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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교육용으로 쓰기 위해 올리는 자료로 상업적 목적은 없으며 선정된 사설의 정치적 성향은 블로그 운영성향과 무관합니다.
주요신문사설
[서울신문]
1. 文 대통령 첫 안보회의 단호한 메시지 北 새겨야
문재인 대통령 정부가 출범하고 불과 나흘이 지난 어제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도발을 감행했다. 이 시기에 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린 의도가 무엇인지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어제 도발은 새 정부가 핵과 미사일로 정권의 안위를 도모하려는 자신들의 전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게 순리다.
결론적으로 북한은 문 대통령의 단호한 대응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국제사회의 룰을 위반하고 동북아시아 평화를 깨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탄도미사일 발사 직후 소집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회의에서 북한의 도발을 “유엔 안보리 관련 결의의 명백한 위반일 뿐 아니라 한반도는 물론 국제평화와 안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로 규정했다. 이어 “강력한 규탄”과 함께 “깊은 유감”과 “엄중한 경고”라는 수위 높은 표현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말하는 새 정부에 미사일 발사로 응답한 김정은 정권에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이런 모습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국민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취임 직후의 대통령이 ‘지하벙커’로 불리는 청와대 위기관리센터 상황실에서 NSC 상임위를 주재한 것은 그 자체가 북한에 경고하는 효과가 있다. 회의에는 전 정부가 임명한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 윤병세 외교부 장관, 홍용표 통일부 장관, 이병호 국정원장이 참석했고 이순진 합참의장은 화상보고를 했다.
전·현 정부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문 대통령은 나아가 “군은 굳건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어떤 군사도발에도 대응할 수 있게 철저한 대비 태세를 유지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 안보관(觀)의 일단을 파악하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북한의 도발에는 정치권도 한목소리로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강력한 응징”을 말했고 국민의당과 정의당은 “북한은 헛된 망상을 버릴 것”과 “무력 도발은 고립을 자초할 뿐”이라고 각각 비판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거론한 대로 사드 배치 문제의 해법은 새 정부의 당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은 도발이 대화를 말하는 새 정부의 입지를 좁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 대통령은 이날 “북한이 오판하지 않도록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고 했지만 대화 가능성은 여전히 열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대화가 가능하더라도 북한의 태도 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함을 보여 줘야 한다”고 했다. ‘태도 변화’라는 전제가 조금은 공고해졌으니 불필요한 도발은 북한에도 백해무익함을 알 수 있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라는 남북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데 북한이 훼방을 놓을 이유는 없다.
2. 유엔 고문위도 지적한 韓·日 위안부 합의
유엔 고문방지위원회가 한·일 위안부 협정의 개정 권고 보고서를 낸 것은 양국 간 비정상적인 합의 내용을 정상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점에서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한마디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 진실 규명, 재발 방지 약속 등과 관련해서 합의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재작년 12월의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국제사회에서 나온 첫 공식 평가다. 시기상으로도 함축성이 매우 크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일 아베 신조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며 재협상 가능성을 내비친 상황이다. 비록 구속력이 없지만, 대선 기간 위안부 합의 재검토를 내세웠던 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 준 보고서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번에 보고서가 협정 내용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들에는 어디 하나 틀린 말이 없다. 우선 일본 측이 이미 10억원을 출연해 배상했다고 주장하지만, 금전적인 보상만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반박했다. 위안부 강제 동원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법적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합의 이후에도 일본 정치인들이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라고 부르며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지만 합의에는 막을 대책이 없다. 객관적인 역사 자료를 계속 발굴해 진실을 규명하고, 교과서 기술과 사료관 건립 등을 통한 재발 방지 대책이 빠진 것도 문제다. 피해 당사자를 배제한 데다 국회 비준을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도 우리 국민의 정서를 오롯이 대변하고도 남는다.
위안부 문제는 당사자인 할머니들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수난사다. 그래서 내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국민의 자존심, 나라의 품격을 손상시킨 사례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베 총리는 여전히 “위안부 합의는 국제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만큼 양국이 책임을 갖고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유엔의 합의 내용 개정 권고로 상당히 설득력을 잃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국내 정치용으로 계속 써먹다가 국제사회에서 낭패당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우리 정부도 이전 정부처럼 양국 관계가 출범 초기부터 대결 국면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유엔 보고서를 지렛대 삼아 멀티 트랙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3. ‘인천공항’ 비정규직 전환, 민간 확산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한 의미는 각별하다. 취임과 동시에 1호 업무로 일자리위원회 구성을 지시한 것과 맥락이 닿은 행보다. 지난 12일 인천공항공사를 찾은 문 대통령은 “공공 부문의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일자리 문제를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일찍이 선언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대선 주요 공약이기도 했다. 취임하자마자 설치를 지시한 일자리위원회도 대통령 직속으로 운영된다. 청와대의 몸집을 줄이면서도 일자리 담당 수석비서관을 신설하기로 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는 ‘차별 없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일관된 방향성이 감지된다. 무엇보다 반갑고 든든하다.
우리나라 비정규직 근로자의 지난해 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54%에 불과했다. 비정규직의 근무 환경과 처우를 개선하는 작업은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공공 부문에 고용된 비정규직만 해도 현재 30만명이 넘는다. 이들 중 상시적 업무를 하는 사람은 정규직으로 우선 전환하도록 유도한다는 게 새 정부의 방침이다.
쉬운 일일 수야 없다. 그러나 좋은 일자리를 함께 나누려는 의지가 전제되면 가능한 일이다. 인천공항공사만 봐도 알 수 있다. 로봇을 도입해 인력을 대폭 줄이려던 당초 계획을 접고 비정규직 1만명 전원을 연내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방향을 틀었다.
문제는 얼마나 내실이 있느냐에 있다. 공공 부문의 비정규직 고용 개선 노력은 지금까지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기간제 노동자들은 근무 여건이나 임금에서 차별을 벗지 못했다. 인천공항공사의 움직임에 주말 내내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다.
대기업 평균보다 연봉이 높은 ‘신의 직장’ 공공기관들이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에 기득권을 나눠 줄지가 우선 의문이다. 많은 공공기관들이 독과점을 무기로 생산성 향상은 뒷전이라는 질타를 받고 있다. 경쟁 없이 편히 벌어 푸짐하게 나눠 먹는 지금의 해이한 임금체계를 먼저 손봐야 한다. 그러지 않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만 이행돼서는 국민 부담만 늘게 되는 셈이다.
비정규직 제로 시대는 기존의 고임금 정규직 근로자들의 양보가 선행돼야 비로소 해답이 보인다. 그런 인식의 토대 위에서 공공기관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모범 선례를 착실히 쌓아 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야만 민간에서도 변화의 싹이 틀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
4. '우병우 봐주기' 수사 해놓고 술판 벌인 적폐검찰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불구속 기소 처리한 지 나흘 만에 검찰 수사팀과 법무부 간부들이 금일봉을 주고받으며 술판을 벌인 사실이 드러났다. 구체적인 경위는 좀더 확인이 필요하겠으나 <한겨레>가 취재한 사실만으로도 국민들의 시선을 아랑곳 않는 검사들의 오만함이 느껴진다. 부실 수사로 비판이 쏟아지는 민감한 시점에 돈봉투 돌리며 폭탄주까지 나눠 마셨다니 ‘검찰 권력’은 역시 적폐요 청산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팀 검사 등 7명, 안태근 검찰국장 등 법무부 간부 3명은 4월21일 서울 서초동 음식점에서 폭탄주 10여잔을 나눠 마시고 50만~100만원이 든 금일봉도 주고받았다고 한다. 부실 수사로 지탄을 받은 수사팀과 직권남용의 공범 혐의를 받아온 검찰 간부들이 자숙은커녕 검찰청사 인근에서 술판까지 벌였으니 말문이 막힌다. 이 지검장은 국정농단 수사책임자였고 안 국장은 우 전 수석과의 통화로 내사 대상이어서 법 위반 소지도 있다. 애초의 통화 전말을 포함해 봐주기 수사의 직권남용 의혹까지 재수사 필요성도 더욱 커졌다.
우 전 수석의 ‘검찰 농단’ 혐의는 ‘검찰 패밀리’에 의해 덮어졌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윤갑근 수사팀은 수사 초기부터 늑장 압수수색에 통화내역도 확보 않는 등 사실상 증거인멸을 방치했다. 특검 역시 시간적 제약 속에 친분관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결국 검찰은 두번째 수사에서도 개인 비리를 파헤치지 않는 등 소극 수사로 영장 기각을 자초했고 그 뒤에도 보충수사도 없이 불구속 기소 해버려 의혹을 키웠다.
온 국민이 분노하고 검사들도 다 짐작하는 적폐검찰의 ‘과거’를 그대로 두고는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검찰개혁 입법의 동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청산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이데일리]
5. 시험대에 오른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긴급 소집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북한 도발에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북한이 이날 새벽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한 데 대한 엄중 경고다. “이번 도발은 유엔안보리 관련 결의의 명백한 위반일 뿐 아니라 한반도는 물론 국제평화와 안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는 게 문 대통령의 규탄 내용이다. 취임 나흘 만에 윤곽을 드러낸 문재인 정부의 대북 안보정책 기조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이 북한 미사일 발사 보고에 접하고 곧바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다는 자체에서 긴박했던 분위기를 짐작하게 된다. 고강도의 핵실험이 아니라 사소한 도발과 책동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달빛정책’ 가능성에 대해 나라 안팎의 의구심이 쏠리는 상황에서 국가안보 측면에서만큼은 확실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간주된다.
이번 조치로 국민들이 문 대통령의 대북 안보관에 대해 더욱 신뢰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문 대통령이 “여건이 조성되면 평양에 가겠다”고 언급한 것이 남북 화해를 이루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선거 과정에서 빚어진 ‘주적(主敵)’ 논란 등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미심쩍어 했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애초에는 “당선되면 미국보다 북한을 먼저 가겠다”고도 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문 대통령의 대북 접근 움직임에 대해 경계심을 표명하는 것도 이러한 기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한·미 양국 간에 정상회담 일정과 의제에 대한 조율이 시작되는 만큼 대북 화해를 위한 문 대통령의 기본 의지를 전달하면서도 굳건한 대북공조 체제가 차질을 빚지 않도록 서로 의견을 모아가는 노력이 요구된다.
어느 정권에서도 대북 화해정책은 필요하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가 핵·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는 한에 있어서는 어떠한 화해 노력도 소용이 없다. 문 대통령이 이날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대화가 가능하더라도 북한의 태도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함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를 일찌감치 시험대에 올려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스승의날’ 김영란법, 아무래도 문제 있다
스승의날을 맞는다. 스승을 존중하는 풍토가 사라지면서 스승의날 행사가 한낱 겉치레로 전락한 지 오래다. 부정청탁 금지법(김영란법) 시행 이후 처음 맞이하는 올해는 유난히 더 쓸쓸한 분위기다. 캔커피는 물론 카네이션조차도 뇌물로 간주돼 함부로 주고받을 수 없게 된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사제지간의 소소한 정마저 끊는다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스승의날에 카네이션 선물이 전면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면 누구나 가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다. 학생회장이나 학급 반장, 동아리 대표 등 오로지 ‘학생 대표’만이 할 수 있다. 대표가 아닌 학생은 아무리 감사한 마음이 있더라도 선생님 가슴에 꽃도 달아 드릴 수 없는 이상한 사회가 돼버렸다.
심지어 색종이로 접어 만든 종이 카네이션도 금지 대상이다. 그것이 어째서 뇌물인가. 지난해에는 괜찮다고 했었다. 현장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가 허용 대상이고, 어디부터는 위반인지 매뉴얼을 뒤져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규정이 모호한 탓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다. 국민권익위마저 자꾸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졸속 제정의 후유증이다.
김영란법 제정 취지는 부패 고리를 끊어 청렴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취지가 좋다고 해도 부작용이 크고 혼란만 야기한다면 합리적인 방향으로 고치는 것이 옳다. 학생이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작은 성의까지 미주알고주알 법의 잣대로 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다간 김영란법에 대한 사회적인 거부감만 커지기 마련이다. 예절과 관습으로 이뤄지던 것을 법규에 포함시켜 강제로 규율한 자체가 잘못이다.
김영란법이 과도한 선물을 주고받는 부담을 덜어주는 순기능이 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제지간에 정을 나누고 고마움을 전하는 건전한 미풍양속까지 가로막는 역기능은 조속히 고쳐져야 한다. 법 규정을 그대로 존치시킨다고 해도 원래 취지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의 선물은 허용하도록 관련 규정을 손보는 게 온당하다. 사제지간을 일반 사회의 거래관계나 이권청탁 관계로 간주하는 것부터가 웃기는 발상이다.
[중앙일보]
7. 전병헌 신임 정무수석에 거는 기대
박근혜 정부가 몰락한 핵심 원인의 하나는 엉망인 당정 관계였다. 의원들이 뽑은 집권당 원내대표가 대통령 한마디에 쫓겨나고, 친박 실세 몇몇이 당 공천을 좌지우지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임기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청와대와 당 사이에서 갈등을 풀어줘야 할 정무수석은 재량권이 없어 대통령 눈치 보기에만 급급했다. 정권의 머리와 몸통이 원수처럼 싸우며 따로 놀았으니 총선·대선에서 연패하고 무너진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정무수석에 전병헌 전 의원을 임명한 것을 주목한다. 전 신임 수석은 비문(동교동계) 3선 의원 출신으로 민주당 원내대표 시절 유연한 협상력을 선보였고, 대인관계도 원만해 야권에도 가까운 의원이 많다. 당정 관계를 수평적으로 운영하고, 야권과의 대화도 활성화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엿보이는 인사란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집권당 의석은 120석에 불과하다. 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정의당과 연대하지 않으면 국정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 또 당내에도 비문세력이 만만찮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언제든 자중지란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다.
전 정무수석의 어깨가 그래서 무겁다. 이념과 지지기반, 노선이 제각기 다른 5당과 청와대 사이를 조율해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할 힘든 과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전 수석은 무엇보다 여야를 가리지 말고 의원들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그들의 쓴소리를 대통령에게 가감 없이 전달해야 한다. 집권당의 위세를 앞세워 군소야당을 흡수해 온 구시대적 정계개편 시나리오를 버리고,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통분모를 찾는 협치의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첫날 야당 지도부를 찾아 "최대한 자주 대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이 빈말이 되지 않게 하려면 전 정무수석에게 확실한 권한을 주고, 그가 전하는 비주류와 야당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의 비극은 수석들이 몇 달이 되도록 대통령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웠던 폐쇄적 시스템에서 비롯됐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8. 랜섬웨어 대응, 골든타임 놓치지 말아야
지난 12일(현지시간) 이후 영국·러시아 등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 약 100개국에서 12만 건 이상의 랜섬웨어 공격이 발생해 병원·기업·정부기관 등의 업무가 마비되거나 차질을 빚었다. 국내에서도 대학병원과 기업 등 최소 5곳에서 비슷한 감염 징후가 보고됐다. 국가 사이버 위기경보도 '관심'에서 '주의'로 상향됐다.
랜섬웨어는 모바일이나 PC에 침투해 시스템을 잠그거나 데이터를 암호화해 열리지 않게 한 뒤 이를 푸는 대가로 금품을 요구한다. 이런 악성 프로그램의 개발과 유포는 인질극이나 다름없는 사이버 중범죄다. 국제사회가 공조해 범인을 색출하고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랜섬웨어를 해결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다는 점이다. PC나 모바일을 포맷해 쓸 수 있지만 데이터는 포기해야 한다. 몸값을 주고 해독 키를 받아 데이터를 복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유괴범과 타협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런 대응은 재발만 부추길 뿐이다. 따라서 해커의 요구에 사적으로 따르지 말고 준정부기관인 한국인터넷진흥원에 신고해 공적으로 대응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의 경우 기업과 공공기관이 쉬는 주말과 겹쳐 피해 보고가 적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과 관공서가 근무를 재개하는 오늘부터 피해가 추가 확인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관공서·병원·학교 등은 직원들이 출근 직후 수상한 첨부파일을 열거나 특정 사이트를 함부로 방문하지 않도록 미리 주의시켜야 한다. 랜섬웨어는 e메일 첨부파일을 열거나 파일 공유 사이트를 통해 전파되는 것은 물론 특정 웹사이트를 방문만 해도 공격받을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단축 URL이나 사진을 통해서도 유포될 수 있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인터넷진흥원은 대처방법이 보다 많은 국민에게 전달되도록 발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운영체제(OS)업체나 보안업체도 수시 업데이트를 통해 피해 방지에 앞장서야 한다. 개인 차원에선 중요 자료를 정기적으로 백업하는 습관을 들일 계기로 삼아야 한다. 다양한 사이버 공격에 데이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세계일보]
9. 문 대통령, 외교·안보 컨트롤타워 신속히 구축하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총리·국정원장 후보자와 함께 비서실장 인사를 가장 먼저 했다. 이어 청와대 민정·국민소통·인사 수석을 임명했고 어제는 정무수석 등의 명단을 발표했다. 맨 먼저 인천공항으로 달려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다”고도 했다. 국정교과서 폐지와 5·18 기념식 때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지시가 잇따라 나왔다. 대통령의 동선은 정부가 정책의 중점을 어디에 두는지를 말해주는 강력한 메시지다.
외교·안보는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해선 안 된다. 한반도는 격동의 중심지다. 북한 김정은 정권의 잇단 도발에다 주변 강국의 ‘코리아 패싱’, 미·일·중·러 지도자들의 압박이 거칠다. 엄중한 상황에서 외교·안보 컨트롤타워 구축은 무엇보다 긴요한 업무다. 어제 북한의 미사일 도발 대응에선 김관진 안보실장과 윤병세 외교장관이 나서야 했다. 전 정부 외교·안보 라인으로는 근본적인 대응을 할 수 없다. 전·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의 노선 차이가 상당해 엇박자가 나기 십상이다. 사드 대책도 그중 하나다. 어정쩡한 동거가 장기화하면 업무 혼란이 커지고 국가안보에 구멍이 생기게 된다.
외교와 국방·통일 장관은 헌법상 총리 제청이 필요해 시일이 걸린다. 이낙연 총리 후보자가 이달 안 국회 동의절차를 통과하더라도 총리 제청을 거치면 외교·안보 관련 장관 임명은 내달 중·하순으로 늦춰질 수 있다. 국가안보실장 인선을 먼저 해 외교·안보 라인의 공백을 차단해야 한다. 청와대는 “검증에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군과 외교관, 학자 등 어느 출신으로 갈 것인지를 두고 정돈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도 나돈다.
전 정부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박근혜정부는 국방장관 출신을 안보실장에 앉혔다. 군 출신은 대북 문제에 전문성이 높은 장점이 있다. 그러나 국익 위주로 돌아가는 냉엄한 외교전을 보는 눈이 약하다. 그러다 보니 외교안보수석을 따로 두고 비서실장과 안보실장의 지휘를 같이 받도록 하는 이원적 조직을 꾸려야 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안보실의 조직을 강화했다. 외교안보수석을 없애고 관련 기능을 안보실로 흡수해 통합시켰다. 급박한 안보위기의 대응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다. 문 대통령은 총체적 난관을 헤쳐나갈 역량을 가진 국가안보실장을 조속히 임명해 강력한 외교·안보 컨트롤 타워를 구축해야 한다.
[매일경제]
10. 文대통령 친서민 행보에 대한 기대와 환호 속 일말의 우려
문재인 대통령의 소통, 친서민 행보가 연일 화제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주말인 13일 대선기간 자신을 전담취재했던 기자 60여 명과 북악산에 올라 감사의 뜻을 전했다. 등산 후 구내식당 오찬에서 문 대통령이 직접 배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밥을 푸고, 임종석 비서실장이 앞치마를 두르고 배식을 해 눈길을 끌었다.
국민은 이 같은 문 대통령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에 환호하고 있다. 해외와 비교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장면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정부의 깜깜이 청와대에 실망했던 국민은 '참모들과의 커피 산책' '비서관들과의 겸상' '출근길 시민과 셀카' 같은 뉴스에 "신선하다"며 박수를 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또 세월호 관련 기사에 '문변'이란 아이디로 직접 댓글도 달아 국민의 아픔에 공감하는 소통의 정치를 보여줬다. 과거의 권위적이고 경직됐던 청와대와 비교하면 큰 변화임에 틀림없다.
김정숙 여사 역시 따뜻한 스킨십과 인간적인 면모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3일 청와대 관저로의 이사를 위해 짐을 싸는 도중 집 앞으로 찾아온 민원인이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었다"고 하자 라면을 대접했다. 민원인은 "한마디라도 들어주기라도 한다는 게 어딘가. 세상이 바뀐 것 같다"며 감동했다고 한다.
청와대와 국민 사이에 놓여 있는 높은 장벽에 절망하고 불통의 정치에 억눌려온 서민들로서는 큰 변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탈권위적인 청와대를 만들겠다고 천명했는데 좋은 출발이다. 군림하는 청와대, 제왕적인 대통령제 청산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은 만큼 정권 초기 보여주기식 쇼에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다. 국정교과서 폐지와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등을 우선적으로 지시한 점이 그렇다. 모두 공약 사항이지만 통합과 협치, 포용이 우선시되는 현시점에서 그렇게 서두를 만한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조국 민정수석이 "검찰의 수사를 지휘하지 않겠다"고 말한 후 3시간 만에 문 대통령이 세월호 재조사와 국정농단 추가 조사를 언급한 데 대해서도 우려 섞인 시선들이 적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탈권위적인 행보에 대해 국민은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경제·안보 위기 대응, 야당과의 협치 등 시급한 현안에 대해서도 탁월한 국정 운영 능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주요신문칼럼
1. [서울신문][그때의 사회면] 노면 전차
논란 속에 대전 지하철 2호선을 트램(노면 전차)으로 운행한다는 계획이 확정됐다. 2025년 완공 목표인데 전차가 사라진 지 57년 만에 다시 등장하는 셈이다. 대전의 트램은 무가선으로 별도의 전기 공급선 없이 대용량 전지를 충전하여 운행하는 방식이다.
서울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에 최초로 전차 선로가 부설되어 역사적인 개통식이 열린 것은 1899년 5월 17일이었다. 그러나 전차는 평균 시속이 7㎞밖에 안 됐고 자동차 운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1968년 11월 29일에 운행을 중단했다.
전차의 이런 문제는 지금도 풀리지 않아 트램 운행을 반대하는 대전 시민들도 많다고 한다. 그래도 친환경적이고 타고 내리기가 쉬워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는 전차가 주요한 교통수단이다.
구한말에 전차가 들어온 계기는 명성황후와 관련이 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뒤 고종 황제는 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지금은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을 자주 찾았다. 이를 본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과 보스트위크가 행차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며 고종을 설득했다. ‘전기철도’, ‘전기거’, ‘전거’라고도 불리던 서울의 전차는 일본 교토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운행된 첨단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막상 전차가 개통되자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전차의 모양새가 상여를 닮았다며 불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탑골공원 앞에서 5살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숨지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전차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질렀다.
193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전차 노선은 점차 확장되었다. 동대문에서 청량리·왕십리·노량진·마포행과 을지로 순환선, 종로~돈암동선, 효자동~원효로선이 완성되었다. 6·25 후 이화동∼중앙청, 아현동~신촌 구간을 운행했다. 교통량이 급증하자 1957년 무렵부터 전차 운행 중단론이 나왔다. 전차는 도로를 점유하는 만큼 수송 효율성이 따라가지 못해서다.
1955년에 서울의 자동차 수는 4359대였는데 1965년에는 1만 6624대로 불어났다. 전차 퇴출에 속도를 낸 사람은 1966년 4월 부산시장에서 서울시장으로 영전한 육군 소장 출신 김현옥이었다. 교통난을 덜어 줄 대안은 땅속의 전차, 즉 지하철이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식이 열렸다. 서울 지하철은 1863년 영국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된 지 111년 만이었다.
서울은 출발은 늦었지만 4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엄청난 속도로 지하철을 건설해 왔다. 현재 서울의 지하철 연장은 세계 도시 중 세 번째다. 사진은 전차 운행을 중단하기 직전인 1968년 9월 서울 서대문 사거리의 전찻길 위를 자동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
2. [조선일보][일사일언] 자기다운 음악의 매력
인도의 전설적인 시타르 연주자 라비 샹카(1920~2012)의 오페라 '수카냐'를 지난주 잉글랜드의 중부 도시 레스터에서 초연했다. 인도의 전통 악기 연주자, 전통 무용가, 성악 솔로, 합창단에 오케스트라까지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공연이었다. 시타르나 탐부라 정도만 겨우 알아볼 뿐 이름도 모르는 악기들을 맨발에 양반다리를 하고 연주하는 것부터가 낯설었다. 그들 고유의 음정, 창법, 몸동작부터 전통 의상의 화려한 색감 등 모든 것이 오케스트라가 보통 하는 공연과 달랐다. 이런 건 역사상 처음, 전에 없던 일이라는 지휘자의 말이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공연에서 특별했던 것은 전통 악기는 전통 악기다웠고, 영어 가사가 붙은 아리아는 오페라 아리아다웠으며, 오케스트라 악기들은 오케스트라답게 쓰였다는 점이다. 곡을 쓴 사람이 두 세계를 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 라비 샹카는 같이 작업한 지휘자에게 인도 악기 비슷한 소리를 내라는 게 아니고 가장 바이올린다운 좋은 소리를 원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이 공연은 흥미로운 볼거리, 들을 거리로 가득했고 출연자는 각자 최선을 다해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다른 것들이 각자 가장 자기다울 때 비로소 같이 모아 놓아도 설득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달엔 주영 한국문화원 주최로 국악 연주자들과 한자리에서 연주했었다. 내가 속한 피아노 사중주 연주가 후반부에 있어서 아쉽게도 국악 연주는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 연주를 들으러 왔던 지인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전통 국악이 어떤지 자신은 전혀 모르지만 외국 여행을 가면 가끔 듣게 되는 관광객을 위해 단순화한 음악 같지는 않았으며 낯설면서도 호소력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어서 좋았다고.
덕분에 나도 그 이후 짬이 나면 국악을 듣고 있다. 산조도 좋고, 판소리도 좋다. 어느 작곡가가 한국 전통 악기와 무용, 성악,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쓰는 날도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다려 보기도 한다.
3. [경향신문][미디어 세상] ‘더 데일리 미’ 시대가 언론에 보내는 경고
대선에는 다섯 명이나 되는 유력후보가 등장했고 개인은 자유롭게 자신의 태도를 취했으며 지지를 드러냈다. 대선이 진화했으며 나쁘지 않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새로운 대통령의 며칠은 다른 신호들로 가득 찼다. 그는 신선한 자세와 태도, 군림하지 않는 습관과 문화를 드러냈다. 경쾌하고 빨랐다. 함께 드러난 옆의 사람들도 격의 없이 새로운 시대로 진입해 주었다.
무엇보다 대통령과 시민들 사이에 이중삼중의 칸막이가 생겨나지 않았다. 대통령 후보는 ‘클리앙’과 ‘오늘의 유머’에 직접 메시지를 전했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세월호 관련 오마이뉴스 기사 댓글에 댓글을 달았다. 우리가 기대한 다른 시대의 실체는 어쩌면 이런 것에 있었는지 모른다. 현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방식이 대통령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다른 면도 있었다. 얼마 전 한국과 미국의 정권 인수와 변환기를 경험하고 공부한 이경은 박사와 함께 대선 평가를 해봤다. 주요한 발견 중 하나는 “나에게 보여줘봐(Show Me)” 시대의 도래다. 정부와 기업과 정치인이 “나를 따르라(FollowMe)”에서 “나를 믿어줘(Trust Me)”로 변화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은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그 시대를 넘어서 버린 것이다.
개인은 그동안 강력한 힘을 발휘해 오던 정당, 언론, 시민단체보다 크고 힘이 셌다. 느슨하지만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진 시민은 언론의 기사를 보고 의견을 구하고 입장을 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개인들이 각자 필요한 미디어를 선택하고 정보를 취한다. 그렇게 스스로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미디어를 매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은 이러한 시스템의 공급처일 뿐이지 더 이상 공론의 장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단사고와 다른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는 확증편향이 한 시대의 확고한 시스템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변화하지 않고 과거에 머무르는 기존의 것들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그렇다. 대선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성장을 한, 자신이 지지하는 세계를 공고하게 연결하는 카카오친구 플러스의 엄청난 숫자 증가는 그 선상에 서 있다.
대선을 며칠 앞둔 날 서울시청을 지나는 좌석버스를 탔다. 빨간 야외복 잠바를 입은 젊은 할머니 한 분이 모바일폰을 붙잡고 계셨다. 놀라운 속도와 현란한 솜씨로 오른손 검지를 놀려 천지인 체계와 다양한 이모티콘을 활용하는 그분께 자꾸 눈이 갔다. 빨간 후보가 등장하는 정치 단톡방과 손자손녀가 등장하는 가족 단톡방이 동시 생방송되고 있었다. 흐뭇한 웃음과 비장한 표정이 교차했다. 기사는 공론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진영과 주장을 위해 소모되고 있었다. 다른 색깔의 지지자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언론은 그렇게 의미 없이 소진되고 있었다.
이경은 박사는 옛날 기사를 찾아 보내주었다. 당대 최고의 칼럼리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가 2009년 3월18일자 뉴욕타임스에 쓴 글이다. 제목은 “더 데일리 미(The Daily Me).” 글은 그해 사망한 시애틀 어느 신문사 부고로 시작된다. 이어 “온라인에 가면, 우리는 스스로 에디터가 되고, 게이트키퍼가 된다. 우리 마음에 드는 뉴스와 오피니언을 선택한다. (중략)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좋은 정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의 편견을 더 굳건하게 해주는 정보를 선호한다. 우리는 지성적으로는 (머리로는) 의견의 충돌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방음시설이 된 방에 우리를 가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지는 얘기 역시 충격을 더한다. 이들은 중립적 입장과 연구보다는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확고하게 해주는 지적 주장만을 받고 싶어하고 상대방에 대한 조금은 바보 같은 주장도 재미있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입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논쟁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이러한 ‘일간 나’ 현상은 그렇지 않아도 밀폐되어 있는 각자의 정치적 방에 우리 자신을 더욱 단절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고 미국인들이 갈수록 그들을 커뮤니티, 클럽, 교회라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고 주장한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미디어테크놀로지 전공 교수 니컬러스 네그로폰테가 이렇게 새로이 등장하는 뉴스 상품을 “더 데일리 미”라고 정의한 것이다.
칼럼의 결론은 양극화와 불관용이다. 대화를 진행할수록 보수주의자는 더 보수주의자가 되고 진보주의자는 더 진보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다음 대목에서 나는 서늘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의해 분노를 느끼지 않고, 우리의 신념은 더욱 굳어진다. 그로 인한 위험은 이러한 스스로 선택한 ‘뉴스’에 중독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는 회색에 가까운 세상이 우리 눈에는 검거나 혹은 하얗게 보이게 된다.”
언론은 시대에 뒤처져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언론은 ‘일간 나’ 시스템의 정보 공급처 중 하나가 될 뿐, 다양한 소통과 논의를 주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다른 시대를 같은 경험으로 풀어낼 수 없다”는 말을 언론에 건넨다. 그것이 대선이 언론에 주는 경고다.
4. [한국일보][삶과 문화] 그 환자의 마지막 투표
지난 선거날 평범한 심정지 할아버지 한 명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흉부를 누르는 심폐소생술로 급박한 카트 뒤에는 담담하고 침착해 보이는 그의 아들이 따라왔다. 의료진은 환자가 도착하자마자 재차 심정지를 확인하고, 소생실로 옮겨 심폐소생술을 유지했다. 할아버지의 심장은 정확히 6분 만에 돌아왔다. 하지만 맥이 매우 약했다.
나는 소생실을 나와 환자의 아들과 급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워낙 건강이 안 좋았지만 거동은 가능하셨다고 했다. 오늘 아침 일찍 투표까지 하고 오셨는데 그 뒤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셨다. 점차 흉통이 심해지자 아들은 아버지를 병원에 데리고 가기 위해 옷을 갈아 입히려 했고, 아버지는 외출복을 반쯤 입은 상태로 아들의 눈앞에서 쓰러졌다. 119가 도착하자 심정지였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확히 34분이 지났다.
“지금 일단 심장이 돌아오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났고 전반적인 상태도 너무 안 좋으십니다.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직접 가서 투표까지 하셨는데, 이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저희가 최선을 다 하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아들은 조용히 대답했다.
소생실로 돌아가자 할아버지의 심장이 다시 멎어 있었다. 몇 개의 손이 할아버지의 흉부를 번갈아 누르고 있었다. 돌아올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이대로 죽는다면,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투표가 된다. 그러니 나는 아침에 투표장에 나가서 투표를 하고 저녁때 죽는 삶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 그가 남긴 한 표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유언 한 마디 남길 여유 없이 급사한 그에게 그 표는 유서 같은 존재이겠지만, 결국 무기명의 종이 한 장으로 남을 것이다. 한 인생이 이 세상에서 종말을 고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일이 몇 천만 표에다 고작 한 표를 더하는 일이어도 괜찮은 것일까. 그것을 인생의 무게와 저울질한다면, 결국 무의미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만약 오늘이 투표날이고, 나는 내가 저녁때 죽을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아침에 투표를 안 하고 다른 일을 해야 내 죽음을 특별한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도 당장 특별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일상은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한다. 내가 저녁때 죽더라도 남들과 같이 아침과 점심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당장 투표날 투표라는 권리를 행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사람은 각기 자신에게 의미 있는 행위를 하며 지금을 사는 것이고, 그에게 투표는 그 의미에 상응하는 행위였을 뿐이다. 그는 오히려 마지막까지 주어진 권리를 누렸던 사람이다. 다만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오늘이 되었으므로, 그 표는 유난히 특별한 한 표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끝날 때까지 그의 심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내 말을 전해 듣고도 울지 않았다. 곧 사체는 하얀 포가 덮여 장례식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두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내가 동정할 수 있는 삶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다 남들처럼 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한 표, 괜히 목숨과도 바꾼 듯한 한 표, 그리고 그가 자신이 곧 죽을지도 모르고 떨리는 손으로 투표함에 표를 넣는 가슴 찡한 장면...
이윽고 사체를 실은 카트는 응급실을 영영 떠나버렸지만, 나는 그 한 표가 투표함 안에서 괜스레 빛나는 광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었다.
5. [한국일보][기억할 오늘] 나크바 데이
‘나크바(Nakba)’란 아랍어로 대재난이란 뜻이다. 5월 15일은 팔레스타인의 대재앙의 날, ‘나크바 데이(nakba Day)’다. 유엔 분할안에 따라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나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건국을 선언했고, 다음날 영국이 위임통치 종료를 선언했다. 졸지에 땅과 집을 잃은 팔레스타인 주민 70여 만 명이 졸지에 난민과 다름 없는 처지가 됐고, 곧이어 아랍연맹과 이스라엘의 전쟁(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이스라엘은 유대력 이야르(Iyar)월 5일(올해는 5월 2일)을 국경일인 독립기념일로 기린다. 홀로코스트 기념일(유대력 니산월 27일)서부터 전몰 군경 추모일을 거쳐 독립기념일까지가 이스라엘의 최대 국경주간. 독립기념일은 당연히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폭죽과 함께 각종 공연이 펼쳐지고, 야외 곳곳에서는 바비큐 파티가 벌어진다.
그 시간의 끝에 팔레스타인 인들의 나크바 데이가 있다. 요르단과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등에 흩어져 사는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그날은 설욕과 응전의 날이다. 이스라엘 국경 내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인구의 약 20%)에게는 아마 더 참담한 날일 것이다.
아랍인에게 ‘나크바’는 옛 오스만제국이 동맹국의 일원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패전 후 사실상 해체된 일을 의미했다고 한다. 시리아의 한 작가가 48년 여름 저 단어를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갖다 썼지만, 수복의 의지를 외면하는 듯한 패배주의적 어조 때문에 아랍권에서는 기피했다. 거듭된 중동전쟁에서 패하면서, 또 유엔 차원의 팔레스타인 국가 지위 인정 논의 (2012년 옵저버 지위 인정)가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점차 달라졌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그레고리력 5월 15일을 공식 ‘나크바 데이’로 제정ㆍ선포한 건 1998년이었다.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에 따르면 요르단 등지의 팔레스타인 난민은 등록된 숫자만 약 520만 명(기타지역 포함 570만 명)이다. 그들, 박탈당한 이들은 나크바 데이 시위에 촛불 대신 커다란 열쇠를 든다. 고향 헤브론과 예루살렘의 집 열쇠를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돌과 화염병을 드는 이들도 있고, 시위가 격해져서 이스라엘 방위군의 총격에 숨지는 이들도 매년 있다. 그들의 대재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주요신문사설
[서울신문]
1. 文 대통령 첫 안보회의 단호한 메시지 北 새겨야
문재인 대통령 정부가 출범하고 불과 나흘이 지난 어제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도발을 감행했다. 이 시기에 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린 의도가 무엇인지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어제 도발은 새 정부가 핵과 미사일로 정권의 안위를 도모하려는 자신들의 전략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게 순리다.
결론적으로 북한은 문 대통령의 단호한 대응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국제사회의 룰을 위반하고 동북아시아 평화를 깨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문 대통령은 탄도미사일 발사 직후 소집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회의에서 북한의 도발을 “유엔 안보리 관련 결의의 명백한 위반일 뿐 아니라 한반도는 물론 국제평화와 안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행위”로 규정했다. 이어 “강력한 규탄”과 함께 “깊은 유감”과 “엄중한 경고”라는 수위 높은 표현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말하는 새 정부에 미사일 발사로 응답한 김정은 정권에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이런 모습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국민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취임 직후의 대통령이 ‘지하벙커’로 불리는 청와대 위기관리센터 상황실에서 NSC 상임위를 주재한 것은 그 자체가 북한에 경고하는 효과가 있다. 회의에는 전 정부가 임명한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한민구 국방부 장관, 윤병세 외교부 장관, 홍용표 통일부 장관, 이병호 국정원장이 참석했고 이순진 합참의장은 화상보고를 했다.
전·현 정부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문 대통령은 나아가 “군은 굳건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어떤 군사도발에도 대응할 수 있게 철저한 대비 태세를 유지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 안보관(觀)의 일단을 파악하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북한의 도발에는 정치권도 한목소리로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강력한 응징”을 말했고 국민의당과 정의당은 “북한은 헛된 망상을 버릴 것”과 “무력 도발은 고립을 자초할 뿐”이라고 각각 비판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거론한 대로 사드 배치 문제의 해법은 새 정부의 당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은 도발이 대화를 말하는 새 정부의 입지를 좁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 대통령은 이날 “북한이 오판하지 않도록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고 했지만 대화 가능성은 여전히 열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대화가 가능하더라도 북한의 태도 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함을 보여 줘야 한다”고 했다. ‘태도 변화’라는 전제가 조금은 공고해졌으니 불필요한 도발은 북한에도 백해무익함을 알 수 있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라는 남북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데 북한이 훼방을 놓을 이유는 없다.
2. 유엔 고문위도 지적한 韓·日 위안부 합의
유엔 고문방지위원회가 한·일 위안부 협정의 개정 권고 보고서를 낸 것은 양국 간 비정상적인 합의 내용을 정상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점에서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한마디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 진실 규명, 재발 방지 약속 등과 관련해서 합의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재작년 12월의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국제사회에서 나온 첫 공식 평가다. 시기상으로도 함축성이 매우 크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일 아베 신조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리 국민 대다수가 정서적으로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며 재협상 가능성을 내비친 상황이다. 비록 구속력이 없지만, 대선 기간 위안부 합의 재검토를 내세웠던 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 준 보고서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번에 보고서가 협정 내용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들에는 어디 하나 틀린 말이 없다. 우선 일본 측이 이미 10억원을 출연해 배상했다고 주장하지만, 금전적인 보상만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반박했다. 위안부 강제 동원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법적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합의 이후에도 일본 정치인들이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라고 부르며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지만 합의에는 막을 대책이 없다. 객관적인 역사 자료를 계속 발굴해 진실을 규명하고, 교과서 기술과 사료관 건립 등을 통한 재발 방지 대책이 빠진 것도 문제다. 피해 당사자를 배제한 데다 국회 비준을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도 우리 국민의 정서를 오롯이 대변하고도 남는다.
위안부 문제는 당사자인 할머니들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수난사다. 그래서 내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국민의 자존심, 나라의 품격을 손상시킨 사례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베 총리는 여전히 “위안부 합의는 국제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만큼 양국이 책임을 갖고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유엔의 합의 내용 개정 권고로 상당히 설득력을 잃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국내 정치용으로 계속 써먹다가 국제사회에서 낭패당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우리 정부도 이전 정부처럼 양국 관계가 출범 초기부터 대결 국면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유엔 보고서를 지렛대 삼아 멀티 트랙으로 움직이는 새로운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3. ‘인천공항’ 비정규직 전환, 민간 확산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한 의미는 각별하다. 취임과 동시에 1호 업무로 일자리위원회 구성을 지시한 것과 맥락이 닿은 행보다. 지난 12일 인천공항공사를 찾은 문 대통령은 “공공 부문의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일자리 문제를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일찍이 선언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대선 주요 공약이기도 했다. 취임하자마자 설치를 지시한 일자리위원회도 대통령 직속으로 운영된다. 청와대의 몸집을 줄이면서도 일자리 담당 수석비서관을 신설하기로 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는 ‘차별 없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일관된 방향성이 감지된다. 무엇보다 반갑고 든든하다.
우리나라 비정규직 근로자의 지난해 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54%에 불과했다. 비정규직의 근무 환경과 처우를 개선하는 작업은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공공 부문에 고용된 비정규직만 해도 현재 30만명이 넘는다. 이들 중 상시적 업무를 하는 사람은 정규직으로 우선 전환하도록 유도한다는 게 새 정부의 방침이다.
쉬운 일일 수야 없다. 그러나 좋은 일자리를 함께 나누려는 의지가 전제되면 가능한 일이다. 인천공항공사만 봐도 알 수 있다. 로봇을 도입해 인력을 대폭 줄이려던 당초 계획을 접고 비정규직 1만명 전원을 연내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방향을 틀었다.
문제는 얼마나 내실이 있느냐에 있다. 공공 부문의 비정규직 고용 개선 노력은 지금까지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기간제 노동자들은 근무 여건이나 임금에서 차별을 벗지 못했다. 인천공항공사의 움직임에 주말 내내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다.
대기업 평균보다 연봉이 높은 ‘신의 직장’ 공공기관들이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에 기득권을 나눠 줄지가 우선 의문이다. 많은 공공기관들이 독과점을 무기로 생산성 향상은 뒷전이라는 질타를 받고 있다. 경쟁 없이 편히 벌어 푸짐하게 나눠 먹는 지금의 해이한 임금체계를 먼저 손봐야 한다. 그러지 않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만 이행돼서는 국민 부담만 늘게 되는 셈이다.
비정규직 제로 시대는 기존의 고임금 정규직 근로자들의 양보가 선행돼야 비로소 해답이 보인다. 그런 인식의 토대 위에서 공공기관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모범 선례를 착실히 쌓아 주기를 기대한다. 그래야만 민간에서도 변화의 싹이 틀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
4. '우병우 봐주기' 수사 해놓고 술판 벌인 적폐검찰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불구속 기소 처리한 지 나흘 만에 검찰 수사팀과 법무부 간부들이 금일봉을 주고받으며 술판을 벌인 사실이 드러났다. 구체적인 경위는 좀더 확인이 필요하겠으나 <한겨레>가 취재한 사실만으로도 국민들의 시선을 아랑곳 않는 검사들의 오만함이 느껴진다. 부실 수사로 비판이 쏟아지는 민감한 시점에 돈봉투 돌리며 폭탄주까지 나눠 마셨다니 ‘검찰 권력’은 역시 적폐요 청산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팀 검사 등 7명, 안태근 검찰국장 등 법무부 간부 3명은 4월21일 서울 서초동 음식점에서 폭탄주 10여잔을 나눠 마시고 50만~100만원이 든 금일봉도 주고받았다고 한다. 부실 수사로 지탄을 받은 수사팀과 직권남용의 공범 혐의를 받아온 검찰 간부들이 자숙은커녕 검찰청사 인근에서 술판까지 벌였으니 말문이 막힌다. 이 지검장은 국정농단 수사책임자였고 안 국장은 우 전 수석과의 통화로 내사 대상이어서 법 위반 소지도 있다. 애초의 통화 전말을 포함해 봐주기 수사의 직권남용 의혹까지 재수사 필요성도 더욱 커졌다.
우 전 수석의 ‘검찰 농단’ 혐의는 ‘검찰 패밀리’에 의해 덮어졌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윤갑근 수사팀은 수사 초기부터 늑장 압수수색에 통화내역도 확보 않는 등 사실상 증거인멸을 방치했다. 특검 역시 시간적 제약 속에 친분관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결국 검찰은 두번째 수사에서도 개인 비리를 파헤치지 않는 등 소극 수사로 영장 기각을 자초했고 그 뒤에도 보충수사도 없이 불구속 기소 해버려 의혹을 키웠다.
온 국민이 분노하고 검사들도 다 짐작하는 적폐검찰의 ‘과거’를 그대로 두고는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검찰개혁 입법의 동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청산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이데일리]
5. 시험대에 오른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긴급 소집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북한 도발에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북한이 이날 새벽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한 데 대한 엄중 경고다. “이번 도발은 유엔안보리 관련 결의의 명백한 위반일 뿐 아니라 한반도는 물론 국제평화와 안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는 게 문 대통령의 규탄 내용이다. 취임 나흘 만에 윤곽을 드러낸 문재인 정부의 대북 안보정책 기조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이 북한 미사일 발사 보고에 접하고 곧바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다는 자체에서 긴박했던 분위기를 짐작하게 된다. 고강도의 핵실험이 아니라 사소한 도발과 책동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달빛정책’ 가능성에 대해 나라 안팎의 의구심이 쏠리는 상황에서 국가안보 측면에서만큼은 확실한 입장을 밝힌 것으로 간주된다.
이번 조치로 국민들이 문 대통령의 대북 안보관에 대해 더욱 신뢰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문 대통령이 “여건이 조성되면 평양에 가겠다”고 언급한 것이 남북 화해를 이루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선거 과정에서 빚어진 ‘주적(主敵)’ 논란 등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미심쩍어 했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애초에는 “당선되면 미국보다 북한을 먼저 가겠다”고도 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문 대통령의 대북 접근 움직임에 대해 경계심을 표명하는 것도 이러한 기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한·미 양국 간에 정상회담 일정과 의제에 대한 조율이 시작되는 만큼 대북 화해를 위한 문 대통령의 기본 의지를 전달하면서도 굳건한 대북공조 체제가 차질을 빚지 않도록 서로 의견을 모아가는 노력이 요구된다.
어느 정권에서도 대북 화해정책은 필요하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가 핵·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는 한에 있어서는 어떠한 화해 노력도 소용이 없다. 문 대통령이 이날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대화가 가능하더라도 북한의 태도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함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를 일찌감치 시험대에 올려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스승의날’ 김영란법, 아무래도 문제 있다
스승의날을 맞는다. 스승을 존중하는 풍토가 사라지면서 스승의날 행사가 한낱 겉치레로 전락한 지 오래다. 부정청탁 금지법(김영란법) 시행 이후 처음 맞이하는 올해는 유난히 더 쓸쓸한 분위기다. 캔커피는 물론 카네이션조차도 뇌물로 간주돼 함부로 주고받을 수 없게 된 때문이다. 김영란법이 사제지간의 소소한 정마저 끊는다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스승의날에 카네이션 선물이 전면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면 누구나 가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다. 학생회장이나 학급 반장, 동아리 대표 등 오로지 ‘학생 대표’만이 할 수 있다. 대표가 아닌 학생은 아무리 감사한 마음이 있더라도 선생님 가슴에 꽃도 달아 드릴 수 없는 이상한 사회가 돼버렸다.
심지어 색종이로 접어 만든 종이 카네이션도 금지 대상이다. 그것이 어째서 뇌물인가. 지난해에는 괜찮다고 했었다. 현장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가 허용 대상이고, 어디부터는 위반인지 매뉴얼을 뒤져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규정이 모호한 탓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다. 국민권익위마저 자꾸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졸속 제정의 후유증이다.
김영란법 제정 취지는 부패 고리를 끊어 청렴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취지가 좋다고 해도 부작용이 크고 혼란만 야기한다면 합리적인 방향으로 고치는 것이 옳다. 학생이 선생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작은 성의까지 미주알고주알 법의 잣대로 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다간 김영란법에 대한 사회적인 거부감만 커지기 마련이다. 예절과 관습으로 이뤄지던 것을 법규에 포함시켜 강제로 규율한 자체가 잘못이다.
김영란법이 과도한 선물을 주고받는 부담을 덜어주는 순기능이 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제지간에 정을 나누고 고마움을 전하는 건전한 미풍양속까지 가로막는 역기능은 조속히 고쳐져야 한다. 법 규정을 그대로 존치시킨다고 해도 원래 취지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의 선물은 허용하도록 관련 규정을 손보는 게 온당하다. 사제지간을 일반 사회의 거래관계나 이권청탁 관계로 간주하는 것부터가 웃기는 발상이다.
[중앙일보]
7. 전병헌 신임 정무수석에 거는 기대
박근혜 정부가 몰락한 핵심 원인의 하나는 엉망인 당정 관계였다. 의원들이 뽑은 집권당 원내대표가 대통령 한마디에 쫓겨나고, 친박 실세 몇몇이 당 공천을 좌지우지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임기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청와대와 당 사이에서 갈등을 풀어줘야 할 정무수석은 재량권이 없어 대통령 눈치 보기에만 급급했다. 정권의 머리와 몸통이 원수처럼 싸우며 따로 놀았으니 총선·대선에서 연패하고 무너진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정무수석에 전병헌 전 의원을 임명한 것을 주목한다. 전 신임 수석은 비문(동교동계) 3선 의원 출신으로 민주당 원내대표 시절 유연한 협상력을 선보였고, 대인관계도 원만해 야권에도 가까운 의원이 많다. 당정 관계를 수평적으로 운영하고, 야권과의 대화도 활성화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엿보이는 인사란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집권당 의석은 120석에 불과하다. 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정의당과 연대하지 않으면 국정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 또 당내에도 비문세력이 만만찮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언제든 자중지란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다.
전 정무수석의 어깨가 그래서 무겁다. 이념과 지지기반, 노선이 제각기 다른 5당과 청와대 사이를 조율해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할 힘든 과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전 수석은 무엇보다 여야를 가리지 말고 의원들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그들의 쓴소리를 대통령에게 가감 없이 전달해야 한다. 집권당의 위세를 앞세워 군소야당을 흡수해 온 구시대적 정계개편 시나리오를 버리고,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통분모를 찾는 협치의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첫날 야당 지도부를 찾아 "최대한 자주 대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이 빈말이 되지 않게 하려면 전 정무수석에게 확실한 권한을 주고, 그가 전하는 비주류와 야당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의 비극은 수석들이 몇 달이 되도록 대통령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웠던 폐쇄적 시스템에서 비롯됐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8. 랜섬웨어 대응, 골든타임 놓치지 말아야
지난 12일(현지시간) 이후 영국·러시아 등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 약 100개국에서 12만 건 이상의 랜섬웨어 공격이 발생해 병원·기업·정부기관 등의 업무가 마비되거나 차질을 빚었다. 국내에서도 대학병원과 기업 등 최소 5곳에서 비슷한 감염 징후가 보고됐다. 국가 사이버 위기경보도 '관심'에서 '주의'로 상향됐다.
랜섬웨어는 모바일이나 PC에 침투해 시스템을 잠그거나 데이터를 암호화해 열리지 않게 한 뒤 이를 푸는 대가로 금품을 요구한다. 이런 악성 프로그램의 개발과 유포는 인질극이나 다름없는 사이버 중범죄다. 국제사회가 공조해 범인을 색출하고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
더 큰 문제는 랜섬웨어를 해결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다는 점이다. PC나 모바일을 포맷해 쓸 수 있지만 데이터는 포기해야 한다. 몸값을 주고 해독 키를 받아 데이터를 복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유괴범과 타협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런 대응은 재발만 부추길 뿐이다. 따라서 해커의 요구에 사적으로 따르지 말고 준정부기관인 한국인터넷진흥원에 신고해 공적으로 대응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의 경우 기업과 공공기관이 쉬는 주말과 겹쳐 피해 보고가 적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과 관공서가 근무를 재개하는 오늘부터 피해가 추가 확인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관공서·병원·학교 등은 직원들이 출근 직후 수상한 첨부파일을 열거나 특정 사이트를 함부로 방문하지 않도록 미리 주의시켜야 한다. 랜섬웨어는 e메일 첨부파일을 열거나 파일 공유 사이트를 통해 전파되는 것은 물론 특정 웹사이트를 방문만 해도 공격받을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단축 URL이나 사진을 통해서도 유포될 수 있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인터넷진흥원은 대처방법이 보다 많은 국민에게 전달되도록 발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운영체제(OS)업체나 보안업체도 수시 업데이트를 통해 피해 방지에 앞장서야 한다. 개인 차원에선 중요 자료를 정기적으로 백업하는 습관을 들일 계기로 삼아야 한다. 다양한 사이버 공격에 데이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세계일보]
9. 문 대통령, 외교·안보 컨트롤타워 신속히 구축하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총리·국정원장 후보자와 함께 비서실장 인사를 가장 먼저 했다. 이어 청와대 민정·국민소통·인사 수석을 임명했고 어제는 정무수석 등의 명단을 발표했다. 맨 먼저 인천공항으로 달려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다”고도 했다. 국정교과서 폐지와 5·18 기념식 때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지시가 잇따라 나왔다. 대통령의 동선은 정부가 정책의 중점을 어디에 두는지를 말해주는 강력한 메시지다.
외교·안보는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해선 안 된다. 한반도는 격동의 중심지다. 북한 김정은 정권의 잇단 도발에다 주변 강국의 ‘코리아 패싱’, 미·일·중·러 지도자들의 압박이 거칠다. 엄중한 상황에서 외교·안보 컨트롤타워 구축은 무엇보다 긴요한 업무다. 어제 북한의 미사일 도발 대응에선 김관진 안보실장과 윤병세 외교장관이 나서야 했다. 전 정부 외교·안보 라인으로는 근본적인 대응을 할 수 없다. 전·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의 노선 차이가 상당해 엇박자가 나기 십상이다. 사드 대책도 그중 하나다. 어정쩡한 동거가 장기화하면 업무 혼란이 커지고 국가안보에 구멍이 생기게 된다.
외교와 국방·통일 장관은 헌법상 총리 제청이 필요해 시일이 걸린다. 이낙연 총리 후보자가 이달 안 국회 동의절차를 통과하더라도 총리 제청을 거치면 외교·안보 관련 장관 임명은 내달 중·하순으로 늦춰질 수 있다. 국가안보실장 인선을 먼저 해 외교·안보 라인의 공백을 차단해야 한다. 청와대는 “검증에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군과 외교관, 학자 등 어느 출신으로 갈 것인지를 두고 정돈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도 나돈다.
전 정부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박근혜정부는 국방장관 출신을 안보실장에 앉혔다. 군 출신은 대북 문제에 전문성이 높은 장점이 있다. 그러나 국익 위주로 돌아가는 냉엄한 외교전을 보는 눈이 약하다. 그러다 보니 외교안보수석을 따로 두고 비서실장과 안보실장의 지휘를 같이 받도록 하는 이원적 조직을 꾸려야 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안보실의 조직을 강화했다. 외교안보수석을 없애고 관련 기능을 안보실로 흡수해 통합시켰다. 급박한 안보위기의 대응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다. 문 대통령은 총체적 난관을 헤쳐나갈 역량을 가진 국가안보실장을 조속히 임명해 강력한 외교·안보 컨트롤 타워를 구축해야 한다.
[매일경제]
10. 文대통령 친서민 행보에 대한 기대와 환호 속 일말의 우려
문재인 대통령의 소통, 친서민 행보가 연일 화제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주말인 13일 대선기간 자신을 전담취재했던 기자 60여 명과 북악산에 올라 감사의 뜻을 전했다. 등산 후 구내식당 오찬에서 문 대통령이 직접 배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밥을 푸고, 임종석 비서실장이 앞치마를 두르고 배식을 해 눈길을 끌었다.
국민은 이 같은 문 대통령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에 환호하고 있다. 해외와 비교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장면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정부의 깜깜이 청와대에 실망했던 국민은 '참모들과의 커피 산책' '비서관들과의 겸상' '출근길 시민과 셀카' 같은 뉴스에 "신선하다"며 박수를 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또 세월호 관련 기사에 '문변'이란 아이디로 직접 댓글도 달아 국민의 아픔에 공감하는 소통의 정치를 보여줬다. 과거의 권위적이고 경직됐던 청와대와 비교하면 큰 변화임에 틀림없다.
김정숙 여사 역시 따뜻한 스킨십과 인간적인 면모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13일 청와대 관저로의 이사를 위해 짐을 싸는 도중 집 앞으로 찾아온 민원인이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었다"고 하자 라면을 대접했다. 민원인은 "한마디라도 들어주기라도 한다는 게 어딘가. 세상이 바뀐 것 같다"며 감동했다고 한다.
청와대와 국민 사이에 놓여 있는 높은 장벽에 절망하고 불통의 정치에 억눌려온 서민들로서는 큰 변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은 탈권위적인 청와대를 만들겠다고 천명했는데 좋은 출발이다. 군림하는 청와대, 제왕적인 대통령제 청산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은 만큼 정권 초기 보여주기식 쇼에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다. 국정교과서 폐지와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등을 우선적으로 지시한 점이 그렇다. 모두 공약 사항이지만 통합과 협치, 포용이 우선시되는 현시점에서 그렇게 서두를 만한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조국 민정수석이 "검찰의 수사를 지휘하지 않겠다"고 말한 후 3시간 만에 문 대통령이 세월호 재조사와 국정농단 추가 조사를 언급한 데 대해서도 우려 섞인 시선들이 적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탈권위적인 행보에 대해 국민은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경제·안보 위기 대응, 야당과의 협치 등 시급한 현안에 대해서도 탁월한 국정 운영 능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주요신문칼럼
1. [서울신문][그때의 사회면] 노면 전차
논란 속에 대전 지하철 2호선을 트램(노면 전차)으로 운행한다는 계획이 확정됐다. 2025년 완공 목표인데 전차가 사라진 지 57년 만에 다시 등장하는 셈이다. 대전의 트램은 무가선으로 별도의 전기 공급선 없이 대용량 전지를 충전하여 운행하는 방식이다.
서울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에 최초로 전차 선로가 부설되어 역사적인 개통식이 열린 것은 1899년 5월 17일이었다. 그러나 전차는 평균 시속이 7㎞밖에 안 됐고 자동차 운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1968년 11월 29일에 운행을 중단했다.
전차의 이런 문제는 지금도 풀리지 않아 트램 운행을 반대하는 대전 시민들도 많다고 한다. 그래도 친환경적이고 타고 내리기가 쉬워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는 전차가 주요한 교통수단이다.
구한말에 전차가 들어온 계기는 명성황후와 관련이 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뒤 고종 황제는 황후가 묻힌 청량리 홍릉(지금은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을 자주 찾았다. 이를 본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과 보스트위크가 행차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며 고종을 설득했다. ‘전기철도’, ‘전기거’, ‘전거’라고도 불리던 서울의 전차는 일본 교토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운행된 첨단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막상 전차가 개통되자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전차의 모양새가 상여를 닮았다며 불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탑골공원 앞에서 5살 어린이가 전차에 치여 숨지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전차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질렀다.
193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전차 노선은 점차 확장되었다. 동대문에서 청량리·왕십리·노량진·마포행과 을지로 순환선, 종로~돈암동선, 효자동~원효로선이 완성되었다. 6·25 후 이화동∼중앙청, 아현동~신촌 구간을 운행했다. 교통량이 급증하자 1957년 무렵부터 전차 운행 중단론이 나왔다. 전차는 도로를 점유하는 만큼 수송 효율성이 따라가지 못해서다.
1955년에 서울의 자동차 수는 4359대였는데 1965년에는 1만 6624대로 불어났다. 전차 퇴출에 속도를 낸 사람은 1966년 4월 부산시장에서 서울시장으로 영전한 육군 소장 출신 김현옥이었다. 교통난을 덜어 줄 대안은 땅속의 전차, 즉 지하철이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식이 열렸다. 서울 지하철은 1863년 영국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된 지 111년 만이었다.
서울은 출발은 늦었지만 4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엄청난 속도로 지하철을 건설해 왔다. 현재 서울의 지하철 연장은 세계 도시 중 세 번째다. 사진은 전차 운행을 중단하기 직전인 1968년 9월 서울 서대문 사거리의 전찻길 위를 자동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
2. [조선일보][일사일언] 자기다운 음악의 매력
인도의 전설적인 시타르 연주자 라비 샹카(1920~2012)의 오페라 '수카냐'를 지난주 잉글랜드의 중부 도시 레스터에서 초연했다. 인도의 전통 악기 연주자, 전통 무용가, 성악 솔로, 합창단에 오케스트라까지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공연이었다. 시타르나 탐부라 정도만 겨우 알아볼 뿐 이름도 모르는 악기들을 맨발에 양반다리를 하고 연주하는 것부터가 낯설었다. 그들 고유의 음정, 창법, 몸동작부터 전통 의상의 화려한 색감 등 모든 것이 오케스트라가 보통 하는 공연과 달랐다. 이런 건 역사상 처음, 전에 없던 일이라는 지휘자의 말이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공연에서 특별했던 것은 전통 악기는 전통 악기다웠고, 영어 가사가 붙은 아리아는 오페라 아리아다웠으며, 오케스트라 악기들은 오케스트라답게 쓰였다는 점이다. 곡을 쓴 사람이 두 세계를 다 잘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 라비 샹카는 같이 작업한 지휘자에게 인도 악기 비슷한 소리를 내라는 게 아니고 가장 바이올린다운 좋은 소리를 원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이 공연은 흥미로운 볼거리, 들을 거리로 가득했고 출연자는 각자 최선을 다해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다른 것들이 각자 가장 자기다울 때 비로소 같이 모아 놓아도 설득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달엔 주영 한국문화원 주최로 국악 연주자들과 한자리에서 연주했었다. 내가 속한 피아노 사중주 연주가 후반부에 있어서 아쉽게도 국악 연주는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 연주를 들으러 왔던 지인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전통 국악이 어떤지 자신은 전혀 모르지만 외국 여행을 가면 가끔 듣게 되는 관광객을 위해 단순화한 음악 같지는 않았으며 낯설면서도 호소력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어서 좋았다고.
덕분에 나도 그 이후 짬이 나면 국악을 듣고 있다. 산조도 좋고, 판소리도 좋다. 어느 작곡가가 한국 전통 악기와 무용, 성악,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쓰는 날도 오지 않을까, 은근히 기다려 보기도 한다.
3. [경향신문][미디어 세상] ‘더 데일리 미’ 시대가 언론에 보내는 경고
대선에는 다섯 명이나 되는 유력후보가 등장했고 개인은 자유롭게 자신의 태도를 취했으며 지지를 드러냈다. 대선이 진화했으며 나쁘지 않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새로운 대통령의 며칠은 다른 신호들로 가득 찼다. 그는 신선한 자세와 태도, 군림하지 않는 습관과 문화를 드러냈다. 경쾌하고 빨랐다. 함께 드러난 옆의 사람들도 격의 없이 새로운 시대로 진입해 주었다.
무엇보다 대통령과 시민들 사이에 이중삼중의 칸막이가 생겨나지 않았다. 대통령 후보는 ‘클리앙’과 ‘오늘의 유머’에 직접 메시지를 전했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세월호 관련 오마이뉴스 기사 댓글에 댓글을 달았다. 우리가 기대한 다른 시대의 실체는 어쩌면 이런 것에 있었는지 모른다. 현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방식이 대통령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다른 면도 있었다. 얼마 전 한국과 미국의 정권 인수와 변환기를 경험하고 공부한 이경은 박사와 함께 대선 평가를 해봤다. 주요한 발견 중 하나는 “나에게 보여줘봐(Show Me)” 시대의 도래다. 정부와 기업과 정치인이 “나를 따르라(FollowMe)”에서 “나를 믿어줘(Trust Me)”로 변화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은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그 시대를 넘어서 버린 것이다.
개인은 그동안 강력한 힘을 발휘해 오던 정당, 언론, 시민단체보다 크고 힘이 셌다. 느슨하지만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진 시민은 언론의 기사를 보고 의견을 구하고 입장을 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개인들이 각자 필요한 미디어를 선택하고 정보를 취한다. 그렇게 스스로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미디어를 매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은 이러한 시스템의 공급처일 뿐이지 더 이상 공론의 장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집단사고와 다른 가능성을 배제해 버리는 확증편향이 한 시대의 확고한 시스템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변화하지 않고 과거에 머무르는 기존의 것들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해도 그렇다. 대선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성장을 한, 자신이 지지하는 세계를 공고하게 연결하는 카카오친구 플러스의 엄청난 숫자 증가는 그 선상에 서 있다.
대선을 며칠 앞둔 날 서울시청을 지나는 좌석버스를 탔다. 빨간 야외복 잠바를 입은 젊은 할머니 한 분이 모바일폰을 붙잡고 계셨다. 놀라운 속도와 현란한 솜씨로 오른손 검지를 놀려 천지인 체계와 다양한 이모티콘을 활용하는 그분께 자꾸 눈이 갔다. 빨간 후보가 등장하는 정치 단톡방과 손자손녀가 등장하는 가족 단톡방이 동시 생방송되고 있었다. 흐뭇한 웃음과 비장한 표정이 교차했다. 기사는 공론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진영과 주장을 위해 소모되고 있었다. 다른 색깔의 지지자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언론은 그렇게 의미 없이 소진되고 있었다.
이경은 박사는 옛날 기사를 찾아 보내주었다. 당대 최고의 칼럼리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가 2009년 3월18일자 뉴욕타임스에 쓴 글이다. 제목은 “더 데일리 미(The Daily Me).” 글은 그해 사망한 시애틀 어느 신문사 부고로 시작된다. 이어 “온라인에 가면, 우리는 스스로 에디터가 되고, 게이트키퍼가 된다. 우리 마음에 드는 뉴스와 오피니언을 선택한다. (중략)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좋은 정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의 편견을 더 굳건하게 해주는 정보를 선호한다. 우리는 지성적으로는 (머리로는) 의견의 충돌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방음시설이 된 방에 우리를 가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지는 얘기 역시 충격을 더한다. 이들은 중립적 입장과 연구보다는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확고하게 해주는 지적 주장만을 받고 싶어하고 상대방에 대한 조금은 바보 같은 주장도 재미있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입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논쟁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이러한 ‘일간 나’ 현상은 그렇지 않아도 밀폐되어 있는 각자의 정치적 방에 우리 자신을 더욱 단절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고 미국인들이 갈수록 그들을 커뮤니티, 클럽, 교회라는 명분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고 주장한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미디어테크놀로지 전공 교수 니컬러스 네그로폰테가 이렇게 새로이 등장하는 뉴스 상품을 “더 데일리 미”라고 정의한 것이다.
칼럼의 결론은 양극화와 불관용이다. 대화를 진행할수록 보수주의자는 더 보수주의자가 되고 진보주의자는 더 진보주의자가 된다는 것이다. 다음 대목에서 나는 서늘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의해 분노를 느끼지 않고, 우리의 신념은 더욱 굳어진다. 그로 인한 위험은 이러한 스스로 선택한 ‘뉴스’에 중독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제로는 회색에 가까운 세상이 우리 눈에는 검거나 혹은 하얗게 보이게 된다.”
언론은 시대에 뒤처져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언론은 ‘일간 나’ 시스템의 정보 공급처 중 하나가 될 뿐, 다양한 소통과 논의를 주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다른 시대를 같은 경험으로 풀어낼 수 없다”는 말을 언론에 건넨다. 그것이 대선이 언론에 주는 경고다.
4. [한국일보][삶과 문화] 그 환자의 마지막 투표
지난 선거날 평범한 심정지 할아버지 한 명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흉부를 누르는 심폐소생술로 급박한 카트 뒤에는 담담하고 침착해 보이는 그의 아들이 따라왔다. 의료진은 환자가 도착하자마자 재차 심정지를 확인하고, 소생실로 옮겨 심폐소생술을 유지했다. 할아버지의 심장은 정확히 6분 만에 돌아왔다. 하지만 맥이 매우 약했다.
나는 소생실을 나와 환자의 아들과 급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워낙 건강이 안 좋았지만 거동은 가능하셨다고 했다. 오늘 아침 일찍 투표까지 하고 오셨는데 그 뒤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셨다. 점차 흉통이 심해지자 아들은 아버지를 병원에 데리고 가기 위해 옷을 갈아 입히려 했고, 아버지는 외출복을 반쯤 입은 상태로 아들의 눈앞에서 쓰러졌다. 119가 도착하자 심정지였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확히 34분이 지났다.
“지금 일단 심장이 돌아오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났고 전반적인 상태도 너무 안 좋으십니다.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직접 가서 투표까지 하셨는데, 이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저희가 최선을 다 하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아들은 조용히 대답했다.
소생실로 돌아가자 할아버지의 심장이 다시 멎어 있었다. 몇 개의 손이 할아버지의 흉부를 번갈아 누르고 있었다. 돌아올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이대로 죽는다면,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투표가 된다. 그러니 나는 아침에 투표장에 나가서 투표를 하고 저녁때 죽는 삶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 그가 남긴 한 표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유언 한 마디 남길 여유 없이 급사한 그에게 그 표는 유서 같은 존재이겠지만, 결국 무기명의 종이 한 장으로 남을 것이다. 한 인생이 이 세상에서 종말을 고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일이 몇 천만 표에다 고작 한 표를 더하는 일이어도 괜찮은 것일까. 그것을 인생의 무게와 저울질한다면, 결국 무의미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만약 오늘이 투표날이고, 나는 내가 저녁때 죽을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아침에 투표를 안 하고 다른 일을 해야 내 죽음을 특별한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도 당장 특별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일상은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한다. 내가 저녁때 죽더라도 남들과 같이 아침과 점심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당장 투표날 투표라는 권리를 행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사람은 각기 자신에게 의미 있는 행위를 하며 지금을 사는 것이고, 그에게 투표는 그 의미에 상응하는 행위였을 뿐이다. 그는 오히려 마지막까지 주어진 권리를 누렸던 사람이다. 다만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오늘이 되었으므로, 그 표는 유난히 특별한 한 표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끝날 때까지 그의 심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내 말을 전해 듣고도 울지 않았다. 곧 사체는 하얀 포가 덮여 장례식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두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내가 동정할 수 있는 삶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다 남들처럼 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한 표, 괜히 목숨과도 바꾼 듯한 한 표, 그리고 그가 자신이 곧 죽을지도 모르고 떨리는 손으로 투표함에 표를 넣는 가슴 찡한 장면...
이윽고 사체를 실은 카트는 응급실을 영영 떠나버렸지만, 나는 그 한 표가 투표함 안에서 괜스레 빛나는 광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었다.
5. [한국일보][기억할 오늘] 나크바 데이
‘나크바(Nakba)’란 아랍어로 대재난이란 뜻이다. 5월 15일은 팔레스타인의 대재앙의 날, ‘나크바 데이(nakba Day)’다. 유엔 분할안에 따라 영국령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나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건국을 선언했고, 다음날 영국이 위임통치 종료를 선언했다. 졸지에 땅과 집을 잃은 팔레스타인 주민 70여 만 명이 졸지에 난민과 다름 없는 처지가 됐고, 곧이어 아랍연맹과 이스라엘의 전쟁(제1차 중동전쟁)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이스라엘은 유대력 이야르(Iyar)월 5일(올해는 5월 2일)을 국경일인 독립기념일로 기린다. 홀로코스트 기념일(유대력 니산월 27일)서부터 전몰 군경 추모일을 거쳐 독립기념일까지가 이스라엘의 최대 국경주간. 독립기념일은 당연히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폭죽과 함께 각종 공연이 펼쳐지고, 야외 곳곳에서는 바비큐 파티가 벌어진다.
그 시간의 끝에 팔레스타인 인들의 나크바 데이가 있다. 요르단과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등에 흩어져 사는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그날은 설욕과 응전의 날이다. 이스라엘 국경 내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인구의 약 20%)에게는 아마 더 참담한 날일 것이다.
아랍인에게 ‘나크바’는 옛 오스만제국이 동맹국의 일원으로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패전 후 사실상 해체된 일을 의미했다고 한다. 시리아의 한 작가가 48년 여름 저 단어를 팔레스타인의 비극에 갖다 썼지만, 수복의 의지를 외면하는 듯한 패배주의적 어조 때문에 아랍권에서는 기피했다. 거듭된 중동전쟁에서 패하면서, 또 유엔 차원의 팔레스타인 국가 지위 인정 논의 (2012년 옵저버 지위 인정)가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점차 달라졌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그레고리력 5월 15일을 공식 ‘나크바 데이’로 제정ㆍ선포한 건 1998년이었다.
유엔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에 따르면 요르단 등지의 팔레스타인 난민은 등록된 숫자만 약 520만 명(기타지역 포함 570만 명)이다. 그들, 박탈당한 이들은 나크바 데이 시위에 촛불 대신 커다란 열쇠를 든다. 고향 헤브론과 예루살렘의 집 열쇠를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돌과 화염병을 드는 이들도 있고, 시위가 격해져서 이스라엘 방위군의 총격에 숨지는 이들도 매년 있다. 그들의 대재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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