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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올리는 자료로 상업적 목적은 없으며 선정된 사실의 정치적 성향은 블로그 운영성향과 무관합니다.
주요 신문사설
[이데일리]
1. 혼돈과 아쉬움 속에 한 해를 보내며
세밑이면 흔히 동원되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표현이 올해처럼 딱 들어맞는 해도 별로 없을 듯하다. 지금 같은 엄청난 정치·사회적 혼돈과 아쉬움으로 한 해를 보내기는 아마도 6.25 이후 처음일 게다. 한 해 내내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나라 안팎에서 연이어 터졌고, 국민들은 그때마다 가슴을 졸여야 했다.
신년 벽두부터 잇따라 감행된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도발이 험난한 여정의 신호탄이었다. 정부가 개성공단 폐쇄라는 초강수에 이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대응 수단으로 제시했으나 격렬한 찬반 논란 끝에 갈등의 불씨를 안은 채 새해를 맞게 됐다. 조선·해운 구조조정 등으로 경제가 어수선한 가운데 치러진 4·13 총선은 이른바 ‘친박(親朴) 패권’에 염증을 느낀 지지자들의 이탈로 새누리당이 참패하면서 16년 만의 여소야대 국면을 연출하게 됐다.
뭐니뭐니 해도 압권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다. 지난 9월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관여 의혹으로 언론에 처음 등장한 최씨는 상상을 초월하는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비선실세’로 지목되면서 국민적 분노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 헌정 사상 2번째로 탄핵 심판대에 오르는 신세가 돼 버린 것이 그 결과다.
사태가 이어지면서 국정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으로 변하고 말았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미국 대통령 당선 등으로 포퓰리즘이 국제사회를 휩쓸며 우리 안보와 경제를 위협하는데도 외교는 구심점을 잃은 채 허둥댔고, 중국의 사드 보복에도 손을 못 쓰는 딱한 처지에 이르렀다. 수출·소비·투자가 절벽에 부딪혔고 조류인플루엔자(AI)가 전국을 초토화해도 당국이 제대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바람에 국민들이 우려와 혼란에 빠져 있다.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박 대통령 잘못이다. 혈세로 움직이는 정부의 공조직을 제쳐두고 한낱 시정의 여인네에게 휘둘리며 불통으로 일관한 오만은 어떤 변명으로도 수긍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권 쟁취에 눈멀어 청와대의 실정을 방조하고 나아가 화를 더 키운 데 있어서는 정치권도 오십보백보다. 위정자가 국민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위정자를 걱정하는 상황이 또다시 되풀이돼선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다. 정치권의 맹성을 촉구한다.
2. ‘시한부 정책’으로 위기 극복할 수 있겠나
내년 경제가 걱정이다. 정부는 어제 발표한 ‘2017년 경제정책방향’에서 내년 경제성장률을 기존 3.0%에서 2.6%로 0.4%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2%대 전망은 외환위기 때인 1999년 이후 처음이다. 정부 예상대로라면 지난해와 올해 연속 2.6%에 이어 내년까지 3년 연속 2%대의 저성장이 고착화하는 모양새다. 취업자 증가 폭도 30만명에서 26만명으로 낮춰 잡았다. 모든 전망을 올해보다 비관적으로 내다본 정부 예측은 우리 경제의 암울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부는 공격적 경기부양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재정지출 13조원, 정책금융 8조원 등 20조원 이상 규모의 재정을 투입하기로 했다. 내년 전체 예산의 31%를 1분기에 조기 집행하는 등 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한다는 것이다. 17조원을 투입해 6만명의 공공부문 신규채용을 비롯해 청년·여성에 대한 고용 인센티브 강화로 일자리도 크게 늘리기로 했다. 공공·노동·금융·교육 등 4대 구조개혁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면서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해 미래 성장동력도 키우겠다는 복안이다.
단기적으로 경기를 부양하면서 장기적으로 미래 성장기반을 확충하겠다는 정책방향에는 일단 찬성할 만하다. 하지만 현재의 절박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에는 미흡하다. 저성장 고착화를 탈피할 큰 그림도 보이지 않고, 획기적인 소비 및 투자 활성화 대책도 눈에 띄지 않는다. 내수와 수출회복 방안 등도 늘 듣던 얘기들이다. 내년 새 정부가 들어서면 경제정책의 밑그림 자체가 바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시한부 정책’임을 자인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글로벌 저성장 추세에 미국의 금리인상과 보호무역주의 기조 강화, 중국의 성장 둔화 등 대외 여건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여기에 탄핵정국 불안이 겹치면서 기업들은 투자를 꺼리고 수출 부진을 보완해주던 내수 회복세도 주춤하고 있다. 유가상승, 가계부채 상환부담, 부동산 활력 약화 등도 악재다. 경제 앞날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럴 때일수록 경제 리더십이 중요하다. 유일호 경제팀은 자리에 있는 날까지 경제만큼은 살리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경기회복과 민생안정에 집중하길 바란다.
[서울신문]
3. 외풍에 흔들리는 국민연금 독립성 강화를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국민연금이 찬성을 하도록 압박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국민연금은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이라 장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국민연금 운용을 주도했던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으로부터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당시 보건복지부의 압력이 있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했다.
합병 찬성을 가결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들도 반드시 찬성 가결돼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의결권을 행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위원회 회의는 ‘너는 찬성하고 너는 반대하라’는, 사전에 정해진 대로 각본에 따라 움직인 것으로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삼성그룹의 숙원이었던 ‘이재용 체제’로의 경영권 승계를 수월하게 해 주는 절차였다.
합병이 성사된 다음날 삼성은 최순실 모녀 소유인 독일 법인 코레스포츠와 220억원 상당의 승마 계약을 맺었다. 국민연금이 삼성의 고민을 해결해 줬고, 삼성은 최씨 모녀에게 거액을 제공한 셈이다. 삼성이 “합병 건은 경영권 승계와 상관없이 경영 논리에 기반을 둔 결정”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으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찬성이 ‘윗선’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외압의 진원지는 곧 밝혀질 것이다. 특검이 칼끝이 문 전 장관과 안종범 전 수석을 넘어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경유착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이런 ‘거래’에 국민연금이 동원됐다는 사실이 기가 막힌다. 국민연금은 노후를 걱정하는 국민이 기댈 마지막 의지처다. 서민 목숨 줄 같은 기금을 정경유착의 도구로 사용했다니 국민의 공분을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참에 정권의 돈주머니쯤으로 여기는 국민연금의 운용 체계를 혁신해야 한다. 특검 수사에서 밝혀지고 있듯이 수백조원의 국민연금 기금을 주무르는 기금운용위원회는 기금 운영 전문가도 없을뿐더러 정부안 거수기에 불과하다. 기금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무엇보다 조직이 독립돼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전문가를 데려와도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에 불과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기금운영본부를 독립시켜 자본시장 논리에 따라 투자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공단 이사장, 복지부 장관, 청와대의 눈치를 보는 3중 구조다. 조직 독립과 함께 임기를 보장하고 성과만 갖고 따지는 시스템 구축이 절실하다.
4. 민관 협력으로 과도기 경제 난국 헤쳐 나가야
정부가 어제 1999년 이후 처음으로 2%대 성장 전망을 내놨다. 정부가 내놓은 ‘2017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내년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애초 제시했던 3.0%에서 2.6%로 0.4% 포인트 하향 조정한 것이다. 전망대로라면 한국 경제는 2015년 2.6%, 올해 2.6%에 이어 3년 연속 2%대 저성장에 머물게 된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수준으로 후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구조조정과 미국 금리 인상 등 대내외 위험 요인에 대응하면서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일단 정치권에서 요청한 내년 상반기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은 없던 일로 했지만 내년 초에 가능한 모든 재원을 동원해 21조원 이상 규모의 재정을 집행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정부가 조기 대선 가능성까지 고려되는 불확실한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비정규직 안정화 대책이나 고용 확대 투자 시 세액 공제를 확대하는 등 다양한 경제 활성화 조치를 내놓고 있지만 기존의 정책들을 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재정의 조기 집행에 방점을 찍은 내년도 경제정책은 조기 대선을 겨냥한 것으로 자칫 경기가 반짝 회복했다가 2분기에 꺼질 우려도 있다. 2분기 이후로 예산이 부족해 경기가 반 토막 나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내년 중 정부가 바뀔 가능성이 있는 만큼 차기 정부와의 정책적 연속성에 신경을 써야 한다. 자칫 정책의 초기 단계에서 중단돼 예산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그나마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해 신성장 동력 확충 방안에 공을 들인 흔적은 있다. 민관 합동으로 ‘4차 산업혁명 전략위원회’를 신설해 경제·사회 전반의 혁신을 추진하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전시성 행정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 경제가 일시적 경기변동상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경쟁력 상실로 인한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우리 경제의 두 축인 수출과 내수의 동반 침체는 소비와 생산의 부진으로 이어져 장기 불황을 초래할 수 있다. 미국의 추가 금리 인상과 세계적 보호무역 추세도 우리 경제에 커다란 위험 요소다. 저출산·고령화로 경기 활력이 급락하는 상황에서 산업 전반에 대한 구조 개혁이 절실하다.
새로운 고부가가치 산업이 등장하지 않는 한 지속적인 성장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난해 막대한 적자재정을 통한 단기 경기부양과 통화정책을 펼쳤지만 근본적 위기 극복에 실패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산업 재편 등을 통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시행하면서 새로운 고부가가치 분야로 투자와 생산을 늘려야 한다. 우리 경제는 지금 비상사태나 다름없다. 관료 조직은 정치적 과도기에 중심을 잡고 적극적 정책 대응에 나서야 하고, 정치권은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경제의 발목을 잡아선 안 된다.
5. 대·중소기업 고용 미스매치 대책 고민하라
고용절벽이 깨지고 취업 한파가 풀릴 날을 기다리기조차 버거운 현실이다. 청년 실업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국내 사정은 경기 악화 속에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데다 혼란스런 정국까지 맞물려 대기업들의 긴축 경영이 노골화되고 있다. 반면 뿌리 산업을 지탱하는 중소기업들은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힘겨워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인력 양극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고용노동부가 그제 내놓은 ‘2016년 10월 기준 하반기 직종별 사업체 노동력 조사’를 보면 구직자들이 선호하는 대기업의 시장 분위기는 어둡기 짝이 없다. 300인 이상 기업의 4분기와 내년 1분기 채용 계획은 3만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9%인 3000명이 줄었다. 대기업의 문턱을 넘기 위한 경쟁이 올해보다 더 치열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중소기업은 30만 4000명으로 1만 2000명 증가했다. 수치만 본다면 긍정적이다. 그러나 중소기업들의 적극적인 구인 활동과는 달리 인력을 충원하지 못하는 비율이 14.3%에 이르고 있다. 대기업 미충원율 5%의 거의 세 배다.
무엇보다 대기업들이 대내외 나쁜 여건 속에 잔뜩 움츠리고 있다. 투자 예측이 어려운 이유다. 올해 투자는 지난해보다 20% 넘게 감축된 탓에 현 수준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채용 규모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실업률 증가는 가계소득 감소로 이어져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린다. 정부가 내년도 성장 전망치를 2.6%로 낮춘 것도 이런 요인을 고려해서다. 내로라하는 국내 대기업들은 최순실 국정 농단에 휘말려 조직 개편과 인사까지 미루고 있다. 내년 채용 계획도 세우지 못한 곳도 있다. 까닭에 대기업의 문을 두드리려는 젊은이들의 속은 타고 있다.
정부는 중소기업 취업자들의 장기 근속을 유도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우선 대기업과의 임금 수준 등 근로 조건의 격차를 최대한 좁힐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중소기업의 인력 충원이 안정화될 수 있다. 대기업들은 어렵더라도 신규 투자를 늘려 고용을 확대하는 적극적 경영이 궁극적으로 시장 수요를 키워 수익을 증대시키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따로 없다.
[동아일보]
6. 적극적 경기부양 예고한 정부, 위기관리부터 철저히 하라
정부는 어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 경제장관회의에서 ‘2017 경제정책방향’을 확정하고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올 6월 내놓은 3.0%보다 0.4%포인트 낮은 2.6%로 하향조정했다. 연간 성장률 전망치를 2%대로 제시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이후 18년 만에 처음이다. 전망치대로라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015년부터 내년까지 3년 연속 2%대 저성장에 그친다. 탄핵 정국에 따른 정치적 경제적 불확실성까지 감안하면 내년 2.6% 성장도 가능할지 의문이다.
기획재정부는 소비 투자 수출 일자리의 동반 부진과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대두 등에 따른 복합적 경제 난국에 대응하기 위해 내년 초부터 적극적 경기부양책을 쓰겠다고 밝혔다.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조기집행, 공공기관 투자, 정책금융 확대 등을 통해 21조 원 규모의 ‘재정 보강’을 시행하고 1분기 재정 집행률을 사상 최대치인 31%까지 높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재정 보강이 가져올 경기부양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내년 상반기 추가경정예산 편성 불가피론도 나오지만 나랏빚을 늘리는 ‘추경 중독’은 경계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소추와 경제부총리 혼선으로 예년보다 2주가량 늦게 발표된 내년 정책방향에서 과감한 규제 혁파나 진입장벽 철폐를 통해 경제 회생에 도움을 줄 획기적 대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기존에 발표된 정책의 재탕도 많았다. 규제 완화와 구조 개혁을 통한 경기 활성화가 어려운 것은 정부 탓만도 아니다.
국회에 제출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규제프리존특별법, 노동개혁법안만 통과되더라도 소비와 투자 심리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한 발짝도 못 나가는 것이 현실이다.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 계획이 그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불허 결정으로 사실상 무산된 것도 안타깝다. 미국 스위스 중국 일본 등 해외 각국이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곳곳에 산악 케이블카를 설치해 운영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2017년은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지 꼭 20년이 되는 해다. 각종 경제지표가 나빠지고 있는 가운데 노동 개혁이나 산업구조 개혁이 표류하고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모습도 비슷하다. 여기에 해외발(發) 악재까지 덮치면 ‘제2의 외환위기’ 같은 심각한 국가적 경제위기를 맞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는 독자적으로 가능한 시행령 개정을 통해서라도 잠재성장률 제고에 힘쓰면서 무엇보다 위기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외풍(外風)에 취약한 경제구조를 감안할 때 해외발 위기 발생 시 최후의 방파제인 외환보유액을 충분히 갖춰야 한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국과의 통화스와프 재개나 연장, 외국인 투자가의 대거 이탈 방지책을 추진하면서 경제외교에도 한 치의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7. 반기문 향해 “말년 험하게…” 협박한 국정원 출신 의원
국가정보원 출신인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민주당 서울시당의 팟캐스트인 ‘서당캐’에 출연해 내년 대선에 출마할 예정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입에 담기 힘든 협박성 발언을 쏟아냈다. 김 의원은 “말년 험하게 되고 싶지 않으시면 명예를 지키는 게…괜히 저를 나쁜 놈 만들지 마시고…전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조폭의 협박성 발언처럼 들린다.
김 의원은 국정원에서 인사처장을 지내는 등 20년간 인사 관련 업무를 다뤘기에 국내 주요 인사들에 대한 많은 비밀 정보를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직원법은 ‘직원은 재직 중은 물론 퇴직한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며 이를 위반할 시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김 의원이 함부로 누설했다간 국회의원직을 잃게 되는 법적 처벌을 각오해야 한다. 법 위반 여부를 떠나 국가의 재산인 정보를 사적으로, 그것도 사악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공직 윤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 의원은 4·13총선 당시 문재인 전 대표에 의해 영입된 ‘문재인 키즈’다. 그는 팟캐스트에서 “저보고 알아주는 문빠라고 그러는데,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문 전 대표가 그를 발탁한 것은 대선을 염두에 둔, 정보맨으로서의 활용 가치 때문일 것이다. 김 의원의 반 총장 관련 발언도 결국 그에 대한 보답 아니겠는가. 최근 대선 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반 총장이 문 전 대표를 누르고 1위로 올라서자 여기저기서 검증을 명분으로 금품 수수와 가족 관련 숱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인 국정원 직원은 뜨거운 애국심과 열정으로 국가안보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을 최우선 임무로 삼아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정치로부터 초연해야 한다. 현직 직원의 정치 개입은 법으로 금지돼 있지만 퇴직 직원의 정치권 진출도 제도적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이 국정원 출신을 마구잡이로 발탁하고 국정원 출신이 특정 정치세력의 ‘사냥개’ 노릇을 한다면 정보기관의 정치 오염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매일신문]
8. 야당의 전직 대통령 묘역 ‘선별 참배’, 배제와 분열의 정치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내년 1월 1일 서울 국립현충원을 방문하면서 현충탑과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만 참배한다고 한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은 참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이유에 대해 양당 관계자들은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촉박한 일정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민주당은 문재인 전 대표가 지난해 2월 당 대표로 선출된 뒤 이`박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고, 추미애 대표 역시 지난 8월 취임 뒤 같은 묘역을 찾았으며, 국민의당도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가 지난 1월 당 대표로서 첫 행보로 전직 대통령 묘역을 모두 참배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촉박한 일정’이란 이유를 내세우지만 ‘선별 참배’로 바뀐 데에는 분명한 ‘정치적 의미’를 읽을 수 있다. ‘탄핵 정국’으로 보수층이 분열되고 힘이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보수층을 끌어안기 위한 행보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쯤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야당의 전`현직 대표가 이`박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것은 마음에도 없는 ‘퍼포먼스’였으며, 거기서 한 말 역시 진심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 문 전 대표는 “전 대통령 묘역 참배를 둘러싼 갈등을 끝내고 국민 통합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추 대표도 “독재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게 하되, 공과를 그대로 존중하는 것은 바로 국민 통합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야당의 이런 변덕은 경박함을 넘어 문 전 대표와 추 대표의 말 그대로 국민 통합을 저해하는 것이다. 이`박 전 대통령을 싫어하는 국민도 있지만 존경하는 국민도 있다. 두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지 않겠다는 것은 이들 두 국민의 분열을 앞장서 조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야당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대선 전략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4당 체제로 대선이 치러질 경우 표가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른바 ‘집토끼’만 잡으면 이길 가능성이 높다. 야당이 ‘선별 참배’로 돌아선 것은 이를 계산한 것이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집토끼의 입맛에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제와 분열의 정치는 수권 능력과 자격에 대한 불신을 키울 수밖에 없다. 야당의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9. 서문야시장 영업 재개, 순리대로 원만하게 풀어야
서문시장 4지구 화재가 발생한 지 30일로 꼭 한 달째다. 지난 한 달 동안 당국의 화재 원인 조사와 발표, 4지구 철거와 신축 계획, 대체상가 논의와 결정 등 많은 일들이 진행됐다. 하지만 이번 화재로 피해를 입은 4지구 상인들의 충격은 여전하다. 이들의 허탈한 심정은 대구 시민이면 누구나 충분히 이해하고 또 공감한다. 그러나 새해를 코앞에 두고 이제는 피해 상인도 허탈한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기운을 내 복구에 힘을 내야 할 단계임은 분명하다.
야시장 재개장 문제도 그중 하나다. 80여 개 점포 200명의 야시장 상인들은 화재 직후 피해 상인과 아픔을 함께하는 뜻에서 영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공백이 길어지면서 야시장 상인들마저 생계에 어려움을 호소하며 또 다른 후유증을 낳고 있다. 다시 문을 열자니 야시장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냉랭한 시선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
야시장이 생기면서 심야 시간대 화재 위험이 커졌다는 4지구 상인의 주장도 무리는 아니다. 비상대책위원회가 야시장 상인들이 모은 성금을 거절한 것은 불편한 감정 표현의 측면도 있지만 보다 철저한 안전대책을 요구하는 뜻도 담겨 있다. 이 점은 앞으로 야시장 상인과 대구시가 경각심을 갖고 안전대책을 확실히 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화재는 불행한 일이나 문제는 순리대로 풀어야 한다. 감정대로 마냥 야시장을 외면한다면 상인 간 불화의 골이 깊어지는 등 더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그동안 서문시장 화재 피해 복구를 위해 전국 각계각층에서 수십억원의 성금을 모았고 계속 성금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대구 시민뿐 아니라 온 국민이 피해 상인과 아픔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이제 4지구 상인들도 야시장의 처지를 이해하고 받은 만큼 따뜻한 정을 나눠야 할 때다.
많은 국민들이 피해 상인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고 복구 성금을 모아 보내는 마당에 야시장 영업 재개를 백안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피해 상인과 아픔을 함께하는 시민의 뜻과 여론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대구시도 입장을 빨리 정리해 새해에는 많은 시민이 야시장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적극 중재하고 결단해야 한다.
[중앙일보]
10. 국민의식과 거꾸로 가는 수준 낮은 정치들
촛불혁명의 성공 요인은 사실성·평화성·제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최순실이 사용한 태블릿PC를 증거로 제시하고(사실성), 수백만 군중이 두 달간 모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며(평화성), 헌법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탄핵(제도성)이 국민의 높은 정치수준을 보여줬다. 그런데 세밑 정치권은 사실보다는 음해, 평화보다는 파괴, 제도보다는 편의에 따라 춤추고 있다.
서울 서초갑의 이혜훈 의원은 엊그제 “(자신의 지역구 경쟁자인) 조윤선 문체부 장관이 최순실을 여왕님처럼 모시고 다녔다는 재벌 사모님들의 증언을 들었다”고 폭로했다 조 장관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조 장관은 “천번 만번 물어봐도 내 대답은 같다. 최순실이란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얘기해 본 적도 없다”고 반발했다. 3선 의원과 현직 장관이 ‘여왕님처럼 모시고’라든가 ‘천번 만번 물어봐도’ 같은 극단적 표현을 동원해 싸움하듯 달려드는 건 민망하기 짝이 없다.
이 의원의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 제보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은 채 ‘아니라면 당신이 증거를 대보라’는 식의 폭로라는 점에서 음해 정치의 냄새를 남긴다. 또 충북 음성이 지역구인 새누리당 경대수 의원은 “반기문 유엔 총장이 정하시는 길로, 공산당만 아니라면 어디로든 따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진로를 국익이나 정책 철학이 아니라 특정인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정하겠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새해 첫날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참배 대상에서 빼겠다고 한 것도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지지층 결집이 손쉬워지자 친일·독재 청산 프레임으로 대선을 치르겠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수권정당을 자임하면서 대한민국 역사성과 국가의 계속성을 부정하는 자가당착일 뿐이다. 지난 8월 추미애 대표가 국민통합을 위한다며 이승만·박정희 묘소를 참배했던 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민주당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편의적 태도에 역겹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주요 신물칼럼
1. [이데일리][목멱칼럼] '영화 속 주인공' 당당해질 때
영화가 어떻게 변주되는지 짚어보는 것도 재밋거리이다. 서부영화가 그렇다. 한때 세계는 정의의 총잡이가 무법자와 비장한 대결을 벌이는 미국 영화에 열광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도 최측근과 함께 서부영화 보기를 즐겼다.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1954년에 서부영화의 구도를 16세기 말엽 일본에 투사해서 ‘7인의 사무라이’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거꾸로 할리우드의 흥미를 끌었고, 그 결과 나온 작품이 배경과 장소를 19세기 미국으로 변주해서 존 스터지스 감독이 율 브리너 등 당대의 최고 흥행배우 7명을 동원해 만든 ‘황야의 7인’이다. 동서양 대중문화가 경계를 넘나들며 영향을 주고받은 행복한 사례일 것이다.
1960년에 나온 ‘황야의 7인’이 올해 ‘매그니피센트 7’이라는 리메이크로 환생했다. 두 영화 사이의 간격이 두 세대에 가까우니,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변주가 없을 수 없다. ‘황야의 7인’은 백인 일색이지만, 매그니피센트한 7인에는 흑인, 멕시코인, 인디언, ‘동방에서 온 신비한 남자’가 끼어 있어서 백인이 오히려 소수파다. 그 ‘동방에서 온 신비한 남자’가 이병헌인 까닭에, ‘매그니피센트 7’는 작품의 완성도에 상관없이 우리의 이목을 끄는 영화가 되었다.
할리우드 영화에 한국 영화인이 나온다고 호들갑을 떠는 게 어느새 촌스러워 보일 만큼 한국 영화인의 세계 진출이 많이 이루어졌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은 아예 외국에서 영화를 만들고 한국이나 한국인 배우가 비중 있게 나오는 외국 영화가 속속 선을 보인 터이다. 워쇼스키 감독의 2008년 작품 ‘스피드 레이서’에 비(정지훈)이 등장했고, 2012년에 ‘어벤져스 2’에서는 주인공들이 아예 서울에서 악당과 대결을 벌이는 판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한국 배우의 캐릭터에 서양의 편견이 배어 있다며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뤽 베송 감독이 스칼렛 조핸슨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든 2014년 작품 ‘루시’에 최민식이 미스터 장이라는 악랄한 한국인 마약범죄조직 두목으로 나온다. ‘매그니피센트 7’만 해도 이병헌은 총알이 빗발치는 서부에서 어색하게도 칼을 쥐고 싸우는 캐릭터였다. 동양인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 개봉한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중국 배우 견자단은 비슷한 맥락에서 중무장 돌격대원 십수 명을 막대기 하나로 단숨에 때려눕히는 무예의 달인이면서도 굳이 장님으로 나온다. 동양인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타자는 대중 문화매체에서 나쁜 악한, 아니면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로 묘사된다.
한국인을 부정적으로 그린 영화는 적지 않다. 조엘 슈마커 감독이 마이클 더글러스를 주인공으로 세워 1993년에 만든 영화 <폴링다운>에서 로스앤젤레스의 한국인은 돈만 밝히는 한심한 존재로 나온다. 2007년에 나온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 코치>라는 영화에도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한국인 마사지숍 장면이 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문화 매체에서 우리와 다른 존재, 우리 건너 편에 있는 존재가 과연 제대로, 있는 그대로 그려지는지 돌이켜보면, 갑자기 멋쩍어진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서구인은 늘 거들먹거리고 동남아 사람은 늘 꾀죄죄하고 일본인은 늘 간사하다. 한국전쟁 영화에서 인민군은 철모가 아닌 헝겊모자를 쓰고 전투에 나서고, 중국군은 전략전술 없이 인해전술만 구사하는 개미떼로만 나온다. 임진왜란 영화의 왜군 장수들은 하나같이 죄다 인격이 망가진 조울증 환자이다.
김한민 감독이 2011년에 내놓은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만주족 장수 쥬신타(류승룡 분)는 악역이지만 나름대로 멋진 캐릭터여서 그가 주인공 남이(박해일 분)와 벌이는 대결이 더 재미있고 박진감이 넘쳤다. 하지만 김한민 감독의 2014년 작품 ‘명량’은 캐릭터 면에서 꽤 아쉬웠다. 왜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류승룡 분)는 새된 소리만 내는 싸이코에 지나지 않아 이순신과 벌이는 대결이 제대로 된 긴장감을 주지 못했다.
대중 문화매체의 완성도는 타자가 뒤틀리고 정형화된 이미지로 나올수록 떨어진다. 한국만이 아닌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는다면 흥행에도 좋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 뒤틀린다는 데 있다. 나를 제대로 안 보는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내가 남을 제대로 보는지 짚어보아야 한다.
2. [한국일보][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아이 셋 엄마
S가 아기 옷을 두 상자나 보내왔다. 원피스는 못해도 열댓 벌은 되었고 아기 내복에 신발도 열 켤레가 넘었다. 딸 둘을 키우던 S는 얼마 전 막내아들을 낳았다. 아들에게 물려줄 수 없는 여자아기 옷들로만 골라 내게 보내온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상자를 보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내 출산을 앞두고 그녀는 신생아 옷과 천기저귀를 보내주었다. 딸 둘을 키워낸 천기저귀는 매일매일 삶아 빨아 보들보들했다.
백일 즈음 쓰기 좋은 아기 의자도 보내줬는데 뒤늦게야 막내를 임신한 걸 알게 되어 나는 우리 아기 백일이 지난 다음 의자를 도로 보내야 했다. 번역가인 그녀는 첫 아기를 낳으러 가던 순간까지 원고를 부여잡고 있었다. 번역을 다 끝내고 출산을 하는 편이 나았지만 진통이 심해지자 더는 참지 못하고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요. 아기 낳고 와서 마저 할게요.” 편집자는 기겁을 했다. 번역이고 뭐고 당장 병원에 가라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펄펄 뛰었단다. 한 번도 아이 셋의 엄마가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던 그녀는 이제 농담처럼 자신과 닮은 아이 셋을 데리고 산다.
아이들은 꼭 한꺼번에 아파서 그녀는 새벽부터 혼자 병원엘 가서 예약을 미리 해두고 시간이 되면 아이를 업고 안고 걸리면서 병원에 다시 간다. 아이들을 입원실에 누여놓고 그녀는 아이고, 지겨워, 내가 이러려고 그 먼 독일까지 가서 공부를 하다 왔나, 한숨을 쉬지만 나는 남의 속도 모르고 그녀가 그렇게나 부럽다. 이렇게 아기가 예쁠 줄 알았으면 나도 하나 더 낳을 걸.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또 하나, 또 둘 더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러울까 말이다.
3. [서울신문][씨줄날줄] 옛 선박의 부엌/서동철 논설위원
지난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신안 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특별전은 충격이었다. 신안선은 1323년 중국 저장성 닝보에서 일본 하카타를 거쳐 교토로 가던 중국 무역선이었다. 1977~1983년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2만점의 도자기와 28t의 동전, 700점의 금속용구가 수습됐다. 무려 1만 2000점의 송·원대 도자기를 화물선 선적 당시처럼 포개어 놓은 특별전의 시각적 효과는 압도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신안선의 부엌에서 수습한 유물들도 인상 깊었다. 웍(wok)이라 부르는 중국식 튀김 냄비와 프라이팬, 주전자, 양념단지로 썼을 법한 항아리와 단지, 그리고 칼과 도마가 눈길을 끌었다. 오늘날 주방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주방용품들의 크기였다. 신안선에는 50~60명이 탔을 것으로 추정한다지만, 조리도구들은 많아야 6~7인 정도의 식사를 감당할 수 있는 크기였다. 화주(貨主) 쪽 승선 인원을 제외한 선원들만의 부엌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안선 발굴이 이루어진 뒤 고려시대 이후 우리 선박도 다양하게 조사됐다. 대부분의 화물선에서 선상 생활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특히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마도 1, 2, 3호선에서는 고려시대 음식 문화를 재구성할 수 있는 다양한 유물이 수습됐다. 세 선박은 목간(木簡)에 적혀 있는 명문(銘文)으로 난파 시점을 짐작할 수 있다. 1호선은 1208년 안팎, 2호선은 1219년 이전, 3호선은 1265~1269년으로 추정한다. 일반적으로 대나무로 만들었던 목간은 화물의 꼬리표였다.
음식 문화와 관련된 세 배의 공통점은 주방시설이 선박 중앙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 선박을 건조할 당시부터 부엌을 염두에 두고 불을 지필 수 있는 시설을 갖추지는 않았다. 대신 외부에서 널찍한 돌을 가져다 쌓아 불을 피울 수 있게 했다. 주방으로 추정되는 공간 주변에서 석탄과 솔방울이 집중 출토된 것은 석탄을 취사용 연료로 사용하면서 솔방울을 불쏘시개로 썼다는 증거다.
한두 가지 다른 양상이 보이기는 하지만, 철제 솥과 도제 시루, 철제 및 목제 국자, 도제 저장용기, 접시와 대접, 청동 숟가락과 청동제 및 목제 젓가락이 나온 것도 비슷하다. 높이가 80㎝에 이르는 도제 용기는 선상 생활에 필요한 담수를 저장하는 그릇이었을 것이다. 당시 젓가락이 널리 쓰였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다. 고려시대 전기 및 중기 무덤에서는 그동안 젓가락이 출토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전남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전시관에서는 ‘솥, 선상(船上)의 셰프’ 테마전이 열리고 있다. 수중고고학의 성과로 다양한 침몰선에서 수습한 솥이 어떻게 시대별로 변화했는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발굴 이후 보존 처리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뒤늦게 공개된 솥으로 지나간 시대 음식 문화의 일단을 짐작해 보는 기회다.
4. [서울신문][데스크 시각] 쓰촨 요리, 미국과 대만/이지운 국제부장
‘촨차이’(川菜)는 쓰촨(四川) 요리(菜)를 말한다. ‘매운 요리’가 특색으로, ‘훠궈’(火鍋)도 대표 음식의 하나다. 훠궈가 지금은 중국의 국민 음식이지만, 채 40년도 안 된 일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에야 사람과 물산의 이동이 가능했고, 훠궈도 함께 쓰촨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신장위구르 지역의 양고기 꼬치도 이무렵 상경(上京)한다. 덩샤오핑의 공이 한둘이 아니다.
1970년대 말 훠궈가 베이징에 처음 등장했을 때를 기억하는 중국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베이징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1호점이 생겼길래 한턱 내야 할 친구들과 호기 있게 찾아갔다가 음식 대부분을 남겼다고 했다. 욕에 욕을 하고 식당을 나왔는데, 얼마 안 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후 ‘현지화’한 싱거운 훠궈가 나왔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요즘 중화권에서 촨차이는 쓰촨 요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많은 이들이 우선 첫 음절 ‘촨’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떠올리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어로 ‘촨푸’(川普)로 읽히는데 발음이 좀 이상하긴 하다. 중국의 매체들도 ‘터랑푸’(特朗普)가 더 맞을 것 같은데 왜 촨푸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1차적으로는 티읕(ㅌ·t)과 치읓(ㅊ·ch)의 차이점을 짚은 것이다. 아마도 구개음화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하고 중국인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나무, 트리(Tree)가 ‘추리’쯤으로 발음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구개음화를 한국말과 영어, 중국어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트럼프의 발음에 구개음화가 적용된 데 대해 중국 매체들이 “대만식 표기법인 것 같다”고 해석한 것은 아이러니다. 두 번째 음절도 음식 ‘차이’(菜)와 같은 발음의 차이(蔡), 즉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촨차이가 트럼프와 차이잉원을 의미하는 ‘촨·차이’(川·蔡)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세계사의 숙명이 아닌가 싶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차이 총통과 전화 통화를 한 뒤로 베이징은 크게 자존심이 상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만큼은 중국 공산당에는 밑바닥 자존심의 문제다. 중국도 항모를 띄워 처음으로 서태평양까지 나가 무력 시위를 해 보긴 했지만, 매우 당황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니 그저 당하고만 있을 중국이 아니다. 이 다음부터는 워낙 많은 전망과 가설이 나와 있으므로 굳이 보태지 않겠다.
한국은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쓰촨 현지의 훠궈를 찾아 한번(다시) 맛보길 권한다. ‘매운 것은 맛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말을 거듭 실감할 것이고, ‘촨·차이’에 대한 베이징의 느낌을 확실하게 체감하게 될 듯하다. 지금 베이징은 40년 전 쓰촨에서 올라온 정체 모를 매운 맛보다 훨씬 더 강한 ‘촨·차이’를 경험하고 있다.
베이징은 이 강한 ‘통증’에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연말 베이징의 중간급 간부 하나가 서울로 들어와 대기업 사장급을 만나 사드를 ‘협의’하고 주요 정치인들에게 ‘조언’을 주고 있다 하니, 이 역시 통증에 대한 반응 중 하나일 것이다.
통증이 강할수록 반응은 여러 갈래일 수 있다.
2017년 어느 날 서울을 향해 갑자기 손을 내밀게 되는 ‘극단’도 우리는 대비해야 할지 모른다. 이럴 때 덥석 잡아야 하는지, 잠시 쭈뼛거리다 살짝 잡아야 하는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지도 궁리해 놓아야 한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장면일 수도 있어서다.
5. [서울신문][열린세상] 2017년, 어느 봄날의 편지/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사랑하는 당신, 오래 소식 전하지 못했습니다. 겨울이 물러가고 2017년에도 봄은 왔군요. 지구의 공전처럼 필연성에 대해 의문을 허용하지 않는 질서가 이 봄을 불러왔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봄을 얻은 일은 필연적 진리가 실현된 일처럼 감동적입니다.
탄핵의 오랜 과정 끝에 드디어 통치자가 파면됐습니다. 난데없는 기적 같은 게 아니라, 필연적인 봄의 행진 같은 일이지요. 헤아려 보면 지난해 끝자락부터 매주 광화문의 성벽 앞에서 이루어진 촛불집회는 멋진 공성전 같았습니다.
물론 폭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우애와 질서와 평화를 무기로 삼은 공성전이었지요. 이런 멋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공성전을 줄곧 ‘맥베스’, ‘스피노자’, ‘아이들’이라는 단어를 맴돌며 체험했습니다. 이 세 단어는 제가 과거, 현재, 미래를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과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정치 드라마가 아닌 것이 없지요. 특히 ‘맥베스’가 그렇습니다. ‘맥베스’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올 법한 암살 음모를 담고 있는 드라마죠. 이 연극을 보다 보면 라면, 마티즈, 등산 등등의 단어가 마구 떠오릅니다.
결국 조국을 무덤으로 만들어 버린 투명하지 않은 권력은 온갖 폭력적인 술수로 자신을 보호하려 하다가 파멸합니다. 성에 고립된 맥베스가 최후의 국면으로 전진해 가며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이여!” 이렇게 말할 땐 이 말을 우리의 촛불 물결 앞에서 사라져 가는 통치자의 절규로 착각하게 되기도 하는군요. 성 안에 숨은 자의 잠 못 이루는 심리를 알려면 ‘맥베스’를 꼭 펼쳐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많은 시민의 공분을 야기하는 일에 대해서는 국가의 권리가 거의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공분 앞에서 권력은 정지돼야 하고 탄핵을 통해 사라져야 했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랐던 것은 바로 이 공분 앞에서 통치자와 그의 변호사들이 가졌던 태도였습니다.
이런 식의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법은 이성 및 인간에게 공통된 감정에 의해 지지되는 경우에만 파괴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 이성에 의해서만 방어되면 그것은 반드시 약해지고 쉽게 파괴된다.’ 이성과 더불어 법을 지지하는 인간의 저 공통된 감정을 우리는 민심(民心)이라 부릅니다. 통치자와 그의 변호사들은 이성의 장난(즉 궤변) 아래 숨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듯 처신했지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지난 정권들도 그랬다, 양으로 따지면 얼마 안 되는 잘못이다,
쟤가 그랬대요 식의 남의 탓, 세월호 때도 할 일 다 했다 등등. 저들은 법이 논리적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 공통된 감정에 의해 지지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른 듯합니다. 요컨대 법은 수학처럼 논리적이지만, 인간의 정서 없이도 작동하는 수학과 달리 인간학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모른 듯합니다. 법으로 입문해 정치로 나오는 자들 가운데 괴물들이 넘쳐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겠지요.
미래. 그러나 저는 아이들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나날을 징검다리처럼 건너왔습니다. 저는 촛불을 통해 통치자로부터 주권을 돌려받은 사건이 유년과 청년기의 기억에 깊게 뿌리 내린 아이들, 부모나 친구들과 광화문으로 토요일 나들이를 나온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겁니다. 자격 미달의 통치자로부터 위임했던 주권을 취소하고 회수하는 체험은 드문 것이죠.
저는 ‘국민이 주권자다’라는 가르침을 어린 시절 사회 수업에서부터 배워 왔지만 실은 잘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말만 국민 주권이고, 오히려 통치자가 주권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주권을 정당한 이유로 직접 회수함으로써 바로 스스로 주권자임을 입증하고 체험한 세대가 탄생한 것입니다. 주권을 직접 회수해 본 경험을 지닌 젊은이들은 4·19세대가 선물받았던 추동력 이상의 거대한 힘으로 향후 오랜 세월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이 편지를 2016년의 막바지에서 절망하고 놀라워하고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전달하고 싶어요. 조금만 더 참으세요. 모든 일은 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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