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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올리는 자료로 상업적 목적은 없으며 선정된 사설의 정치적 성향은 블로그 운영성향과 무관합니다.




주요신문사설


[매일신문]

1. 새누리당의 당명 변경, 국민 눈속임이 아니어야

재창당을 추진 중인 새누리당이 당명과 로고, 당색을 모두 바꾸기로 하고, 설 연휴 전에 당명을 공개 모집하기로 했다. 이로써 지난 2012년 2월 2일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바뀐 지 5년 만에 새누리당이란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변경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박근혜당’이나 마찬가지인 지금의 당명으로는 차기 대선 승리는 고사하고 당의 존립 자체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당명 교체로 새누리당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례로 보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꿀 당시 한나라당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다. 박희태 전 대표의 당 대표 경선 돈 봉투 사건이 터졌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의원이 저축은행 회장들에게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2011년 10`26 재보선에서도 패배했다.



이런 위기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당명을 바꾸고 새 정강`정책도 만들었다. 하지만 국민은 바뀐 이름에 걸맞은 혁신을 체감하지 못했다. 간판만 바꿔단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당명 교체 후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했고, 그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 대선에서도 이겼다.



새누리당은 이런 기억을 깨끗이 잊어야 한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천양지차다. ‘최순실 사태’로 새누리당은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지난해 12월 대구경북시도당에서 시민들이 당 간판에 ‘내시환관당’ ‘정계은퇴당’ ‘주범이당’이란 스티커를 붙이며 조롱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새누리당의 ‘안방’이 이러니 다른 지역의 민심이 어떨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당명을 바꾼다고 해서 떠나간 민심이 되돌아올 리 없다. 오히려 얄팍한 국면전환용 분식(粉飾)으로 비칠 수 있다. 결국 관건은 당명 변경이 아니다. 진정으로 새로 태어나겠다는 의지와 그 실천이다. 지금까지 여야를 막론하고 당명을 바꾼 이유는 똑같았다. 대부분이 당장의 위기 탈출을 위한 신장개업(新裝開業)이었다. 새누리당의 당명 변경이 또 하나의 신장개업에 그친다면 새누리당의 운명은 보나마나다.



2. 롯데 사드 협약, 중국 눈치보다 나라와의 약속이 먼저다

국방부가 16일 주한미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위한 성주 롯데스카이힐골프장과 남양주 군용지를 맞교환하는 계약이 늦춰질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종전 올 1월 중 교환계약이 체결될 것이라고 했던 발표와는 다르다. 이는 최근 사드의 롯데 소유 골프장 배치와 관련, 중국 진출 롯데 관련 기업에 대한 중국 당국의 세무조사 등 일련의 보복 조치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롯데는 국가 경계를 넘어 여러 기업을 경영하는 국내의 대표적인 대기업의 하나이다. 그런 만큼 진출한 국가와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기업은 대규모 투자에 따른 위험 감수와 함께 이윤 창출에 목을 맨다. 중국에 여러 기업을 둔 롯데로서는 사드의 한국 특히 롯데 소유 골프장에 대한 배치를 반대하는 중국 입장을 나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세무조사와 같은 중국 당국의 직접적인 압박에 따른 손실과 기업 이윤의 침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탓이기에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롯데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제 나라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린다면 이는 심각히 받아들여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럴 일은 없다고 믿고 싶지만 지금 정황을 살펴보면 롯데의 태도에 의심의 눈길을 감출 수 없다. 이미 롯데는 지난해 국방부와 사드를 배치할 성주 골프장과 남양주 군용지를 교환한다고 합의했다. 국방부 역시 지난해 11월 이런 사실을 공표하고 지난해 말까지 골프장을 인수받아 늦어도 올해 10월까지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계획을 나라 안팎에 공식 발표했다.



가뜩이나 국내 정치권에서는 사드 찬반으로 국가 안보를 담보하려는 정부를 어렵게 하고 있다. 롯데마저 국익보다 기업 이윤에 매몰돼 국가와의 공적인 약속조차 깨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는 지난해 롯데그룹 경영 비리 수사가 신격호 사주 일가의 불구속으로 마무리된데다 지금 대통령 업무정지의 국정 혼란을 틈탄 계산으로 비칠 수 있다. 그렇다면 분명한 오판이다. 제 나라와의 약속도 어기는 롯데 기업을 중국이 곱게 볼 턱이 없어 두 나라의 신뢰를 모두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롯데가 현명한 판단을 할 때다.



[매일경제]

3. 삼성 신뢰도 추락에 대한 외신의 우려 착잡하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1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주요 외신들은 일제히 "삼성의 글로벌 신뢰도에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해외 언론들이 쏟아낸 삼성 가치 추락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커 착잡함을 금할 수 없다.



WSJ는 "세계 최대의 스마트폰 메이커의 리더가 한국의 부패 스캔들에 걸려들었다"며 "갤럭시 노트7 대량 리콜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삼성전자가 리더십 공백에 직면하게 됐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최소한 올해 말까지는 대규모 인수·합병(M&A) 결정을 미뤄야 할 것"이라면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와병으로 인한 경영 공백에 더해 또 하나의 거대한 충격"이라고 보도했다. 블룸버그는 삼성그룹의 승계와 리더십에 우려 섞인 시선을 보냈고, 니혼게이자이신문도 M&A 등 중요한 경영전략의 차질을 예상했다.

박영수 특검팀은 경제적 파장에 대한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국가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구속 수사에 대한 이유로 정의 실현을 내세운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범죄 혐의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을 뿐 아니라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는 글로벌 기업의 리더를 구속하려는 데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의견이 팽배하다. 특검이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불구속 수사와 무죄추정원칙을 깬 것은 성과에 집착해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외신의 우려처럼 이 부회장이 구속될 경우 삼성의 초일류 기업 명성과 혁신의 이미지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지난해 500억달러를 돌파해 글로벌 시장에서 7위다.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만으로도 반도체, 스마트폰 등으로 공들여 쌓아올린 브랜드 신뢰도에 치명타를 입게 됐다. 실제로 구속된다면 삼성전자 매출 타격뿐 아니라 한국 경제에 미칠 파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기업이 정경유착 혐의가 있다면 수사를 받고 혐의가 입증되면 처벌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특검이 밝힌 뇌물공여액 433억원에 미르와 K스포츠재단 출연금이 포함된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오늘 법원이 영장 실질심사를 통해 이 부회장의 구속 여부를 결정할 텐데 오로지 법과 원칙에 입각해 판단을 내리기를 기대한다.



4. 결국 `하드 브렉시트` 지구촌 고립주의 치닫나

영국 정부는 결국 유럽연합(EU)과 가장 거친 방식으로 갈라서기로 했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어제 EU 탈퇴 계획을 밝히면서 이른바 하드 브렉시트(hard Brexit)를 천명했다. 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완전한 홀로서기를 하겠다는 선언이다. 영국이 이민 통제와 무역협정 체결에서 더 이상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들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면 EU에 한쪽 발을 걸치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국과 EU는 2년간 이혼 협상을 거쳐 2019년 봄에 완전히 갈라선다. 작년 6월 브렉시트 투표로 영국의 EU 탈퇴가 결정된 후에도 시장에서는 영국이 이민 통제권과 단일시장 접근권을 놓고 어떤 식으로든 타협할 것이라는 기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양측이 거칠게 헤어지게 되자 시장은 다시금 충격을 받고 있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급락했다. 브렉시트 투표 직전 1.5달러에 가까웠던 파운드화는 이제 1.2달러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하드 브렉시트는 글로벌 경제에 새삼 충격파를 몰고 올 수 있다. 금융 허브 런던의 위상이 흔들리고EU 역내 교역이 움츠러들면 한국처럼 금융과 실물 경제 개방도가 높은 나라들이 가장 먼저 타격을 받게 된다. 브렉시트가 세계 교역과 자본 흐름에 불러올 혼란은 단기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가장 걱정스러운 건 그러지 않아도 갈수록 거세지는 각국의 보호주의와 고립주의 물결이 브렉시트를 계기로 더욱 거칠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1957년 6개국으로 시작해 28개국으로 확장한EU의 60년에 걸친 통합 작업은 브렉시트로 확실히 제동이 걸렸다. 상품과 자본, 사람과 기술의 자유로운 이동을 추구하는 세계화의 흐름은 이미 곳곳에서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주의와 고립주의가 더욱 강경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한 가운데 중국 시진핑 주석이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다보스에서 세계화를 옹호하는 장면은 역설적이다. 우리로서는 유럽과 미국에서 갈수록 활개칠 보호주의와 고립주의의 충격에 대비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국가 발전 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5. 美대사관 벽에 레이저빔, 그곳이 한국대사관이라면

박근혜정부 퇴진을 요구해온 촛불집회에서 일부 참가자들이 지난 14일 주한 미국대사관 벽에 'NOTHAAD'란 문구를 레이저 빔으로 비추는 일이 벌어졌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에 반대한다는 의미인데 촛불집회가 당초 취지에서 벗어나는 것도 걱정할 만하고 미국 대사관에 레이저 빔을 비추는 행위도 우려할 만하다.

민주주의 사회에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그런 의견들은 어디까지나 상대방을 존중하는 가운데 법과 규정 속에서 제시돼야 한다. 우리가 사드 배치를 결정한 이후 불만을 품은 중국이 온갖 보복 조치를 동원하고 있는데, 그런 조치들이 국제법을 위반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만약 중국인들이 베이징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이런 식으로 레이저 빔을 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레이저 빔과 3차원 홀로그램을 이용한 시위와 집회가 불법인지 아닌지를 놓고는 아직 논란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외교공관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에 따라 대사관 주변 100m 내에서는 집회를 금지하는 취지를 감안하면 외교 결례라는 지적과 국제법 위반이라는 논란을 언제든 불러올 수 있다. 

그러잖아도 우리는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북핵 문제에서부터 경제 통상에 이르기까지 한미 양국 사이 정책을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게 조율해야 할 때다. 또 사드 배치에 반발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세계무역기구(WTO) 등을 통해 국제 협정과 규범을 준수하도록 촉구하며 맞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롯데가 사드 배치에 용지를 제공하기로 했다가 지난해 11월 중국 현지에서 느닷없는 세무조사와 소방·위생점검을 당한 뒤 머뭇거리고 있는 것만 봐도 중국의 부당한 압박은 예사롭지 않다.

차근차근 국제 규범과 법률을 따져 대응해야 할 이 예민한 시기에 이른바 대선 주자들은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혼란을 오히려 가중시키고 있다. 여기에 촛불집회마저 국정농단 규탄이라는 당초 취지에서 벗어나 사드 배치 반대를 내걸고 공연히 외교 결례와 국제법 위반 논란까지 초래한다면 참으로 걱정할 만한 일이다.



[세계일보]

6. 기업 총수 사면 뒷거래는 헌정 농단이다

국정농단 사태가 사면권 농단으로 이어진 사실은 충격적이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그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사건에 출석해 2015년 광복절 특사를 앞두고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최태원 SK 회장의 사면을 검토했고 SK 측에 미리 사면 사실을 알려줬다고 증언했다. 최 회장은 당시 횡령 등 혐의로 징역 4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안 전 수석은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국민감정이 좋지 않으니 사면 정당성을 확보할 만한 것을 SK에서 받아 검토하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청와대의 의도대로 SK그룹은 SK하이닉스의 3개 반도체 생산라인에 총 46조원을 투자한다는 발표를 내놓았다. 최 회장의 사면을 위해 청와대와 SK가 ‘짜고 쳤다’는 얘기다.



안 전 수석은 최 회장의 사면을 사전에 알려준 뒤 최 회장 사면 당일인 2015년 8월 13일 김창근 당시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게서 ‘감사합니다. 하늘 같은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란 문자 메지지를 받았다. 최 회장은 사면된 뒤 박 대통령과 독대하고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111억원을 냈다.

사면권은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본질적으로 사법권을 무력화하고 특정인에게 특혜를 주는 국가 권력이다. 대통령 개인의 권력이 아닌 만큼 대통령 마음대로 휘둘러서는 안 된다. 뚜렷한 원칙과 기준을 갖고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행사돼야 한다. 사면권을 남발하면 법치의 근간이 흔들린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사면권 행사는 민감한 문제다.

비록 사면권 행사가 정치적 흥정이나 정략적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비판이 나왔어도 대통령 개인의 이익을 위해 악용되지는 않을 것이란 최소한의 믿음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면 뒷거래’ 의혹으로 이런 기본적인 신뢰마저 송두리째 무너졌다. 국민이 헌법의 이름으로 부여한 사면권을 대통령이 기업의 약점을 잡아 모종의 거래를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검찰 수사와 특검 수사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는 박 대통령의 국정농단 실상만으로도 기가 찰 지경인데 사면권까지 거래 수단으로 삼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사면 뒷거래는 국민을 속이고 헌법을 유린한 중대 범죄다. 국민이 느끼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치 불신이 또다시 고개를 들지 않을까 걱정된다. 진상을 철저히 밝혀 헌법과 법치를 우롱한 죄를 엄하게 물어야 한다.



7. 블랙리스트는 있는데 작성 지시한 사람 없다니

‘왕실장’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어제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됐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관련 의혹을 인정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묵묵무답’으로 일관했다. 조 장관은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특검은 김 전 실장이 정무수석실에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것으로 판단한다. 2014년 6월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의 폭로로 드러난 블랙리스트는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지원에서 배제할 목적으로 작성한 명단이다. 이 리스트는 청와대 정무수석실과 교육문화수석실을 거쳐 문체부로 전달됐다고 한다.



조 장관은 정무수석으로 일할 당시 김 전 실장의 지시를 받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의심을 받고 있다. 특검은 그가 블랙리스트에 관해 보고받는 등 작성에 깊숙이 관여한 정황을 확보했다. 하지만 조 장관은 “블랙리스트를 본 적도, 만든 적도 없다”며 강력 부인하고 있다. 최근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서 이용주 국민의당 의원으로부터 “지금도 블랙리스트가 없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18번이나 받고서야 마지못해 그 존재를 인정했을 뿐이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문화계 인사는 1만명에 이른다. 그런 광범위한 명단은 한두 부서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권력기관이 총동원되다시피 했다는 정황이 곳곳에 포착된다. 그런 마당에 “나는 모른다”고 발뺌한다면 어떤 국민이 믿겠는가. 이미 조 장관이 정무수석 시절에 함께 일했던 비서관 2명이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된 마당이다. 무조건 모르쇠로 부인할 일이 아니다.

한류문화로 빛나는 문화·예술의 저력은 자유로운 창의활동에서 나온다. 더구나 문화융성은 박근혜정부가 국정기조로 내세운 핵심정책이 아닌가. 그런 정부에서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탄압했다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이런 황당한 일을 벌이고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박 대통령마저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특검은 블랙리스트 작성에 박 대통령이 관여했는지에 관해서도 조사한다는 방침이다. 유신정권에나 있을 법한 블랙리스트의 망령이 다시는 살아나지 않게 하려면 특검이 진실을 가려 엄벌하는 수밖에 없다. 특검의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8. 다보스 경고장, 우리 사회는 어찌 받고 있나

세계 각국의 지도층 1200여명이 참석한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이 어제 개막됐다. 올해 주제는 지난해와는 다르다. 4차 산업혁명의 미래를 다룬 지난해와는 달리 지구촌 위기를 주제로 삼았다. 다보스포럼은 ‘세계위험보고서’에서 “경제적 불평등, 사회 양극화, 환경위험 증대가 앞으로 10년간 지구촌을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위험성에 적색 경고등을 켠 것이다.

부의 불평등은 전 세계적인 문제로 부상한 지 오래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이 발표한 보고서 ‘99%를 위한 경제’에 따르면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제프 베저스 아마존 창업자 등 세계 최고의 갑부 8명의 재산이 소득 하위 세계 50% 인구의 재산과 맞먹는다. 이들 ‘슈퍼리치’의 재산이 소득이 적은 36억명의 재산과 같다는 뜻이다.



부의 편중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1988~2011년 세계 최하위 10%의 소득이 매년 1인당 3달러(3500원) 증가하는 동안 최상위 10%의 소득은 매년 1만1800달러(약 1400만원)씩 불어났다. 상위층의 증가 속도가 하위층의 약 4000배나 된다. 이런 상황에서 협력과 공생의 싹이 움틀 수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지구촌의 갈등과 반목이 그런 산물이다.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는 우리에게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빈부 격차와 사회 양극화는 이미 우리 사회의 고질이다. 최근 극심한 불황 속에 그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지난해 4분기 늘어난 자영업자가 4년여 만에 가장 많은 14만명에 달했다는 사실이 증표의 하나다. 직장에서 쫓겨나 생계를 잇기 위해 무작정 창업에 뛰어든 사람이 많다고 한다. 실업자는 지난해 12월 100만명을 넘어섰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백수의 멍에를 짊어진 청년실업자는 43만5000명에 이른다. ‘흙수저의 좌절’이 진하게 묻어나는 현실이다.

사회 양극화와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려면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대선주자들이 쏟아내는 반값 등록금, 기본소득제, 군 복무 1년까지 단축 따위의 포퓰리즘 공약으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는 양극화 해소와 국민 통합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되레 국론을 분열시키고 공동체 존속을 해칠 뿐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다보스포럼이 이번 의제로 ‘소통과 책임의 리더십’을 정한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포럼은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포용적 성장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치 지도층의 자기반성과 성찰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데일리]

9. 연초부터 서민들 짓누르는 ‘물가 폭탄’

신년 벽두부터 곳곳에서 “물가 때문에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다. 달걀값 폭등은 조류인플루엔자(AI)라는 특수요인 때문이라 쳐도 각종 신선·가공식품 등의 생활물가와 공공요금까지 줄줄이 올라 서민들의 고통이 극심하다.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던 게 언제라고 이젠 ‘물가 폭탄’ 걱정이란 말인가.

“월급만 빼고 다 올랐다”는 탄식이 공연한 엄살이 아니다. 통계청이 어제 내놓은 가계수지 통계에 따르면 전국 2인 이상 가구의 작년 3분기 월평균 소득은 444만 5000원으로 1년 전에 비해 0.65% 증가에 그쳤다. 반면 지난해 연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에 이른다. 이 정도만 해도 물가 안정세가 여전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속사정은 딴판이다.

무, 배추, 당근 등은 예년의 2배 수준으로 가격이 치솟았고 다른 신선식품도 수십%씩 오른 품목이 수두룩하다. 소주와 라면, 빙과류, 과자 등의 가공식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선발업체가 앞장서면 후발업체들이 뒤따르는 식으로 가격인상 대열에 합류한 결과다. 여기에 외식비와 영화 관람료를 비롯한 서비스요금도 덩달아 뛰고 대중교통, 상하수도, 쓰레기봉투 등의 공공요금과 주민세가 나란히 올랐다.

어느 정부에서건 물가 안정은 최우선 국정과제다. ‘최순실 사태’로 식물정부나 다름없다는 변명은 안 통한다. 어설픈 초동대응으로 AI를 사상 최악으로 키운 것도 그렇지만 생활물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물가지표의 착시현상에 속아 지자체들이 공공요금을 앞다퉈 올려도 중앙정부는 보고만 있거나 외려 부추긴다는 대목에선 기가 찰 뿐이다. 국제유가가 오름세로 돌아섰고 탄핵정국이 끝나면 곧바로 대선 정국으로 이어져 한동안 사회 혼란이 지속될 게 뻔한 터에 더 이상 손 놓고 있다간 ‘물가 태풍’을 맞기 십상이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어제 민생물가점검 당정회의에서 신선채소 공급을 확대하고 가공식품에 대한 민관합동 감시를 강화하겠다며 설 물가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그 정도론 어림없다. 이제라도 공공요금 인상을 최대한 억제하고 비축물량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 가능한 정책수단을 있는 대로 동원해 생활물가를 잡는 것만이 혹한에 처한 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지름길이다.



10. 당명을 구멍가게 간판처럼 바꾸는가

새누리당이 당명을 바꾸기로 하고 이르면 설 연휴 전에 일반 공모에 나설 계획이라고 한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지금의 이름으로는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법하다. 이를테면, ‘박근혜 흔적’ 지우기다.



2012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지 5년 만에 다시 간판을 바꾸는 셈이다. 명색이 집권당인데도 당명의 유효기간이 5년밖에 안 된다는 게 대한민국 정치 현실의 씁쓰레한 단면이다.

이러한 당명 변경작업이 재창당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사실부터가 눈길을 끈다. 걸핏하면 ‘재창당’을 들먹이지만 그때마다 땜질식 처방에 머물렀다는 게 문제다. 5년 전 당명을 바꿀 때도 기존 한나라당이 기득권에 집착하고 ‘부자 정당’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는 이유가 제시됐다. 그 전 신한국당이라는 이름에서 불과 2년 만에 한나라당으로 바뀔 때도 마찬가지였다. 말로만 재창당 정신을 앞세웠지 실제로는 바뀐 것이 없었다는 얘기다.

아무리 이름을 바꾸더라도 사람이나 생각들이 그대로라면 근본적으로 바뀔 수가 없다. 새누리당이 인명진 비대위원장 체제에서도 서청원·최경환·윤상현 의원 등 친박계 핵심인물에 대한 인적 청산이 지체되고 있는 것이 그런 사례다. 당 운영에 있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인적개편 작업 없이 당 이름과 로고, 색깔을 바꾼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다른 정당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더불어민주당만 해도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창당되어 20대 총선을 앞두고 1년여 만에 바뀐 이름이다.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에 따라 당명도 자주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여야 정당 간에 동원할 수 있는 용어들은 거의 당명에 동원한 상태다. 조기 대선이 다가오면서 정치인들이 헤쳐모이는 수순이 진행되면 또 새로운 당명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지금에 와서 이름에서부터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사례를 새삼 들먹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도 같은 사례다. 그만큼 정당 내부적으로 자신이 있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이러한 ‘100년 정당’은 요원한 것인가. 이름을 자주 바꾸기보다는 올바른 정치를 펴겠다는 다짐을 제대로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





주요신문칼럼


​1. [서울신문][이호준의 시간여행] 굴뚝이 상징하던 것들

할머니는 땅거미가 마당을 서성거릴 무렵이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땟거리가 떨어져 빈속에 물을 채우고 잠들어야 하는 날에도 건너뛰는 법이 없었다. 가마솥의 물이 와글거리며 끓어오를 때까지, 땔감을 밀어 넣고는 했다. 그 순간, 당신의 표정은 황산벌로 떠나는 계백마냥 무겁고 경건했다.

겨울에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온기가 필요 없는 계절에도 불을 지피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남의 산에서 ‘도둑나무’를 해 와야 하는 어린 손자에게는 속 터지는 일이었다. 왜 불을 때느냐고 물으면 “허리가 아파서”라거나 “방이 눅눅해서”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고는 했지만, 둘러대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아프다고 함부로 눕는 법이 없는 당신이었기 때문이다.

불을 지피는 걸로 그날의 ‘의식’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바깥마당 감나무 아래 서서 굴뚝마다 연기가 오르는 양짓말, 아니 그보다 먼 볏고개에 시선을 얹는 게 부엌에서 나온 할머니가 하는 일이었다. 작은 몸피가 어둠 속으로 조금씩 녹아들어가 어둠과 하나가 될 때까지 그렇게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그 ‘이상행동’을 이해하게 된 건 세월이 한참 지난 뒤였다. 당신은 소년 적에 집을 떠난 아들, 즉 내 삼촌을 기다린 것이었다. 객지를 떠돌던 아들이 지친 몸으로 돌아와 고갯마루에 섰을 때, 자기 집 굴뚝에서 연기라도 나야 한 달음에 달려올 거라 믿었던 것이다. 봉화를 올리듯, 아들을 부르기 위해 굴뚝에 연기를 피워 올렸던 것이다.

민초들에게 굴뚝은 연기를 배출하는 도구만은 아니었다. 내 할머니가 ‘봉화’로 삼았던 것처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들판에서 놀던 아이들은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에게 굴뚝의 연기는 ‘그리움’이라는 화인(火印)으로 찍히기 마련이었다.

굴뚝의 기억은 아이들이 자라 객지로 나간 뒤에도 고향을 상징하는 깃발로 가슴마다 펄럭거렸다.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어귀에 섰을 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이면 느닷없이 안도감에 휩싸이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아궁이에 묻어 두고 떠난 감자 익는 냄새라도 맡은 듯, 괜히 목이 메고 눈물마저 찔끔거렸던 것이다.

굴뚝에는 가난한 민초들의 삶이 투영되기도 했다. ‘굴뚝 보고 절한다’는 말은 빚에 쪼들려 야반도주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인사할 수 없어서 굴뚝을 보고 절을 한 뒤 떠난다는 데서 나왔다. 굴뚝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그 집의 상황을 판단하기도 했다. 연기가 난다는 것은 그 집이 끼니를 해결했다는 뜻이었다.

도시 빈민의 삶을 그린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난장이와 대비되는 거대한 굴뚝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벽돌공장 굴뚝에 올라가 고단했던 삶을 마감함으로써 굴뚝으로 상징되는 산업화시대의 비극을 보여 준다.

시간은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서 굴뚝을 지워 버리기 시작했다. 난방과 취사 연료가 바뀌면서 굴뚝에서 오르던 연기도 사라졌다.

설이 가까워져 오면서 기억 저편에 물러서 있던 ‘할머니의 굴뚝’이 생각난다. 객지를 떠돌다가 돌아와 고갯마루에 선 아들은 이제 무엇으로 어머니의 기다림을 확인할까? 굴뚝도 연기도 없는 고향 집을 바라보다 쓸쓸히 발길을 돌리지는 않을까.



2. [매일신문][매일춘추] 이경종 선생님, 잊지 않겠습니다.

사흘 동안 내리던 눈이 그쳤다. 섬은 흑과 백의 대조를 이루며 한 폭의 수묵화로 남았다. 섬 곳곳에 햇살이 고르게 비추는 날, 우리는 섬의 북쪽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에메랄드 빛의 겨울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울릉도 천부의 바다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서른다섯 살의 선생님 이야기가 있다. 이미 사십여 년이 흘렀고, 수억 겁의 세월이 다시 흐른다 해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저기, 천부 앞바다에 서려 있다.

1976년 1월 17일, 울릉도에 폭설이 쏟아졌다. 동`서`남`북 한 치도 예상할 수 없는 섬의 일기 속에 선생님은 전날 벼랑길을 걸어 천부에서 30㎞ 떨어진 도동으로 향했다. 6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은 학비가 없어 중학교 입학을 포기하려는 두 제자의 등록금을 내고, 17일 오후 4시 무렵 만덕호에 오른다. 만덕호는 57명의 사람과 생필품을 싣고 도동항을 출발해 섬의 북쪽 오지마을 천부를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천부 앞바다는 북서풍의 영향으로 파도가 높고 거칠었다. 겨우 6t 남짓한 만덕호가 천부 선착장을 눈앞에 두고 몇 차례 파도를 맞아 결국 전복되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다로 흩어졌다. 학창시절 수영선수로 활동했던 선생님은 무사히 선착장에 도착하지만,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두 제자를 보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선생님도, 제자들도, 그리고 서른일곱 명의 사람들도 영원히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2017년 1월 17일. 고(故) 이경종 선생님 41주기 추모식이 천부초등학교에서 열렸다.



​눈 덮인 운동장을 가로질러 우측 계단을 오르면 나무 그늘 아래 자리 잡은 작은 추모비를 만난다. 평소 입담이 없으셨다던 선생님의 모습처럼 추모비는 오랜 세월 저리도 조용히 자리를 하고 있다. 우리는 거룩하게 묵념을 올리고 새하얀 국화를 헌화한다. 무슨 말로도 감사함을 대신할 수 없지만 제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던진 선생님의 숭고한 이야기를 영원히 잊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하얀 화강암 위에 반달형의 검은 돌이 동그란 두 개의 돌을 안고 있는 순직비의 형상은 바로 두 제자를 안고 있던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이다.



선생님! 듣고 계신가요? 비문을 낭독하는, 추모사를 낭독하는 목소리를요. 오늘 우리는 선생님의 거룩한 추모비 앞에서 눈을 감습니다. 그날의 이야기를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셨던 선생님의 이야기는 오늘에서 내일로, 또다시 내일로 우리의 입에서 입으로 영원히 퍼져 나갈 것입니다.



​-2017년 1월 17일 울릉도 북쪽 천부초등학교에서 참스승을 만나다.



3. [경향신문][정유진의 사이시옷] 일단, 미안합니다

지난해 여름, 페루에서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잉카트레일을 걸었을 때의 일이다. 3박4일 동안 산속에서 캠핑을 하며 해발 4000m 이상의 안데스 산맥 봉우리를 넘어야 하는 나름 험난한 여정이었다.



나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온 코트니라는 이름의 여성과 같은 텐트를 쓰게 됐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씩씩하게 잘만 걷던 그는 산소 부족으로 이미 절반은 초주검이 된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넌 결혼했니? 아님 싱글?”
“응, 나 싱글인데.”
“그렇구나. 애는 있고?”
“나 싱글이라니까.”
“그래 알아. 애는 있냐고.”

‘숨쉬기도 힘든데 왜 자꾸 같은 대답을 반복하게 하지?’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이 대화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대답했다. “응, 나는 싱글이고 아이는 없어.” 알고 보니 코트니는 귀여운 아들을 키우고 있는 이혼 여성이었다. 한부모 가족에 대한 기사를 그렇게 읽고 써 왔으면서도,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되고 만다. 도대체 나의 일상적 사고 속에 피부처럼 들러붙은 고정관념과 편견의 뿌리는 얼마나 깊은 것일까.

최근 방송인 이다도시가 TV에 나와 인터넷 쇼핑몰 회원가입 신청을 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혼 여성인 그는 ‘미혼’ ‘기혼’을 묻는 항목이 나오자 당연히 ‘미혼’에 체크했다. 그런데 ‘미혼’을 선택하는 순간 아래쪽에 있던 자녀 정보 기입란이 자동으로 사라져 버리더라는 것이다. 이다도시는 “이 나라에서는 아이가 있으면 미혼일 수 없다는 뜻 아니냐”라면서 “미혼으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나 혼자는 아닐 텐데, 그걸 보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코트니에게 했던 실수가 떠올랐다. 그리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인터넷 쇼핑몰 개발자가 기술이나 시간이 부족해 미혼-자녀 정보 기입란을 못 만들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사회 전반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편견의 굴레는 나의,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 속에 얼마나 깨알같이 침투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편견의 고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 있어서, 나는 가해자이면서 때로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소위 ‘결혼 적령기’를 넘긴 이 땅의 미혼 여성들은 몇년치 겪을 수모(!)를 한번에 당해야 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열렬한 시청자였다던 박 대통령의 병원 예약명이 ‘길라임’이었다는 보도가 나오자 어떤 사람들은 “남편도 없고 애도 없으니 밤에 드라마나 보는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결혼 안한 여자가 대통령이 되니 신통치 않다”는 ‘망언’을 남겼다. 아니, 그래서 ‘결혼한 남자’인 전 전 대통령 본인은 과연 신통한 대통령이셨나.

미혼인 지인들과 모일 때마다 서로 자신이 겪고 들은 차별적 언사들을 공유하며 한풀이를 하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아마 우리도 지금 이 입장이 아니었다면, 그게 상대방에게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른 채 무심히 똑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우린 불쾌하면 불쾌하다고 더 크게 말하고 다니자. 상대방이 알아차릴 때까지.”

예전에 테드(Ted)에서 들은 강연 내용이다.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 그리고 백인 남성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에게 물었다. “넌 아침에 거울을 보면 뭐가 보이니?” 백인 여성이 대답했다. “한 명의 여성이 보여.” 흑인 여성이 말했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점이구나. 나는 한 명의 ‘흑인 여성’이 보이는데.” 그렇다면 백인 남성은 거울에 무엇이 보인다고 말했을까. 답은 “한 명의 인간(Human being)”이었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직접 경험해본 적 없는 굴레를 잘 보지 못한다. 백인 여성의 눈에는 인종이 보이지 않고, 백인 남성의 눈에는 인종과 젠더 모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환경이 존재를 규정하고,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중요한 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언제든 무심코, 한 치의 악의 없이, 편견 어린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닐까.

지금의 한국은 그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는 사회가 됐다. 누군가가 불편함을 호소하면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돼 있는 편견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예민함부터 탓한다. 다수의 편견이 힘센 사회는 그로 인해 상처받은 소수에게 “소수의 관점을 다수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오히려 호통을 친다. 

자신이 언제든 상대방에게 잘못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내가, 우리가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새해에는 나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기로 했다. 일단, 미안합니다. 그리고 노력하겠습니다.



4. [매일경제][필동정담] 사무라이 문화 속살

10년 전 미국 워싱턴 특파원 시절 교민 담당 총영사로부터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워싱턴 지역 경주향우회장 선거를 둘러싼 다툼이 미국 법원 소송으로 번졌는데 담당 판사가 총영사에게 "그런 일은 한국 사람들끼리 해결하라"는 전화를 해왔다는 것이다. 비슷한 소송이 비일비재한 데다 서로 한 치도 양보를 안 해 참다 못한 판사가 던진 말이었다. 취재해 보니 10만여 명인 워싱턴DC·북버지니아에 한인총연합회만 10개를 웃돌았다. 지역 향우회는 100여 개까지 헤아렸다. 

더 놀라운 건 5만여 명쯤 된다는 그 지역 일본 교민사회에는 단 하나의 일인회만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비슷한 명칭의 아류 교민회가 생겨나지 않는다. 먼저 한 단체가 생기면 대부분 그 우산 아래 들어가고 웬만해선 반기를 들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감투 쓰고 완장 차기를 좋아해서일까, 일본 사람들에겐 그런 근성이 없나, 궁금했다. 그러다 한 일본 학자에게서 들은 해석에 공감하며 무릎을 쳤다. 사무라이 문화 때문이었다. 주도권을 쥔 세력에 반기를 들려면 상대를 죽여야 할 뿐 공존은 없는 세계 말이다.



1868년 왕정 복고의 메이지유신 전까지 260개 번을 각각 다스리던 영주들을 떠받치던 사무라이들이 지배계급이었던 사회에서 민초들은 이기는 쪽 편을 드는 게 최적의 생존 방식이었다. 현대사회에서도 그들의 DNA에 이런 정신이 체화돼 있는 셈이다.

일본어엔 욕을 표현하는 단어가 딱 두 개밖에 없다고 한다. 지쿠쇼(짐승)와 바카야로(바보녀석)다. 이기지 못하면 죽음인 사무라이에게 싸움에서 진 자가 바카였다. 패배라는 수치를 당한 자보다 더 모욕적인 표현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예의 바른 사람들이라 생긴 문화가 아니었다. 사무라이 문화에 전체가 뒤덮여 생긴 모습이다.

새삼 일본을 비교문화론 차원에서 짚어보는 건 최근 한일 갈등을 보며 우리의 일본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부족했나 싶어서다.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를 둘러싼 일본 측의 무섭도록 치밀한 공세를 보면서 반(反)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쪽이 어쩌다 되레 주도권을 쥐는 형국에 도달했는지 기가 찬다. 외교가 상대와의 밀고 당기기 같은 줄다리기이지만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비교문화와 역사 등 다양한 방면의 연구가 동원되는 종합예술의 반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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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머니투데이][웰빙에세이] 내 안의 달콤한 중심, 미묘하고 민감한 바로 그곳

나도 아름다운 道의 자리에 서고 싶다. 어떻게 서나? 몇 가지 이미지로 가늠해보자.

하나, 스윗 스팟(sweet spot). 테니스 라켓에서 공을 가장 잘 받아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가운데 부근의 단 한 곳이다.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은 곳,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은 곳이다. 말보다는 감으로 찾아야 한다. 머리보다는 몸으로 익혀야 한다. 아주 미묘하고 민감한 바로 그곳! 거기가 테니스 라켓에서 道의 자리다. 달콤한 중심이다. 그곳은 당연히 라켓 안에 있다.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깊은 안에 있다. 누구든 그것을 밖에서 찾지 않으리라.

나의 道의 자리라고 다를 리 없다. 그것은 분명 내 안에 있다.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깊은 안에 있다. 나는 안을 살펴야 한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내 안의 중심에서 아주 미묘하고 민감한 그곳을 찾아야 한다. 말이 아니라 감으로 느껴야 한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익혀야 한다. 온몸으로 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내 안을 살피고 있나? 오늘 하루 내 안을 바라본 적이 몇 번인가? 단 한 번이라도 내 안의 달콤한 중심을 느껴보았나?

나는 너무 바빠 그럴 시간이 없다. 할 일이 많아 그럴 여유가 없다. 먹고 살기 고달파 그럴 여력이 없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그럴 때가 아니다. 나는 오늘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프다. 정신 사납다. 나도 때가 되면 할 것이다. 여건이 되면 나설 것이다. 찬찬히 나를 돌아보고 둘러볼 것이다. 다만 지금은 밖의 일이 더 중요하다. 더 시급하다. 내 안은 그 다음이다. 나중이다. 밖에 정신 팔린 나에게 道의 자리는 멀다. 요원하다. 나는 아직 한 발도 내딛지 않았다. 내 안으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않았다.

둘, 줄타기. 허공을 가르며 외줄을 타는 저 사람을 보라. 그는 온전히 깨어 있다.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과 몰입의 상태다. 그는 부드럽게 움직인다. 가볍게 나아간다. 흔들림에 순응한다. 기움을 이용한다. 왼편으로 기울면 그 힘에 기대어 오른편을 보탠다. 오른편으로 기울면 그 힘에 기대어 왼편을 보탠다. 그것이 한 가닥 줄을 따라 균형의 춤사위로 전개된다. 저 줄과 저 춤! 그 외에 무엇이 남았는가? 저항은 없다. 긴장도 없다. 그도 없다. 그는 줄이다. 춤이다. 균형이다.

미국의 명상가 마이클 싱어는 "道 안에 개인적인 것은 없다"고 한다. "당신은 어떤 개념도, 좋고 싫음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道의 자리에서는 힘이 스스로를 돌보기 때문이다.

"道 안에 개인적인 것은 없다. 당신은 힘의 손아귀에 들려 있는 한갓 도구일 뿐으로, 균형의 춤사위에 참여하고 있다. 당신은 일이 어떻게 풀려가야 한다는 개인적인 선호가 아니라 오로지 균형에만 모든 주의가 머물러 있는, 그런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삶의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균형 속에서 일할 수 있게 되면 당신은 삶 속을 자유롭게 미끄러져 갈 수 있다. 道에 이르면 애씀 없는 행위가 일어난다. 삶이 일어나고, 당신이 거기에 있다. 당신이 그것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아무런 부담도, 스트레스도 없다. 당신이 중심에 앉아 있는 동안 힘이 스스로를 돌본다. 그것이 道다. 그것은 삶의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자리다. 그것을 만져볼 수는 없지만 그것과 하나가 될 수는 있다."


만져볼 수 없지만 하나가 될 수 있는 아름다운 道의 자리!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매 순간 중심에서 중심으로 움직인다. 내 안의 道의 자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삶 속에서 역동한다. 삶은 오른편과 왼편이다. 이쪽과 저쪽이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아름다움과 추함, 깨끗함과 더러움……. 삶은 양 쪽으로 갈려 쉼 없이 나를 흔든다. 어쩌랴! 삶이 그런 것을. 흔들리는 게 삶인 것을.

그러나 삶 속에 道가 있다. 태풍의 눈 같고, 바퀴의 축 같고, 시소의 정중앙 같고, 십자가의 교차점 같은 道의 자리가 있다. 흔들림과 엇갈림 속에서 피어나는 고요와 평화의 꽃이 있다. 상대의 세계를 멸하는 절대의 문, 모든 이분법을 녹이는 무경계의 나라가 있다. 삶이 없으면 道도 없다. 삶을 놓치면 道도 놓친다. 道란 삶과 함께 펼쳐지는 균형의 춤사위이기에. 

삶 속의 道는 외줄타기와 같다. 나는 온전히 깨어 있어야 한다. 집중하고 몰입해야 한다. 삶이 흔들려 어지럽더라도 그 흔들림에 순응해야 한다. 삶이 기울어 멀미가 나더라도 그 기움을 이용해야 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균형의 춤사위를 위한 디딤돌이다. 나는 일이 어떻게 풀려가야 한다는 개인적인 선호를 넘어 오로지 균형에만 주위가 머무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 경지에서 비로소 나는 삶 속으로 자유롭게 미끄러져 갈 것이다. 삶이 일어나고 애씀 없는 행위가 일어날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고 아무런 부담도, 스트레스도 없을 것이다. 道의 힘이 스스로를 돌볼 것이다. 나는 삶의 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앉아 평화로울 것이다.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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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늙은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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