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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올리는 자료로 상업적 목적은 없으며 선정된 사설의 정치적 성향은 블로그 운영성향과 무관합니다.
주요신문사설
[이데일리]
1. 조류인플루엔자 후속 오염 걱정한다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로 지난 2개월 동안 전국에서 도살 처분된 닭·오리가 3260만 마리에 이르러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하루에 50만 마리씩 산 채로 땅속에 묻혔다는 얘기다. 초동 단계에서부터 안일하고 미숙한 대응이 불러온 재앙이다. 살처분된 가금류가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자체가 부끄러울 뿐이다. 설날을 앞두고 초유의 ‘계란 파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그 결과다.
이로 인해 자칫 연쇄적인 ‘2차 피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게 더 심각하다. AI 확산에 대응하려고 닭·오리를 무더기로 살처분하는 바람에 매몰지의 입지나 적정성을 제대로 따져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규정을 지키지 못했다면 매몰지에서 흘러나오는 침출수로 주변 토양이 오염될 수밖에 없다. 사체가 썩으면서 악취가 풍겨나올 수도 있다.
AI로 살처분이 이뤄진 이후 악취 민원이 제기되고 있는 전남 해남 지역이 혹시 그런 경우가 아닌지 조사가 진행됐다고 한다. 동물 사체 썩는 냄새로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주민들의 불만이 접수됐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육용 오리 1만 3500여 마리를 미생물 처리한 왕겨에 묻는 새로운 방식이 채택됐다고 하는데, 이 방식에 허점이 없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과거처럼 일반매몰 방식으로 사체를 처리한 지역이다. 전국 매몰지 430여 곳 가운데 100여 곳이 이런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구덩이 바닥에 비닐을 깔고 사체를 묻은 뒤 그 위에 흙을 덮는 방식이다. 2010~2011년 구제역 때도 모두 이 방식으로 처리됐으나 매몰지에서 침출수가 흘러나오면서 환경재앙에 대한 우려가 제기됨에 따라 이번에는 매몰 방식을 대폭 바꿨다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다.
앞으로 겨울 날씨가 풀리고 비가 쏟아지게 되면 관련 민원이 더 많이 제기될 수 있다. 얼어붙었던 땅이 녹으면서 매몰지 토사가 쓸려 내려가거나 봉분이 내려앉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농림수산부와 환경부 등 관련 당국은 후속 오염 사태를 미리 방지함으로써 주민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AI 처리 과정의 잘못은 역대 최대 살처분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
2. 황교안 권한대행 흔들리면 안 된다
요즘 황교안 대통령권한대행의 ‘광폭 행보’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회원로들을 비롯해 청년, 취약계층, 탈북자 등 각계각층을 두루 만나며 하루 4∼5건의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는 것을 보면 진짜 대통령 못지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옛말처럼 이쯤 되면 ‘권한대행’ 꼬리를 아예 떼어내고 싶은 욕심이 솟구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도 하다.
더구나 황 권한대행은 대선주자 지지율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일부 조사에선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에 이어 3위에도 올랐을 정도다. 예상과 달리 ‘반기문 바람’이 미풍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여권의 대안으로 급부상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황 권한대행의 어제 신년 기자회견에서 올해의 국정 방향은 제쳐놓고 “출마에 대한 입장이 뭔가”,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생각하겠다는 건가”라는 등의 질문이 쏟아진 것도 그래서일 게다.
황 권한대행은 대선 지지율이 본인의 뜻과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권한대행으로서 국내외 어려움을 극복하고 국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모든 방안을 강구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지금의 최우선 과제는 탄핵정국의 슬기로운 극복이고, 그러려면 무엇보다 국민 대통합이 절실하다.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나 트럼프 행정부 출범, 중국의 사드 보복 같은 현안에서 드러난 어설픈 대응이 되풀이되지 않게끔 국정을 제대로 통할해야 한다.
국민과 정치권도 황 권한대행이 국정의 정상화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모두 보태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권한대행 체제를 흔들려는 불순한 기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엄연한 반국가적 반칙이기 때문이다. 규정과 관행도 무시하고 그를 국회로 불러내 “촛불에 불타고 싶은가”, “권한대행은 잘할 필요가 없다”라는 한심한 질문을 퍼붓는 저질 정치야말로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다.
국민들은 황 권한대행 체제가 탄핵정국이 마무리될 때까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세계 각국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데 우리만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크다”는 황 권한대행의 절박한 호소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우리 주변이 온통 낭떠러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
3. 부당한 지시 제어할 정부 매뉴얼 만들어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관리하는 데 관여한 혐의로 전직 장·차관이 대거 구속된 문화체육관광부가 어제 국민에게 사과했다. 장관 직무대행을 맡은 송수근 1차관을 비롯한 실·국장 이상 간부 전원이 국민에게 머리를 숙인 것이다.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문체부는 조윤선·김종덕 전 장관과 정관주 전 1차관, 김종 전 2차관이 구속됐다. 문제는 이들에 그치지 않는다. 이날 ‘국민께 드리는 반성과 다짐의 말씀’이라는 사과문을 읽은 송 직무대행을 비롯해 문체부 그 누구도 파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송 직무대행은 재발 방지 대책으로 “부당한 간섭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부당한 간섭’의 주체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청와대를 지칭한다는 것을 짐작 못할 사람은 없다. 그럴수록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는 여전히 감당이 불가능한 문체부 차원이 아니라 범정부 차원에서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송 직무대행은 “예술 표현의 자유와 창의성을 지키는 보루가 돼야 할 문체부가 공공 지원에서 배제되는 예술인 명단으로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해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이번 일을 뼈아픈 자성의 계기로 삼아 문화예술 정책과 지원의 공정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문화행정의 제반 제도와 운영 절차를 과감히 개선하겠다고도 했다.
우리는 송 직무대행을 비롯한 문체부 구성원들의 절절한 반성을 가감 없이 수용하고 싶다. 심기일전해 문화예술 지원 정책의 틀을 공정하게 다시 짜겠다는 약속에도 진심이 담겨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문체부 구성원들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는 대통령이고 청와대가 아닌가. 부당한 정치적 지시가 내려지면 따르거나, 옷을 벗고 나가는 모습을 그동안에도 지켜봐야 했던 문체부 구성원들이다. 스스로 다짐하는 것만으로 지킬 수 있는 약속이 아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책무는 과도기의 합리적 국정 관리다. 지금은 청와대가 정치적 이유로 행정 부처와 관료를 범죄로 내모는 행위를 막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적기다. 행정 조직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는 불합리를 제어하는 장치가 없다면 제2, 제3의 ‘블랙리스트’ 파문은 언제든 불거질 것이다. 장·차관이 줄줄이 사법 처리되는 모습 또한 어느 부처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 황 대행은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4. 건보료 개편, 실질소득 파악에 성패 달렸다
불합리한 정책의 대명사로 꼽혀 온 국민건강보험료 부과 체계가 개편된다. 보건복지부는 어제 국회 공청회를 열어 고소득자의 건보료 무임승차를 막는 정부안을 내놨다. 정부가 직무 유기라는 지탄을 받으면서도 뭉갰던 건보료 체계를 수술하겠다니 늦었지만 다행스럽다.
설문조사를 해 보면 우리 국민 3명 중 2명꼴은 건보료를 실질소득 중심으로 부과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현행 체계가 지역 가입자들의 과도한 희생을 강요한다는 점에 대다수 국민이 문제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정부의 개편안대로라면 ‘송파 세 모녀’ 같은 저소득 지역 가입자의 보험료는 2024년까지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다.
당장 내년부터는 연소득 100만원 이하 가구는 1만 3100원의 최저보험료만 내면 된다. 개편안은 실질소득의 반영도를 높이는 것이 골자다. 그런 만큼 현재와는 달리 이자와 연금소득이 많으면 보험료도 올라간다. 지금은 금융소득, 공적 연금, 근로·기타 소득 등이 각각 연간 4000만원 이하이면서 과표 재산 9억원 이하라면 자녀나 친척의 피부양자가 될 수 있다.
개편안은 이런 허점을 막기 위해 내년부터는 직장 가입자의 피부양자라도 연간 합산 소득 3400만원을 넘으면 지역 가입자로 전환한다. 건물을 몇 채나 가진 재력가가 직장 가입자인 가족에게 얼렁뚱땅 얹혀 가는 모순을 손보겠다는 의지다.
이번 개편안은 3단계에 걸쳐 추진되는 얼개다. 2018년, 2021년, 2024년으로 단계를 나눠 소득 반영률을 꾸준히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무엇보다 지역 가입자에게 재산이나 자동차를 기준으로 매기던 보험료의 비중을 점차 줄여 가겠다는 방향은 바람직하다. 소득은 없는데 주택이나 자동차를 보유했다는 이유로 뭉칫돈을 내는 현행 체계는 손질이 하루가 급한 현실이다.
현행 건보 체계는 1989년에 다듬어졌다. 근 30년이 지나면서 취약계층의 보험료 부담을 덜어 주고 무임승차하는 고소득 피부양자를 줄여야 한다는 형평성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현 정부도 출범 초부터 개편 의욕을 보이더니 2015년 초 연말정산 파동으로 여론이 민감해지자 아예 없던 일로 돌렸다. 개편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표심만 살펴 온 것이 정부와 여당의 태도였다.
저항이 따르지 않는 개혁은 없다. 어렵게 칼을 뺐으니 이번만큼은 눈치 살피지 말고 개편을 마무리해야 한다. 정부는 오는 5월 국회에 확정 개편안을 내겠다지만 간단치 않은 일이다. 당장 야당들은 부과 기준을 소득으로만 일원화하자고 주장한다.
소득을 완벽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만큼 야당의 주장이 다소 현실성은 떨어지긴 해도 새겨들을 사안임에는 틀림없다. 지역 가입자들의 소득을 면밀히 파악하는 작업에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종 개편 단계인 2024년에는 해마다 2조원이 넘는 보험료 손실분을 어떻게 메울지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매일신문]
5. 나랏빚 심각성에 입 닫고 퍼주겠다는 대선 주자들
국가재정이 요란한 경고음을 내고 있다. 23일 오후 9시 현재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합한 국가 채무는 641조2천512억6천123만원으로 국민 1인당 1천251만원 꼴이다. 더 가공스러운 것은 증가 속도이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추산에 따르면 국가 채무는 올 연말에는 682조4천억원까지 불어난다. 1초에 139만원, 하루에 1천200억원씩 늘어난다는 얘기다.
이 속도대로라면 국가 채무는 내년에 700조원을 돌파하고 2020년에는 800조원에 육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도 위험 수위인 40%에 육박하게 된다. 이런 증가 속도는 제대로 된 나라 꼴을 갖춘 국가 가운데 최고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우리의 정부 부채 증가율은 지난 5년간 66.7%로 G20(주요 20개국) 가운데 가장 빠르다.
여기에 브레이크를 걸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뻔하다. 빚을 내 흥청대다 거덜이 난 그리스의 뒤를 밟아갈 것이다. 그런 운명을 피하는 방법은 씀씀이를 줄이는 것 하나뿐이다. 저출산`양극화 해소 등 꼭 지출해야 할 부문을 제외하고는 모든 부문에서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한다. 빚을 내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이미 낸 빚도 부지런히 갚아가야 한다. 이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파산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기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저마다 퍼주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이른바 대선 주자들의 행태는 더 가관이다. 이들은 저마다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감언이설을 쏟아낸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30만원까지 기초소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며, 이재명 성남시장은 “연간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모병제 전환’을 약속했고,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일자리를 늘린다며 “공무원 81만 명을 증원하겠다”고 한다. 이를 실천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데 어떻게 조달할지는 하나같이 불투명하다.
더 무책임한 것은 국가 채무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공약이 국가 채무 규모와 증가 속도에 비춰 실현 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다면 어째서 그런지 확실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아직 이런 요구에 응답한 대선 주자는 하나도 없다. 아니 빚을 내야만 가능한 솜사탕 공약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들이 대권 주자라는 현실이 한심하고 서글프다.
6. 정부 곳간만 불린 담뱃값 인상, 흡연 인구 감소 근본책 있어야
탈출구가 안 보이는 경제난과 국정 혼란 등으로 국민 스트레스 수치가 늘어나면서 담배를 다시 피워 무는 이들이 늘고 있다. 담뱃값 인상으로 주춤했던 담배 소비도 다시 가파르게 증가해 가격 인상 전의 85% 수준까지 올라갔다.
22일 시장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담배 판매량은 729억 개비로 전년(667억 개비)보다 9.3% 증가했다. 담뱃값 인상 전인 2014년 판매량(853억 개비)의 85.5%에 육박하는 수치다. 담배 세수도 지난해 12조원이 걷혀 담뱃값 인상 첫해인 2014년(6조9천억원)보다 5조원이나 늘어났다. 대구시의 경우 올해 담배소비세 목표 세입을 1천408억원으로 전년(1천160억원)보다 21% 늘려 잡았다.
세수 증대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표정관리’라도 해야 할 판이지만, 금연치료 지원사업은 시늉에 그치고 있다. 정부는 올해 금연 관련 사업으로 1천479억원을 편성했지만, 이는 올해 국민건강증진기금 총액(3조2천927억원) 대비 4.5%에 불과한 수치이다. 국제보건기구(WHO) 분담금, 건강도시연맹총회 지원 등 국민건강증진과 무관한 곳에도 국민건강증진기금은 사용되고 있다.
그나마 금연치료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금연 성공률을 보면 민망스럽다. 국민건강보험공간이 실시하는 금연치료 프로그램에서 총 참여자 대비 금연 성공률은 0.5%에 그쳤다.
담배의 중독성은 헤로인, 코카인, 아편 못지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값을 인상해 흡연 인구를 줄이겠다는 발상은 실패가 예고된 탁상행정이었다.
담뱃값 인상은 결과적으로 정부 곳간만 채웠다. 그 곳간을 채우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경제적 고통을 받는 이들은 저소득층과 청년층, 노년층 등 사회적 약자들이다. 흡연 인구 감소에 대한 대대적인 정책 재검토와 방향 재설정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7. 지연책 쓰는 박근혜, ‘빠른 탄핵’이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늦추기 위해 갖은 꼼수를 부리고 있다. 박 대통령 측은 어제 헌재에서 열린 탄핵심판 8차 변론에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 무려 39명의 증인을 추가로 신청했다. 검찰과 특검의 조사 결과를 인정할 수 없으므로 관련자들을 직접 불러 얘기를 들어보자는 것이다.
증인 1명 심문에 적어도 1시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재판이 2주 이상 늘어질 수 있다. 그런데 김 전 실장이나 우 전 수석은 이미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모든 사안에 ‘모른다’고 답한 인물들이다.
헌재 출석 요구를 받은 청와대 ‘문고리 3인방’도 모두 불응했다. 나라가 결딴나든 말든 조금이라도 더 대통령 자리에 앉아 반전의 기회를 노리겠다는 속셈이다. 대통령으로서의 품위나 주권자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없다.
박 대통령은 특검 수사도 훼방을 놓고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박 대통령이 지시했다고 보도한 언론사와 기사에 언급된 ‘익명의 특검 관계자’를 고소했다. 자중해야 할 피의자가 수사 주체를 고소해 처벌하겠다니 어이가 없다. 대면조사나 청와대 압수수색 등 향후 특검 수사를 거부하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려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최순실씨도 막무가내로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특검의 소환 통보를 6차례나 거부해 수감 중인 최씨의 체포영장을 법원에 청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정 공백이 길어지면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물가와 실업률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가계부채와 나랏빚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탄핵 국면에 대한 피로도도 높아지고 있다. 나라 바깥도 어지럽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으로 전 세계가 대격변의 소용돌이에 들어갔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위중하다.
헌재가 일단 내달 1일 김 전 실장과 김규현 외교안보수석 등을 심문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헌재의 최종 결론은 8명의 재판관이 내리게 됐다. 박한철 헌재 소장은 오는 31일 퇴임한다. 9명의 재판관 중 6명 이상 찬성에서 8명 중 6명 이상 찬성으로 탄핵 조건이 변해 박 대통령은 그만큼 유리해졌다. 박 대통령은 이런 걸 노렸을 것이다. 헌재는 무책임한 박 대통령의 재판 지연 술책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선고 일정 등을 가능한 한 일찍 알려 시민들이 대통령 선거 등 향후 정치 일정 등을 예측할 수 있게 해야 한다.
8. 건보료, 소득중심 단일 부과체계로 바꿔야
보건복지부가 어제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안을 내놨다. 저소득 지역가입자의 건보료 부담은 낮추고, 고소득 직장인과 피부양자의 건보료는 올리는 게 개편안의 골자다. 복지부는 현행 건보료 부과체계를 2018년부터 2024년까지 3단계에 걸쳐 소득에 부과하는 건보료 비중은 단계적으로 높이고, 재산에 부과하는 건보료 비중은 낮추기로 했다.
개편안에 따르면 소득이 일정 기준 이하인 지역가입자에게는 최저보험료가 부과된다. 또 연소득 500만원 이하 지역가입자에게 성과 연령, 소득, 재산을 기준으로 건보료를 부과하던 ‘평가소득’은 폐지하고, 재산과 자동차에 붙는 건보료는 단계적으로 줄이기로 했다.
소득이 없는데도 주택이나 자동차가 있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건보료를 내도록 한 부과체계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등진 송파 세 모녀는 반지하 셋방의 보증금 500만원이 재산이라는 이유로 매달 5만원의 건보료를 내야 했을 정도로 부과체계가 불합리했다.
개편안은 소득이 있는데도 직장가입자인 자녀의 피부양자로 등재돼 건보료를 한 푼도 내지 않았던 연금소득자나 임대업자 등을 지역가입자로 전환해 건보료를 내도록 했다. 지난해 직장가입자에 얹혀 건보료를 면제받은 피부양자는 2600여만명으로 이 중에는 집을 3채 이상 가진 자산가도 67만명에 달해 건강보험 재정을 악화하는 주된 요인이 됐다.
그러나 복지부의 개편안은 여전히 건보료 부과체계의 기본 취지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합리적인 건보료 개편안은 직장과 지역의 구분을 없애고,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소득에 건보료를 부과하는 것이다. 복지부는 자영업자의 소득파악률이 낮아 소득중심의 단일 건보료 부과체계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국세청 과세자료를 100% 공유하면 소득파악률이 95%까지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한국보다 소득파악률이 낮은 대만도 소득중심의 건보료 부과체계 전환에 성공한 바 있다.
복지부가 소득중심의 단일 건보료 부과체계 도입을 꺼리는 것은 건보료 인상과 고소득층의 반발 때문이다. 건강보험은 많이 내든, 적게 내든 똑같은 서비스를 받기에 소득 재분배 기능을 갖고 있다. 여·야·정은 양극화에 따른 사회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소득중심의 단일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안 마련에 적극 나서야 한다.
[연합뉴스]
9. '갤노트7 사태' 전화위복 될 수도
삼성전자가 지난해 발생한 갤럭시노트7의 발화 사고 원인을 배터리 결함으로 결론지었다. 문제가 생긴 배터리는 삼성SDI와 중국 ATL이 만든 제품이었다. 고동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은 23일 기자회견에서 "두 종류의 배터리에서 각기 다른 원인으로 소손(燒巽·불에 타서 부서짐)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했다"며 갤노트7 본체에는 결함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는 스마트폰 20만 대와 배터리 3만 개가 사용됐다고 한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엑스포넌트, UL 등 해외 인증기관 관계자들도 삼성전자의 조사 결과와 같은 의견을 보였다. 물론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삼성전자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 사장도 "배터리 설계와 제조 공정상의 문제점을 제품 출시 전에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배터리 업체들에 법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한 것도 그런 취지인 듯하다. 결국 최종적인 책임은 삼성전자가 지겠다는 뜻이다.
작년 8월 출시된 갤노트7은 연이은 발화 사고로 대규모 리콜을 거쳐 단종됐다. 발화사고는 출시 엿새 뒤부터 국내외에서 동시다발로 보고됐다. 삼성전자는 사태 초기에 삼성SDI가 공급한 일부 배터리 불량을 발화원인으로 지목했다. 이에 따라 판매된 제품 250만 대를 전량 회수하고 대신 ATL배터리 탑재 제품으로 무상 교환해주는 파격적인 리콜을 단행했다. 그러나 ATL 배터리가 사용된 제품에서도 발화사고가 연이어 발생했다.
결국 삼성전자는 출시 70일 만에 갤노트7의 완전 단종을 결정했다. 삼성전자의 손실은 막대했다. 리콜과 재고 처리비용만 4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정상적으로 제품을 팔지 못한 것까지 따지면 추정 손실은 7조 원으로 늘어난다. 무엇보다 소비자 신뢰의 추락이 삼성에는 뼈아픈 타격이었다. 갤노트7의 발화 사고는 단순한 품질 불량을 넘어서 제품 안전성 문제로 우려를 낳았다. 현대인의 일상생활에 필수품과 같은 스마트폰에서 안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삼성전자는 이날 고강도 재발 방지책도 내놨다. 우선 배터리 안전 문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8단계로 구성된 배터리 검사 프로세스를 도입했다. 또 제품 기획 단계부터 안전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아 다중 안전장치를 적용키로 했다. 핵심 부품 설계와 공정 관리는 신설된 '부품 전문팀'이 맡는다고 한다. 충실한 제품 점검을 위해 차기작인 갤럭시 S8의 발표 일정도 늦출 계획이다.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이 같은 노력이 결실을 보면 삼성전자에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제품의 안전성 보장은 소비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기본 중 기본이다. 삼성전자가 갤노트7 사태로 떨어진 국내외 소비자 신뢰를 회복하고 국가 경제를 견인하는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서울경제]
10. 수출 호조라지만 배경 제대로 분석해야
수출이 오랜만에 호조세를 보이고 있다. 22일 관세청에 따르면 이달 1~20일 수출액은 276억1,3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0%나 늘어났다. 이는 2011년 8월(25.5%) 이후 6년5개월 만에 가장 높은 월별 증가율이다. 지난해 10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감소세를 보이다가 11월 2.5%, 12월 6.4%로 두 달 연속 늘어난 데 이어 올 들어서는 증가세가 더욱 가팔라지는 모양새다. 조업일수를 감안한 하루 평균 수출액을 비교해봐도 13.3% 증가했다. 악재가 켜켜이 쌓여 있는 우리 경제에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경제를 먹여 살려온 수출은 최근 2년간 부진을 면치 못했다. 2015년 1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19개월 연속 전년 대비 감소하면서 사상 최장기간 연속 감소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8월 2.6% 증가하면서 연속 감소 행진을 종결했지만 9월과 10월에 다시 줄었다. 이 때문에 연간 수출도 58년 만에 처음으로 2년 연속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수마저 얼어붙었으니 경제가 위기국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수출회복세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된다. 너무 특정 제품에 의존한 탓이다. 1월 석유제품 수출은 유가 상승으로 단가가 높아진 덕분에 86.0%나 급증했고 반도체도 사물인터넷(IoT) 등의 수요 증가에 힘입어 52.5% 늘어났다. 여기에 지난해 1월 수출이 워낙 저조해 조금만 늘어도 증가율이 크게 높아지는 기저효과 영향도 크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올해 수출환경도 녹록지 않다. 그렇더라도 수출회복의 불씨를 반드시 살려 탄력을 붙여나가야 한다. 경쟁력이 떨어진 주력제품의 고부가 전환을 서둘러 추진하고 고급 소비재 및 서비스 산업 수출도 확대해야 한다. 우리 수출의 부가가치율은 58% 수준으로 80%가 넘는 미국과 일본에 크게 뒤지는 상황이다. 기업은 수출의 본질적인 경쟁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정부는 이를 지원하는 데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주요신문칼럼
1. [서울신문][김태의 뇌 과학] 렘수면 행동장애
60대 초반의 부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병원으로 들어간다. 부부의 사이는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부인이 한밤중에 남편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이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남편은 50대 중반부터 잠꼬대가 늘었다고 한다. 한밤중에 큰소리로 싸우는 듯 잠꼬대를 하는가 하면 손발로 허공을 휘젓기도 했다. 수면다원검사를 받은 후 남편은 ‘렘수면 행동장애’로 진단을 받는다. 가상의 사례이지만 정신건강의학과에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병의 양상이다.
‘렘수면’이란 수면 중 뇌활성이 각성 상태와 비슷하게 변화하면서 안구의 빠른 움직임이 나타나는 시기를 가리킨다. 전체 수면 시간의 20% 정도를 차지하고 보통 이 시기에 꿈을 꾼다. 꿈속에서 달리고 싸우고 도망가는 등 희로애락을 경험한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의 뇌는 이런 내용들을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움직이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는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해답은 렘수면 때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에 있다. 바로 ‘렘수면 무긴장’이라는 현상이다. 렘수면이 존재하는 동물들은 모두 렘수면과 함께 근육의 긴장도가 사라져 축 늘어진 상태가 된다. 즉, 렘수면이 시작되면 뇌신경에서 어떤 운동명령이 떨어져도 그 신호가 최종 목적지인 근육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이제 독자들도 눈치챘을 것이다. 렘수면 무긴장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병적 증상이 바로 렘수면 행동장애인 것이다. 1986년 카를로스 솅크 박사와 마크 마호월드 박사가 최초로 렘수면 행동장애에 대한 공식적인 학술보고를 한 이래로 병의 경과와 치료에 대해 많은 보고들이 이어졌다.
프랑스 리옹 뇌과학 연구센터의 파트리스 포흐 박사팀은 중뇌덮개의 한 영역에서 ‘글루타메이트’라는 물질 분비를 억제하자 실험쥐가 렘수면 단계에서 눈을 감은 채로 음식을 찾거나 먹는 시늉을 하고 뛰거나 점프하려는 동작까지도 보였다고 보고했다.
최근 수면의학자들은 렘수면 행동장애가 있는 상당수의 환자에서 파킨슨병이나 루이체 치매 등의 신경퇴행성 질환이 나타나는 현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와 미국, 캐나다, 스페인 등 세계 각지에서 이 질환에 대한 추적관찰이 이뤄졌는데 진단 5년 뒤에 18~35%의 환자에서 신경퇴행성 질환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됐다. 10년 이상의 관찰에서는 80% 이상의 환자가 신경퇴행성 질환을 경험했다.
필자가 국내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서는 5년째는 18%로 외국에 비해 낮지만 6년째는 35%로 급격히 높아졌다. 이처럼 렘수면 행동장애는 그 자체도 위험하지만 5~10년 뒤에 파킨슨병 등 신경퇴행성 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정확한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렘수면 행동장애의 증상 자체는 약물치료를 통해 조절할 수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는 신경퇴행성 질환으로의 이행을 예방할 수 있는 약은 개발하지 못했다. 다만 살충제, 흡연, 허혈성 심장질환, 스테로이드 흡입제 사용 등의 외적 요인들이 신경퇴행성 질환으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렘수면행동장애는 단순히 잠꼬대가 심한 상태가 아니며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중추신경계의 질병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직은 병의 원인과 치료법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지 않지만 임상의학과 뇌과학이 융합해 질환 극복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길 바란다.
2. {조선일보][일사일언] 삶의 무대에 단역은 없다
할머니 댁은 6시간 넘게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시골이었다. 그래도 가는 길이 힘들지 않게 느껴진 까닭이 있었다. 밤만 되면 사랑방에 모이는 동네 할머니들이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들의 기억은 자유자재로 이야기를 변형시키곤 했다. 구렁이가 한 사람만 더 잡아먹으면 사람이 되려는 찰나, 억울하게 연못에 빠져 죽은 색시의 원을 풀어 주었던 사또가 등장해 판을 깨는 식이다. 여우가 재주를 넘는 결정적 순간에 "그래서 어떻게 됐더라?" 하고 되묻기도 하셨다. "조금 있으면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두꺼비 앞에서 재주를 넘겠구먼." 다른 할머니들이 추임새처럼 말을 잇는다.
기승전결 희미한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한가득 이고 서울로 돌아오면 나는 그걸 또 재구성하고 각색했다. 동네 친구들에게 들려주기 전날 밤이면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주느라 밤을 꼴딱 새우기도 했다. '옛날 옛적 동네에 한 총각이 있었는데…' 대부분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를 "옛날 옛적 구운리라는 곳에 똘이라는 총각이 살고 있었어." 이런 식으로 바꾸고, 지나가는 마을 사람 한 명 한 명에게도 정성을 들여 이름을 만들어주곤 했다.
이 버릇은 커서 연극을 할 때도 계속 됐다. 마을 사람 1, 직원 2…. 잠시 나오는 역할에도 이름을 넣어 주자며 작가를 조르거나 여의치 않으면 우리끼리라도 지나가는 역할에 이름을 붙여 주곤 했다.
무대에 등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이유 없이 나왔다 들어갔다면, 그 공연은 좋은 공연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 사람의 이름이 무언지 관객은 굳이 몰라도 된다. 잠깐의 등장이지만 '지나가는 사람 1'이 등장한 연극과 제 각각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 연극은 공연의 풍성함에 분명 차이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매일매일 스치는 수많은 사람, 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엄연하게 자신만의 이름이 있고 각자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자. 누군가를 쉽게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일이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3. [중앙일보][삶의 향기] 손글씨, 또 다른 나
가슴이 철렁한다. 내 남자 친구의 책갈피에서 낯선 여자의 글씨를 발견하는 것은 그 둘의 다정한 사진을 보는 것보다 더 잔혹하다. 그 글씨는 그녀의 체온과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재의 자리에 필체로 제 존재를 알리는 신호, 그것이 손글씨다. 최근 젊은 세대에서 손글씨가 인기다. ‘육필’이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없는 ‘손글씨’라는 말이 왜 그들 사이에 유행할까.
지난주 가수 비(정지훈)가 배우 김태희와 결혼했다. 이들이 더 아름답게 비치는 것은 비가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결혼을 알리는 손편지다. 그 편지에서 비는 제 연인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적는다. 월드스타의 결혼에 한류 팬들은 뜨겁게 축하했다. 해외 팬들은 그 편지로 한국 남자의 손길로 촘촘히 쓰인 한글이 사랑스러운 형태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어느새 손글씨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사회적 시선에 예민한 연예인들부터 손글씨가 대세다. 비와 김태희처럼 손으로 쓴 편지로 결혼을 알리는 경우가 흔해졌다. 잘못을 사과할 때도 손글씨는 진실돼 보인다. 예전에는 연예인이 물의를 일으키면 소속사들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당사자가 손글씨로 쓴 사과문을 SNS에 올리는 게 공식처럼 됐다. 직접적인 데다, 그래서 따뜻한 반응을 이끌어내기에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필기구도 화려하게 부활했단다. 디지털·모바일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그리워하는 현대인이 많아졌다. 최근 반복적인 업무와 딱딱한 디지털 인쇄체에 지쳐 손글씨를 쓰거나 그림에 색을 직접 칠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힐링족이 늘어나는 중이다. 그 바람을 타고 100만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필기구에 대한 수요도 커졌다. 얼마 전 읽어 본 신문기사에 따르면 연필과 샤프, 지우개 등 필기구 판매량이 전년 대비 80%나 증가했다고 한다.
복고풍 만년필에 대한 수요는 놀랍다. 독일 몽블랑사는 매년 판매액이 늘어난다고 자랑한다. 국내 만년필 생산 업체들도 손글씨·캘리그래피의 바람을 타고 만년필 매출이 20%나 늘었다. 디지털 세대에게 손글씨와 필사가 새로운 놀이가 되기도 한다. 젊은 세대의 이용자가 많은 인스타그램의 경우 손글씨란 주제어로 올라온 사진이 90여만 장에 이르는 모양이다. 흠모하는 시인을 공유하는 동호회 사람들은 그 시인의 시를 베껴 써서 그들의 홈페이지에 자랑한다.
나의 하루는 붓에 먹을 적셔 쓰고 그리는 일로 시작한다. 내가 주로 쓰는 붓은 동양화 붓이다. 그것은 서양화의 붓과 달리 털이 곱고 너무나 부드럽다. 하지만 그 붓이 나의 손과 만나면 단단한 뼈보다 강직하고 칼날처럼 예리해진다.
나뿐만 아니라 동양화를 훈련한 대부분의 화가들은 그 유연한 털로 바위를 뚫는 정보다 더 강하고 날카로운 힘을 매번 느낄 것이다. 그것도 붓자루의 맨 위를 가볍게 잡고 손목과 팔꿈치에 아무런 받침 없이 일정한 속도로 그어 가는, 그 흐름에 온 정신과 몸을 내맡긴다. 나의 스승님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면서 단 한 자의 글씨라도 매일 써 보라 권하셨다. 심신의 단련에 이만한 것이 없다.
그림은 대개 드로잉·회화·그래픽으로 그 형식을 분류한다. 드로잉은 선으로 표현되고 회화는 칠로, 그리고 그래픽은 도식으로 표현된다. 이들은 또한 유아가 성장 과정에서 그 표현을 알아 가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 중 드로잉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본능적인 몸짓의 표현에 해당한다. 획을 드러내는 글씨, 휘갈긴 낙서, 빙판을 가르는 스케이트의 경로 등은 사람의 몸짓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원초적 행위다.
손글씨는 드로잉처럼 가공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 글씨를 쓴 사람 고유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매체이자 그가 존재하는 굳건한 증명이 된다. 손글씨는 또 하나의 나인 셈이다. 돌아보면 나도 혹여 나의 손글씨 때문에 다른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었을까.
4. [세계일보][이동식의小窓多明] 온돌이 하고 싶은 말
옛말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고 하면 여름에 화로 신세요, 겨울에 부채 신세라고 해서 철 지나면 찬밥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한겨울 추위가 닥칠 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은 화로 같은 ‘등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얼마 전 여름에 느닷없이 온돌난방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한 외국인이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이란 책에서 ‘유기농법’과 ‘선비정신’과 함께 ‘온돌난방’을 세계에 자랑할 우수한 문화라고 지적한 것이 다시 알려지면서였다.
대체로 서양에 살다 온 사람들은 히터로 대변되는 서양식 난방이 얼마나 영양가가 없는지를 안다. 난방 열기가 위로 그냥 날아가면서 실내가 여전히 춥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방의 밑에서부터 열이 골고루 위로 올라가는 우리의 온돌을 그리워하게 된다. 탐구정신이 강한 서양인들이 벌써 그들의 건축에 온돌난방을 채용한다는 소식도 있다. 적어도 열효율 면에서는 온돌이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으니 우리가 조금 더 머리를 써서 현재의 시스템을 더 편리하게 개량하면 ‘한류’ 바람이 온돌에서부터 불어나오는 ‘온풍’이 될 수도 있겠다.
이런 전통적인 생활문화의 우수성이 이제 다시 언급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전통의 가치, 특히 건축이나 주거문제에 있어서 조상들이 왜 이런 문화를 지녀왔던가에 대한 연구와 활용이 미진했거나 부족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보다 앞선 것으로 보였던 서양의 논리, 서양의 방법론을 따라오는 과정에서 건축이나 주거문화도 우리 것은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던 때문이 아니겠는가.
조선시대에 도읍인 한양이나 각 지방 고을은 지역의 등뼈라 할 진산(鎭山)을 뒤에 두고 그 앞 평지에 남향으로 자리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전통건축은 지형에 알맞게 터를 잡고 바람과 햇빛을 최대한 활용하는 자연순화적인 방법이었는데, 갑자기 도시가 팽창하면서 도시의 전망을 높은 아파트들이 다 가리게 돼 어느 지역, 어느 도시건 그 나름의 자연적 풍광과 지형적 이점이 다 죽어버린 것을 요즈음 우리들은 후회한다.
집이나 공공건물을 짓는 것도 전통적인 양식이 무시되고 일찍이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식 건물,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국식이 가미된 성냥갑 같은 얼치기 사각형 건물들이 고을과 도시의 얼굴을 덮었다. 물론 요즈음에야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이미 일그러진 도시 전체의 얼굴을 다시 찾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이다.
새로 만든 경상북도 도청이 우리의 전통 건축양식을 응용했다고 하는데 그런 작은 성과를 넘는 걱정거리이자 부끄러운 일은 전국 곳곳에서 특정 건축가를 서로 모셔가려고 경쟁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안도 다다오(安藤忠雄)라는 일본의 한 건축가는 노출콘크리트의 묵직함과 빛·그림자, 물을 활용한 검박한 스타일로 ‘일본성’을 구축함으로써 세계 건축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가 일본의 어느 섬에 설계한 지중미술관 등이 한국인 관광객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돼 있기는 하지만, 전국의 지자체나 기업들에서 무슨 새로운 건물을 세운다며 다투어 그에게 설계를 의뢰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그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그 사람 작품만이 서 있는 경우가 되지 않을까.
일본은 지난해에도 이공 분야에서 또 수상자를 내는 등 노벨상을 다투어 수상했고, 건축 분야의 노벨상이라고 일컫는 프리츠커 상도 우리들은 아직 수상자가 없지만 일본의 건축가들이 10명 가까이 수상하고 있어 문화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데 그게 그냥 거저 되는 것인가.
노벨상에서 일본이 많은 수상자를 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기초학문 연구가 철저한 데다 남의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사고방식과 독창적 연구방식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자연스레 따라온 성과라는 분석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건축 분야에서도 수상자를 다수 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전통적인 건축관을 바탕으로 현대라는 환경에 맞추어 잘 풀어내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건축가와 건축문화를 살릴 생각 대신에 너도나도 외국 유명 건축가에게 몰려가는 것은 이 시대 또 다른 문화 사대주의이자 문화 맹종이라고 비난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국 건축가들의 작품도 여러 작가의 장점을 취사선택해서 우리의 것으로 재탄생시켜야지 무조건 특정 작가에게 몰려가는 것은 오직 일등만을 찾고 추구하는 우리의 일류병에다, 외국의 좀 좋다는 것이라면 무조건 따라가는 병폐의 재발이 아닐 수 없다.
5. [경향신문][이유미의 나무야 나무야] 뿌리 깊은 나무
날씨가 춥다. 대한이 지나고 나서 더 추워진 날씨에 몸과 마음이 모두 춥다. 내린 눈이 쌓여 며칠씩 머무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 그나마 때 묻지 않고 희게 쌓여 있는 눈으로 기분이 좀 나아지기도 한다.
국립수목원의 박물관 앞에는 기온에 민감해 간혹 일 년에 두 번씩 꽃을 피우기도 하는 독특한 벚나무 품종이 있는데 한동안 따뜻했던 겨울 날씨에 그만 꽃봉오리를 내보내 버렸고, 추위에 피지 못한 채 얼어 버렸다. 아깝기도 하여라!
추위에 피해를 입는 것은 항상 추울 때가 아니라 갑자기 추위가 닥쳐올 때이다. 비바람이 불어도, 혹독한 가뭄이 들어도, 예측하고 준비하여 적응된 나무들은 잘 견뎌내는데 이 나무들은 대개 뿌리를 땅속 깊이 단단하게 박고 있다.춥기는 나라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이 초유의 어려움들은 물론이고, 핵으로 위협하는 예측불허의 북한이 있고,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한 미국, 힘과 생각이 특별한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이 있고, 외환의 동향에 따라 함께 휘청거리는 산업구조 등등. 세상의 바람과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참 어렵고도 고독한 나라이다. 우리나라는 땅속에 얼마나 깊고 굵은 뿌리를 뻗고 있는 것일까! 저력이 있어도 뿌리째 흔들리면 나무는 살기가 참 어려운데….
뿌리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식물의 밑동으로서 보통 땅속에서 식물체를 떠받치고 수분과 양분을 빨아올리는 기관’으로 정의되어 있다. 세 번째 정도에는 ‘사물이나 현상을 이루는 근본을 비유하는 말’이라는 뜻도 있다. 보이지 않아도 나무를, 혹은 우리를 지탱하는 뿌리는 수관이 울창한 만큼, 어려운 환경을 견뎌낸 만큼 깊고 견고하다. 나무에 비료를 줄 때 밑동 근처만이 아닌 나무줄기가 펼쳐진 곳만큼, 널찍하게 주는 이유는 그곳까지 뿌리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굵고 단단한 나무뿌리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원뿌리에서 분지한 곁뿌리, 다시 여기서 나온 잔뿌리들이다. 잔뿌리 끝의 표피세포는 머리카락처럼 신장된 뿌리털과 생장점, 생장점을 덮어 보호하는 뿌리골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면적을 증가시켜서 물과 무기물을 흡수함으로써 나무를 살아 있게 하는, 진짜 중요한 역할이 이토록 작고 섬세한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간혹 우리는 커다란 암벽 틈새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소나무를 보면서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이 바위를 뚫는 강건함도 그 시작은 어린 나무의 여리고 가는 뿌리 끝이 바위틈 어딘가에 나 있는 틈새를 찾아내 들어가는 일이다. 아주 빨리 자라는 경우 시간당 1㎜, 그러니까 하루에 2~3㎝나 자라기도 하는 이 뿌리털은 점차 굵은 뿌리로 자라 그 터에 자리를 잡게 된다. 표면적을 넓히므로 효과적으로 물을 흡수하여 나무에 생명을 유지한다.
호밀 뿌리로 실험을 한 결과 5ℓ 정도의 부피를 차지하는 뿌리에 달리는 뿌리털의 표면적이 테니스 코트 2개에 깔아놓을 만큼 넓었다고 한다. 또 어떤 식물의 뿌리에서 하루 동안 자라는 뿌리털의 길이를 모두 더하면 9㎞에 달한다고 하니 정말 여리고 가늘어도 일선에 있는 이 존재들의 힘은 보통 국민들의 힘만큼이나 놀랍다.
나무만 그런 것이 아니다. 풀도 만찬가지이다.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식물들은 대개 꽃이 아름답고, 잎보다 꽃이 먼저 피며 키가 작은 특징을 가진다. 다른 풀들이나 큰 나무에 햇볕이 가리기 전에 부지런히 살아가는 전략을 가지기 때문인데, 이런 풀들의 공통점은 뿌리가 깊다는 점이다.
예전에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앉은부채’라는 식물을 연구한 적이 있다. 보통 이 풀의 꽃색은 자갈색(정확히는 꽃을 둘러싼 포의 색이다)인데 노란색을 가진 개체들이 아주 드물게 있었다. 이 색의 차이가 서로 다른 종(種)이기 때문인지 그저 변이에 지나지 않는지가 학술적인 논란이었다.
곁에서 관찰하기 위해 한 포기를 캐기 시작했는데 지상부 꽃의 높이는 10㎝ 미만이었지만 뿌리가 1m에 달해 하루 종일 진땀을 흘린 경험이 있다. 언 땅을 녹이고 꽃을 피워낸 저력이 바로 이 깊고 굵은 뿌리에서 기원하였던 것이다.
뿌리는 때론 변신을 하기도 한다. 뿌리에 특별히 양분을 저장하고 싶을 때는 덩이뿌리를 만드는데, 바로 우리가 겨울철 맛있게 먹는 고구마가 그 경우이다. 대기 중에 공중습도가 많을 때에는 공기 중에 뿌리를 내리기도 하는데 이를 기근(氣根)이라 하며 열대우림에 나무에서 줄줄이 내려오는 뿌리가 바로 이것이다. 기근은 낙우송처럼 물속에 잠겨 숨쉬기가 어려울 때 땅 위로 올려보내기도 한다. 때론 뿌리 끝에 뿌리혹박테리아가 공생하도록 허락하면서 공중의 질소를 양분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
나무가 이유 모르게 죽어가는 경우를 가끔 만나는데 그 원인을 찾다보면 물빠짐이 안돼 고인물에 뿌리가 썩어가거나, 몰래 묻어둔 쓰레기나 폐기물 등에 뿌리 끝이 닿아 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눈으로는 안 보였던 이 근본적인 문제를 바로잡는 일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굵은 뿌리와 실뿌리가 연결되어 어떤 어려움도 버텨내며 생명의 물이 순환되어 살아가는 뿌리깊은 나무이길, 봄이면 어김없이 싱그러운 새순이 돋고 여름엔 녹음이 우거져 풍성하며 가을이면 아름답게 물들고 겨울을 굳건히 견뎌 매년 새봄을 맞는 영원히 무궁한 나무이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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