었는지, 거기에 어떤 마음보로 맞섰는지를 귀띔해주었다. 그 와중에 자존을 잃지 않으면서도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는 슬기를 부렸는지도. 얼굴에 남는다면, 당연히 몸에도 있을 거다. 걸음걸이, 앉는 자세, 손짓, 어깨와 발뒤꿈치조차 한 사람이 지나온 길을 재생한다. 몸과 마음은 대체로 분리되지 않는다.
온갖 군상의 얼굴이 떼로 나오는 청문회를 보고 있자니 여간 공력이 드는 게 아니었다. 들어주기 힘들어 소리를 꺼놓고 보아도 얼굴들에 밴 악취(또는 향취)가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살면서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 어리광 이상으로 대처해본 적이 없을 한 여성의 미간엔 오랜 신경질이 가득했다. 저와 제 가족의 안위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해본 적이 없는 주제에 공부머리 하나 믿고 사방을 호령하려 들던 한 남성의 눈동자엔 사특한 기운이 스쳤다.
그러나 명료한 문장만을 똑똑 끊어 말하던 한 여성의 단호한 입매에 나는 반했고, 재벌 총수의 뒤통수를 가로지르는 한 남성의 형형한 눈빛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리고 새삼, 이 모든 난장의 한복판에 계신 그분을 볼 때마다 얼굴에 무슨 이렇다 할 향기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졌으면서도 단 한 번도 오롯한 자신의 주름으로 살아본 적 없는 공허한 얼굴. 그게 철벽같은 이미지 관리 때문인 줄만 알았지, 진짜 마리오네트의 얼굴인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말이다.
해가 바뀌면 나이가 더해지는 나라에 살고 있으므로 올해의 나이로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새해에는 머릿속에 강령을 하나 새기고 맘을 다잡으려 한다. ‘(올해부터) 주름살의 향방은 주름살 주인에게 달려 있다.'
5. [경향신문][문화와 삶] 밥 딜런과 ‘세월엑스’
올해 문화예술계의 빅뉴스 가운데 하나는 모던 포크 가수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었다. 수상 소식이 알려진 이후에도 밥 딜런이 과연 이 상의 수상자로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는 가수인가, 시인인가? 분명한 것은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대변되는 시대정신이 ‘읽는 텍스트’에서 ‘듣는 텍스트’로의 문화사적 전환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듣는 텍스트’란 말하듯 쓰여지는, 혹은 실제로 말을 하는 언어 텍스트를 뜻한다. 우리는 온갖 사적인 감정과 뉘앙스가 표현된 카톡 메시지와 페북 메시지를 ‘읽지’ 않고 사실상 ‘듣는다’. 같은 은유적 맥락에서 우리는 신문기사를 읽는 것보다 그 아래 어딘가에 모여서 분노하거나 빈정거리고 있는 댓글의 ‘목소리’를 더 즐겨 ‘듣는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손가락 끝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소리가 나는 동영상 속 메시지들을 우리는 실제로 듣는다.
발터 베냐민이나 월터 옹과 같은 이들이 ‘기술복제시대’와 ‘2차적 구술시대’라고 일컬었던 새로운 시대의 본격적 개막은 20세기 말까지도 지체되다가 ‘디지털혁명’을 겪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그 잠재력을 활짝 발휘하고 있다. 그 핵심에는 수평적으로 만나 감성적으로 대화하는 언어가 있다.
듣는 텍스트의 시대에 모든 언어는 노래가 된다. 전통적으로 노래의 정치적 힘은 특유의 공유가능성과 전달력에 있었다. 노래 속 언어는 쉽게 기억되는 운율을 통해 의도된 메시지를 더 많은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보다 훨씬 간편하고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 수단을 가지고 있다면 굳이 전통적 노래 형식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최근의 촛불 정국에서 새로운 민중가요가 예전처럼 활발하게 만들어지거나 불리지 않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를 수단으로 한 정치적 메시지는 더 이상 노래가 아니라 감성적 언어 그 자체로도 널리 퍼져나갈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 링크된 동영상 속 누군가의 정치적 발언, 재치와 풍자를 담은 시국 관련 편집 영상들은 수천 수만명이 공유하는, 그 자체로 새로운 ‘민중가요’다. 그것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새롭게 불러지고 들려지는 ‘밥 딜런의 노래’인 셈이다.
전통적 노래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감성적 언어라고 해서 논리나 과학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며칠 전 유튜브로 공개된 ‘자로’의 다큐멘터리 ‘세월엑스’는 이 새로운 감성적 언어의 불온함이 오히려 합리성과 상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 다큐멘터리의 화자는 흔한 내레이션을 쓰지 않고 자막의 텍스트만으로 우리에게 친밀하게 말을 건다.
대화체의 반말을 쓰는 파격과 함께 그는 다음과 같은 다큐 제작의도를 밝힌다. “미리 하나 말해둘게. 나는 세월호 사고 원인을 잠수함 충돌로 단정하는 게 절대 아니야. ‘외력’ 존재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절실함을 느끼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이 다큐를 만든 거야.” 이어서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이 자막으로 한 단어씩 조심스럽게 ‘들려온다’. “하지만/ 솔직히/ 너무 두려워.” 러닝타임이 무려 8시간49분에 달하는 ‘세월엑스’는 듣는 텍스트 시대의 방대한 연구 논문인 동시에 새로운 양식의 감성적 서사시이자 서정가요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이 새로운 디지털시대의 ‘밥 딜런’들이 내는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들이 요구하는 ‘합리적 공감’의 장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서글픈 일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듣는 힘이 약해진다. 청각이 노화되어 높은 주파수의 음들이 잘 들리지 않는 것이 한 가지다. 하지만 그런 생물학적 차원에서만 못 듣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사회적 청력은 더욱 감소한다. 옛 성현들은 이 사실을 간파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성인(聖人)’이라는 한자에 ‘귀’ 모양을 새겨 넣었을까? 위기 상황에서도 ‘서면보고’를 고집하고 질문과 대답을 회피하던 대통령, 은밀하게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청와대 비서진과 공직자들, 그 구태를 청산하고 한국인들 모두 새해에는 잘 듣고, 터놓고 대화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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